봉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상황을 확인했다.
나를 막으려다가 인파이터와 건슬링어에게 붙잡힌 두 명도 어느새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별다른 일 없이 아스타로트와 영화별론가가 이길 것이다.
화면을 돌리며 주위 상황을 살피다가 왼편에서 날아오는 스킬 이펙트를 발견하고 재빨리 뛰어서 옆으로 피했다. 콰앙, 새파란 불꽃이 방금 내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아크메이지가 있었나.’
이럼 좀 복잡해지는데.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스킬을 피하며 아크메이지의 위치를 파악했다. 여러 명이 뒤엉켜서 싸울 때는 무조건 원거리부터 처리해야 했다.
돌진기가 아직 쿨타임이라서 버텨야 했다. 봉술가는 스킬 쿨타임이 짧은 원거리와 상성이 좋은 편은 아닌 터라, 무빙으로 날아오는 모든 스킬을 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몇 대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내 캐릭터에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제가 당신을 지켜드릴게요.】
힐러인 야옹이의 힐 스킬이 파티원 전체에 들어왔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다른 스킬은 다 버리고 힐량에 모든 걸 쏟아부은 야옹이답게 힐 한 번에 어마어마한 체력이 차올랐다. 다른 힐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힐량이었다.
덕분에 돌진기 쿨타임까지 버틸 수 있었던 나는 쿨타임이 끝났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적 틈으로 파고들었다. 후웅! 적들 사이에서 봉을 한 바퀴 크게 휘두르자 아크메이지를 지키던 놈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ㅎㅇ
감히 뒤에 숨어서 마법을 쏴대? 넌 뒈졌어.
매너 있게 인사부터 하고 나서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아크메이지를 향해 가차 없이 스킬을 퍼부었다. 방어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원거리 딜러인 아크메이지는 체력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딜러치고는 체력과 방어력이 어느 정도 받쳐 주는 워로드도 세 번 맞고 죽었는데 아크메이지가 내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회피기로 내 스킬을 피했지만, 그거 하나 피한다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아크메이지가 풀썩 쓰러졌다. 때마침 아스타로트와 영화별론가가 상대하던 놈들도 죽었다. 순식간에 네 명이 죽고 다섯 명이 남았다. 이제 인원수도 우리가 더 많았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뒤1진 애들 제자리 부활하기전에
[파티] 오늘은일요일: 나머지도 빨리 처리해야됨
[파티] 오늘은일요일: 야옹이님 있으니까 홀나도 걍 움직여
[파티] sky004: 예압
이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원래도 우리가 유리했는데 인원수까지 넘어서니 어나더 길드 측은 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함께 레이드와 길드 전쟁을 겪어 왔기에 이런 전투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지금처럼 굳이 내가 짚어 주지 않아도 길드원들이 알아서 상성이 가장 좋은 적을 찾아서 상대했다.
홀리나이트인 스카이는 같은 탱커인 버서커의 발을 묶었고 인파이터인 아스타로트는 추적자를, 영화별론가는 패스파인더를 상대했다. 마하와 좋은날씨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으윽, 버티던 애들도 비명을 내지르며 한둘씩 쓰러지자 남은 놈들은 냅다 줄행랑을 쳤다. 진짜 의리고 뭐고 없는 놈들이었다.
제자리 부활 쿨타임을 기다렸다가 일어서는 놈들까지 철저하게 죽이자 얼마 안 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어나더 길드원들이 싹 사라졌다.
[길드] sky004: 고생들 하셨습니다
[길드] 야옹이라옹: 일욜님 딱맞게 오셔서 다행쓰ㅠㅅㅠ
[길드] 영화별론가: 고생고생
[길드] rxrx78: 이겼어요?
[길드] 마하: ㅇㅇ
[길드] 여여랑: 오우;;
[길드] 여여랑: 그래서 그 미칭럼들은 대체 왜그런거임?
[길드] 야옹이라옹: 모름 갑자기 저 지1랄임ㅋ
“하아…….”
최대한 빨리 정리하긴 했지만, 피로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뻐근한 눈가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쉰 다음에 채팅을 쳤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아까 단톡방에 올린 동영상 각자 저장해두고
[길드] 오늘은일요일: 저거 말고 다른 증거는 없는거지?
[길드] 마하: ㅇㅇ
[길드] 마하: 걍뭐.. 사실 저게 다긴함
[길드] 좋은날씨: 지들이 선시비 걸어놓고 개털림ㅋㅋㅋㅋㅋ
[길드] rxrx78: 사사게 가요?
[길드] 불좀켜줄래: 말만하세요
[길드] 불좀켜줄래: 저 이미 사사게 게시글 작성 버튼 눌러놨습니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ㄴㄴ
[길드] 오늘은일요일: 저쪽에서 또 개1소리하거나
[길드] 오늘은일요일: 헛소문 퍼지면 그때 쓰삼
어쨌든 우리는 1위 길드였고, 별거 아닌 일에도 딴지 거는 놈들이 수두룩했다. 고작 게임 길드에 뭐 저렇게 과몰입해서 싫어할 수가 있나 싶지만 그런 놈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번 일도 엄연히 따지면 어나더 길드가 먼저 비매너 짓을 한 거였지만 사사게나 자게에는 우리 길드 욕이 올라올 가능성이 컸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이젠 그냥 무시하지만.
[길드] sky004: 근데 어나더도 ㄹㅇ망하긴 했나보다
[길드] sky004: 저런 병1신들을 처뽑네
[길드] 좋은날씨: 단순히 병1신 뽑은게 아니라
[길드] 좋은날씨: 우리길드한테 감정있는 병1신들을 뽑은거같던데요ㅋㅋ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음...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일욜님 말처럼 이번에 복귀했다는 흔적이
[길드] 저6천원있어요: 찐이 아닌거같긴함
[길드] 저6천원있어요: 찐흔적이면 저런ㅅㅐ끼들 나대는거 본인이 더 싫어하지 않았나?
[길드] 여여랑: ㅇㅇ
[길드] 여여랑: 흔적이 오히려 더 난리치면서 싸웠지
[길드] 여여랑: 우리한테 이런 피해가 온적은 없엇잔음
[길드] 마하: 그럼 그 뉴비가 흔적인건 맞아?
[길드] 마하: 다시 물어봤음?
[길드] 오늘은일요일: ㄴㄴ
[길드] 오늘은일요일: 친추했는데 안받음 아예 겜에 안들어오는듯
[길드] 마하: 그럼 그 뉴비도 아닌가본데
아니, 그 일휘일비가 흔적이 맞아. 난 심지어 흔적을 플레이한 진짜 사람도 만났어…….
근데 이런 사실을 길드에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봤자 길드원들이 믿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씁쓸하네.’
우리와 함께 싸워 왔던 어나더 길드가 저런 식으로 망가졌다는 게 참 씁쓸했다. 그야 게임이고, 평생 가는 건 없다지만… 이런 끝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같이 가죠.
사흘 전, 카페에서 마주한 서정연이 내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함께 가서 살펴봐요. 과연 어나더 길드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
왜 하필 지금 저 제안이 떠오르는 건지. 나도 모르게 집어 든 핸드폰을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내려두었다.
***
어나더 길드와의 충돌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간 어나더 길드는 우리 길드원을 볼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면서 공격을 해 왔다.
한두 번이야 내가 끼어들어서 정리하지, 일주일 내내 하루에 몇 번이고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저런 일이 벌어지니 나조차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길드원들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길드] 야옹이라옹: 아 ㅈ같네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야옹이라옹: 저 ㅁ1친새ㄲ1들이 ** 왜저러는거임?ㅋㅋㅋㅋㅋ
[길드] rxrx78: 스트레스 쌉오짐
[길드] rxrx78: 저 아까 레이드 공팟 거절당한거 암?
[길드] rxrx78: 어나더 길원이 먼저 들어가있어서ㅋㅋㅋㅋㅋ 시이벌
[길드] 영화별론가: 어디 돌아댕길수가 없음 가는곳마다 어나더 잇어서
[길드] 좋은날씨: 어나더 길원 개많던데
[길드] 좋은날씨: 그래서 계속 마주침..
[길드] 마하: 없는곳이 없음
길드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도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다. 어나더 길드원들의 비매너 행위를 신고하고 대응하는 것도 마땅한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했다.
일단 신고해도 게임에서 금방 처리해 주지 않는 데다가 홈페이지에 문의 글을 넣어도 메트로 답변이 날아왔다.
‘이 좆망겜, 씨발.’
어나더의 비매너 행위에 일주일을 시달리던 나는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핸드폰을 들었다.
밤 9시가 훌쩍 넘어간 시간이라는 건 전화를 걸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다. 몰라, 본인이 아무 때나 편하게 전화하라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네, 도해준 씨.]
달칵.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내 이름을 불렀다. 웃음기가 감돈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설마 서정연은 이런 상황까지 모두 다 예상한 걸까? 기분이 굉장히 찝찝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어나더가 변해야 했고, 그러려면 내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나는 망설임을 접어 두고 입을 열었다.
“저번 주에 네가 한 제안,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