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퓨쳐의 어리석음에 혀를 찬 나는 조용히 각오를 다졌다.
“라임나무가 어나더에서 쫓겨나면 바로 데려가야지.”
“라임나무한테 욕심 엄청나게 내네요.”
“어쩔 수 없어. 실력 좋은 탱커는 모아도 모아도 부족하니까.”
서포터 직업만큼이나 중요한 직업이 바로 탱커였다. 서포터와 탱커 둘 다 대표적인 귀족 직업이기도 했다.
길드원끼리 파티를 짜서 레이드를 갈 때도 좋고, 어제처럼 다른 길드와 전쟁을 할 때도 좋았다. 그냥 실력 좋은 탱커가 있으면 뭘 하든 마음이 든든했다.
“흠…….”
맥주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응시하던 서정연이 물었다.
“근데 도해준 씨.”
“어.”
“왜 저한테는 길드 오라는 말 안 해요?”
“……뭐?”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질문에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이 자식이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탱커 직업이 쓸모가 많은 건 저도 인정하지만, 컨트롤 되는 근딜도 제법 좋은 직업이잖아요. 근데 제 본캐는 왜 탐내지를 않아요?”
“그거야 당연히 넌…….”
어나더 길마잖아, 라고 대답하려던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서정연은 더 이상 어나더 길드 소속이 아니었다. 한번 탈퇴했다가 계정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길드는 강제로 탈퇴 처리가 됐으니까. 서정연과 함께 카페에 가서 노트북으로 본캐를 확인했을 때, 닉네임 위에 아무 길드도 없는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
‘미친. 어떻게 이제껏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지?’
나랑 비등비등한 실력의 근딜인 서정연이 길드에 들어온다면 그 누구도 우리 길드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서정연은 서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그로 만렙이 아닌가.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 냉정하게 따져 봐도 서정연은 길드로 데려가기 최고로 좋은 유저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서정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올 거야? 내 길드로?”
“…….”
묘한 표정으로 신난 내 표정과 잡힌 손을 번갈아 보던 서정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가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오면 내가 진짜 잘해 줄 자신 있어.”
“어떻게 잘해 줄 건데요?”
어떻게 잘해 줄 거냐고? 은근히 묻는 말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뭐, 퀘 깨는 거 도와주거나 레이드에 네 자리 꼭 빼 둔다거나?”
“그게 다예요?”
“원하는 게 뭔데.”
“됐어요. 도해준 씨는 내 마음도 몰라 주고.”
서정연이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려 버리며 나한테 다 들리도록 투덜거렸다. 이 자식이 또 지랄이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서정연의 본캐를 플레이할 수 없으니 나중에 해결할 문제지만, 만약 녀석이 그때 가서 나한테 아무 말 없이 다른 길드에 들어가면 엄청 서운할 것 같았다.
“혹시 다른 길드로 갈 거면 나한테 꼭 말하고 가.”
“왜요?”
“너 어느 길드가 멀쩡한지 하나도 모르잖아. 적어도 가려는 길드가 제대로 된 곳인지 나한테 확인 정도는 받고 가라고. 아무 데나 들어가면 노퓨쳐 같은 놈들이 가득할 텐데, 네가 버틸 수 있어?”
“그래요?”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철새로 소문나지 말고 나한테 꼭 말해. 알겠지?”
“네에.”
하여간 대답은 잘만 하지. 잡고 있던 서정연의 손을 놔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서정연의 길드가 아니었다. 서정연이 찍은 영상을 다 봤으니 이번에는 여여랑이 보내 준 영상을 볼 차례였다.
전체적으로 비슷했지만, 후반부에 나와 전투하고 노퓨쳐가 있는 장소까지 도망치느라 화면이 급박하게 돌아간 서정연의 영상과 달리 여여랑의 영상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린 게 다여서 상황을 살피기가 더 편했다.
“잠깐, 이것 봐. 얘네 따로 채팅창까지 만든 것 같은데?”
아크로드는 채팅창을 다양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보통은 전체 채팅과 길드 채팅, 파티 채팅, 귓속말 채팅 정도로 나뉘어 있지만 개인에 따라 특정 유저들만을 넣어서 채팅창을 구성할 수가 있었다.
여여랑이 보내 준 영상에서는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채팅창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멤버는… 내 예상대로 사칭범을 지킨 그 11명의 유저와 동일했다. 내 말에 영상을 살핀 서정연이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정말 그러네요. 디코에서는 그런 티가 전혀 안 났는데. 우리가 짐작한 것보다 노퓨쳐는 저 계획에 진심이었나 봐요.”
“허…….”
저 11명에는 여여랑만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정연도 저 채팅창은 오늘 처음 발견한 거였다. 그럼 11명끼리만 몰래 채팅창을 새로 만들었다는 건데.
‘저렇게까지 해야 할 계획인가, 저게?’
우리한테는 하염없이 허접해 보이는 계획이 노퓨쳐와 사칭범에게는 참 중요했던 모양이다. 저런 수고를 들여서까지 하다니.
‘하긴, 나도 서정연을 따라서 어나더에 잠입하지 않았으면 어제 길전을 그렇게 쉽게 이기진 못했을 거야.’
솔직히 그건 인정한다. 길드 전쟁은 수십 명의 유저가 부딪히는 만큼 변수가 가득했다. 당연히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고 그에 따른 대비도 여러 개 해 놔야 하니, 정보가 많을수록 유리했다.
“이러면 네가 아까 말한 얘기도 가능성이 커지겠네. 노퓨쳐가 라임나무를 의심한다는 얘기 말이야.”
“라임나무면 다행이고. 우리 중에 한 명일 수도 있어요. 여여랑이라고 했던가요? 저분은 제외해도 되겠지만.”
“그건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영상이 끝난 뒤에 태블릿PC를 서정연 쪽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이번 길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이제 노퓨쳐랑 사칭범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 해. 자기네들 계획이 망한 데다가 길전도 졌으니까 분명 새로운 방법을 가져올 거야.”
고작 이런 일로 밀려 날 거였으면 사칭범을 데려오는 수고를 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노퓨쳐의 행동 패턴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된 나는 이어 말했다.
“그래도 우리 상황이 나쁘진 않아. 아까 네가 오기 전에 잠깐 아크 커뮤 글을 살펴봤는데, 우리 계획이 제대로 통했더라. 특히 현재 어나더 길마가 사칭범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어제부로 많이 늘어났어.”
“그건 좋네요. 노퓨쳐가 좀 초조해졌겠는데요?”
턱을 괴고서 빙긋 웃은 서정연이 태블릿PC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상은 각자 돌아가서 한 번씩 더 제대로 살펴봐요. 여기서 못 본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뭐야. 가려고?”
“슬슬 가야죠. 정이 산책도 했고, 영상도 봤으니까.”
“아…….”
미련없는 서정연의 모습에 아쉬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녀석이 생각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직 맥주도 다 안 마셨는데…….’
혹시 바쁜가? 저번에도 일이 밀렸다고 했으니까 바쁜 와중에 내가 불러서 겨우 나온 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대화하다가 가면 안 되겠냐는, 철없는 마음에서 나온 말을 겨우 목 너머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테이블 정리하자.”
남은 맥주는 어떡하지? 가게도 아니고 편의점이라서 그냥 들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서정연의 맥주캔과 내 몫의 맥주캔을 들고 나도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묘한 눈을 하고서 나를 응시하던 서정연이 손을 뻗어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맥주캔을 치우지 말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녀석과 시선을 맞췄다.
“왜?”
“아뇨, 그…….”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서정연이 돌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은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소리 낮춰 중얼거린 그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간다며? 왜 다시 앉아?”
“도해준 씨, 혹시 저 갖고 놀아요?”
“뭐?”
얘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네. 기가 막혀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갑자기 웬 개소리야. 내가 널 어떻게 갖고 놀아?”
“도해준 씨가 그런 성격이 아닌 거 아는데, 저번부터 계속 당하니까 어쩔 수 없이 억울한 마음이 드네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서정연의 얼굴에 어딘가 짜증이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말하는 게 농담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한 건 오히려 나였다. 집에 놀러 오라는 제안에 흔들리는 사람도 나고, 대화를 끝낼 때 아쉬움을 느끼는 쪽도 나였다. 서정연은 참 쉽게 하는 행동들에 나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지 않나.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반박하는 대신 서정연을 노려봤다.
“그래서요? 저 갖고 노는 거 맞아요?”
“맞겠냐? 바쁘면 빨리 가라.”
“안 바빠요. 전 도해준 씨 걱정해서 일어나려고 한 거였어요.”
서정연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내 몸을 훑어 내렸다.
테이블에 가려져서 상체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 시선이 유독 집요하고 진득해서 미약한 소름이 끼쳤다.
“도해준 씨, 여태까지 카페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온 거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피곤할 줄 알았어요. 저 신경 쓰느라 아닌 척하는 거면 미안하니까. 내일도 출근일 텐데.”
“내가 너처럼 허약한 줄 알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애초에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나였다. 목적이야 같이 영상을 보는 거지만, 사실 각자 집에서 디코를 하며 봐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일 끝내고 지친 몸으로 여기까지 나온 건…….
“그럼 저랑 데이트 더 해요. 저도 이대로 집에 가기엔 아쉬웠거든요.”
이어지는 서정연의 말에 생각이 뚝 끊겼다.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어.”
“억지라뇨. 도해준 씨야말로 지금 집에 안 간 걸 후회할걸요.”
내 손에서 맥주캔을 도로 가져간 서정연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은 채로 맥주캔끼리 탁, 부딪쳤다. 마치 술잔을 부딪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펴며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