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해준 씨 말대로 쿠키는 제가 오해한 게 맞아요. 갑자기 서비스라고 해서 좀 놀랐거든요. 단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해서. 근데 이렇게 대화하면서 오해 풀었잖아요. 그러니까 제 오해도 풀었으면 하는 거죠.”
“무슨 오해를 풀고 싶으신 건데요.”
“음, 글쎄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남자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일단 저 게이 아니에요. 이 생각부터 하셨을 것 같아서.”
“…….”
마치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에 가슴 속이 뜨끔 찔렸다. 차마 그런 적 없다고 변명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상대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핸드폰 번호는… 제가 실수한 거 대신 치워 줘서 고마운 마음도 있고,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런 거예요.”
“전 친해질 마음 없습니다.”
“저도 그쪽 번호를 받아 간다고 해서 당장 다음날부터 십년지기 친구처럼 치근덕거릴 생각은 없어요.”
“그쪽이 무슨 생각이건 상관없습니다. 제가 번호 주기 싫은 거니까. 죄송하지만 핸드폰 얘기는 이쯤 하죠.”
더 들어도 아까 카페에서 나눈 대화의 반복이었다. 절로 질리는 기분이라 고개를 저으며 재차 거절했다. 그러자 드디어 말이 통했는지 남자가 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정말 괜찮아요?”
“뭔가요.”
“결국에는 제 번호를 받게 될 텐데요.”
팔짱을 끼며 미소 짓는 남자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황당하다 못해 웃길 지경이었다.
“예,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이런 또라이 같은 새끼가 다 있어. 얼굴만 멀쩡한 미친놈이잖아.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남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역시 인생은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제는 일휘일비가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서 기분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기분 상태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땅을 뚫고 지하까지 처박혔으니까.
‘앞으로 알바하면서 저 새끼 얼굴을 어떻게 보냐.’
쪽팔린 줄 알고 카페를 알아서 옮겨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 저 정도 미친놈이면 본인이 뭐가 문제인지 끝까지 모를 가능성이 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
[서버] 일휘일비: 오일님 2만골
[서버] 오늘은일요일: 세이츠 수리점 앞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이젠 다 쓰지도 않네...
[길드] 아스타로트: 진짜 지치지도 않나봐
[길드] 여여랑: 근데 길마님 대답도 뭔가
[길드] 여여랑: 예전보다 자세해진거같은데
[길드] 류페: 그만큼 둘이 친해졌다는거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위치를 물어보는 일휘일비에게 똑같이 확성기로 대답해 주며 인벤토리를 점검했다.
펫 인벤토리를 꽉 채운 완전 회복 포션과 절망의 탑 통행증을 확인하자 뿌듯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좋아. 아주 완벽해.
인벤토리를 끄고 잠시 기다리자 저 멀리에서 일휘일비가 말을 타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게 마치 간식 들고 오는 주인님을 맞이하는 개새끼 같았다.
‘흔적이 저런 허접한 뉴비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허구한 날 주변 유저한테 시비 걸고 툭하면 싸움질하고 다닌 탓에 사사게에 고발 글이 밥 먹듯 올라오던 그 흔적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쩐지 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게 사람이 착하게 살았어야지. 나처럼 말이야. 저것도 다 업보다, 업보.
[전체] 일휘일비: 오일님 ㅎㅇㅎㅇ
[전체] 오늘은일요일: 그놈의 오일 소리좀 안하면 안되냐
[전체] 일휘일비: 애칭같구 좋자나요><
애칭은 개뿔, 세상에 있는 애칭 다 얼어 뒤졌나. 저딴 게 애칭이 되게.
혀를 쯧쯧 차며 파티 창을 열었다. 하지만 일휘일비는 내 머리 위에 띄워진 파티 창을 바라만 볼 뿐, 도통 들어오지 않았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뭐해?
[전체] 오늘은일요일: ㄱㄱ
한 번 더 재촉하자 그제야 파티에 일휘일비가 가입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얘는 왜 시작부터 정신을 이렇게 놓고 있는 거야?
[파티] 오늘은일요일: ㅡㅡ?
[파티] 일휘일비: 아 ㅈㅅ
[파티] 일휘일비: 저랑 파티할줄은 몰라서;
정말로 놀랐는지 일휘일비의 채팅에서 얼떨떨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 참, 그럼 널 여기 왜 불렀겠냐.
굳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기 귀찮아서 일단 저번처럼 일휘일비를 펫에 태우고 세이브 포인트 이동했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절망의 탑이었다.
절망의 탑은 통행증이 있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층마다 몬스터가 나오며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몬스터의 숫자와 위력이 강해지는 던전이었다.
물론 만렙을 찍은 지 한참인 데다 종결 아이템으로 무장한 나는 꼭대기 층인 100층까지 별 무리 없이 클리어할 수 있었다. 딱히 좋은 아이템이 뜨는 장소는 아니라 나한테는 그리 큰 메리트가 없었지만, 아직 올릴 레벨이 한참 남은 일휘일비에게는 최고의 장소였다.
다만 문제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파티원이 살려 줄 수도 없어서 죽으면 꼼짝없이 탑 밖으로 쫓겨난다. 그러니 미리 준비해서 펫 인벤토리에 넣어 둔 완전 회복 포션을 모조리 꺼내서 일휘일비에게 거래로 넘겨줬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절탑갈거니까
[파티] 오늘은일요일: 거기서 뒤지기만해
[파티] 오늘은일요일: 내가 나와서 한번 더 죽일거야
[파티] 일휘일비: ㄷㄷㄷ
[파티] 오늘은일요일: ㅇㅋ?
[파티] 일휘일비: ㅠㅠㅇㅋ
대답은 참 찰떡같이 잘도 하네. 마지막으로 무기를 장착한 나는 곧장 탑 입장하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아주 잠깐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탑 입구가 아닌 탑 내부가 나타나며 곧장 첫 번째 층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징그러울 정도로 우글우글 몰려든 벌레떼가 내 스킬 한 번에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탑의 절반인 50층까지는 계속 이럴 거다. 약한 몬스터가 물량으로 승부 보는 구간이었으니까.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내가 스킬로 단번에 죽이는 상황이 반복됐다. 층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약 20분 만에 30층에 도달하는 동안 일휘일비의 몸이 서너 번 정도 하얗게 번쩍거렸다. 레벨 업을 했다는 증거였다.
【어리석은 인간이 여기까지 오다니, 죽여 버리겠다!】
30층부터는 몬스터와 함께 보스 몬스터가 등장한다. 거대한 박쥐처럼 생긴 몬스터가 대사를 뱉으며 양팔을 들어 올리자 바닥 곳곳에 새빨간 문양이 생겨났다. 패턴 공격이었다.
그리 빠른 공격은 아니라서 피하기는 쉬웠다. 두세 대 정도 때리면 죽을 놈이라 문양이 없는 틈으로 걸어가 봉을 휘두른 그때였다.
퍼억! 어디선가 공격에 처맞는 타격음과 동시에 내 뒤에 있던 일휘일비가 붕 떠올랐다. 왼쪽에 표시된 파티원 일휘일비의 체력 게이지가 순식간에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뭐야, 미친.”
놀라서 다급하게 평타와 스킬을 섞어서 보스 몬스터와 잡몹을 해치웠다.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녹아내리는 보스 몬스터를 제치고 포션을 마시고 있는 일휘일비에게 달려갔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아니**
[파티] 오늘은일요일: 실화야?
[파티] 오늘은일요일: 한대맞고 반피가 됐다고???
[파티] 일휘일비: 그러게요
[파티] 일휘일비: 저도 한번 확인해보려고 맞은건데
[파티] 일휘일비: 30층에서 이정도 딜이면 이제부턴 아예 한대도 맞으면 안대겟어요ㅎㅎ;
일휘일비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어이없어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당장 장비 공개 풀어
일휘일비가 자기도 잘못한 걸 아는지 순순히 장비를 공개했다. 녀석이 끼고 있는 로브와 상의, 신발, 무기, 장갑 등 장비들을 샅샅이 훑어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효과가 하나도 없는 장비만 골라서 착용할 수 있는 거지?’
혹시 일부러 그런 건가? 상점에서 헐값 주고 파는 장비들에도 기본적인 버프나 효과가 달려 있을 텐데?
[파티] 일휘일비: 걍 드랍하는거
[파티] 일휘일비: 대충 주워입어입고 나중에 바꿀라고햇는데
[파티] 일휘일비: 까먹음요ㅠ
굳이 따지지 않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일휘일비가 먼저 변명을 해 왔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아니;;;시1발
[파티] 오늘은일요일: 아무리그래도그렇지
일휘일비가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는 이해한다. 어차피 초반부에는 레벨업이 빠르고 레벨마다 맞는 장비도 계속 달라져서 돈 들여 장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선 넘은 거지. 여기까지 오면서 레벨업을 더 했으니까 지금 못해도 65레벨은 됐을 텐데, 65레벨이 30층에서 보스 몬스터한테 한 대 맞았다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다니. 이건 걸치고 있는 게 천 쪼가리 수준이라는 거다.
“하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하고서 다른 펫을 소환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에 가득 찬 버프 포션이 각양각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중에서 공격 속도와 공격력, 이속 포션을 챙겨 담았다. 그리고 세 개 다 단번에 마셨다. 효과가 무려 30분 지속에 버프 증가 퍼센티지도 제일 높은, 값비싼 버프 포션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나대지말고
[파티] 오늘은일요일: 구석에 처박혀 있어라....
무조건 일휘일비를 죽이지 않고 100층까지 도달하리라. 굳은 각오를 마친 나는 다음 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