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드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클리어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5시간이면 떡을 치고도 남을 레이드를 6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질질 끌었다.
세이브 지점마다 딴짓하고 일부러 몇 번 죽기까지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도와주러 온 길드원들도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으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파티] rxrx78: 이제 그만 하자....
[파티] 아스타로트: 이래서 또ㄹㅇ들 싸움에 끼는거 아니랫는데
[파티] 마하: 진짜 ㅈ1랄도 가지가지
[파티] 오늘은일요일: 아니;; 오래 해도 상관업다며;;
[파티] sky004: 이정도일줄은 몰랏져
[파티] 야옹이라옹: 일욜님...
[파티] 야옹이라옹: 조큼 변태가탕! ㅜㅅㅜ
[파티] 오늘은일요일: ㅡㅡ
나약한 자식들. 고작 6시간 30분 동안 레이드 좀 한 거로 징징거리다니.
뭐, 피곤할 시간이긴 했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이쯤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에 무기를 바꿔 꼈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ㅇㅋ
[파티] 오늘은일요일: 이제 슬슬 나갑시다
어차피 마지막 보스만 남은 상황이었다. 패턴은 진작에 다 파악해 놨고. 이제 시간을 끌 필요 없으니 죽이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파티] 불좀켜줄래: 드디어ㅠㅠ
[파티] 여여랑: 헉 저 근데 여기 보스 추가패턴 아직 모르뮤ㅠㅠ
[파티] rxrx78: ㄱㅊㄱㅊ
[파티] rxrx78: 길마님이 알아서 해주시겟죠
[파티] 오늘은일요일: 이럴때만 길마라 부르네
픽 웃으며 강화 스킬을 사용하자 길드원들도 알아서 눈치 빠르게 위치를 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이 레이드를 해 온 지 1년이 훌쩍 넘은 사이였다. 아무리 진지함 쏙 빼고 장난삼아 들어온 거라 해도 각자 할 일을 알고 척척 해낼 수밖에 없었다.
[파티] sky004: ㄱㄱ?
[파티] 오늘은일요일: ㄱ
홀리나이트인 스카이가 내 채팅을 보고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바닥 위로 올라갔다. 쿠구궁, 화면이 강하게 흔들리며 위에서부터 새까만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버러지들 주제에 감히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박쥐 날개를 단 캐릭터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등장했다. 이번 레이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모두 제물로 먹어 치워 주겠다!】
문양을 밟고 있는 스카이를 제일 먼저 인식한 몬스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맵 곳곳에 새까만 벼락이 내리쳤다.
본격적으로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 시작을 알리는 음성을 들으며 나 또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파티] 불좀켜줄래: 젤 대충한 일욜님이 딜량 1위네
[파티] 불좀켜줄래: 이거 실화?ㅋㅋㅋㅋㅋㅋ
[파티] 오늘은일요일: 그러게
[파티] 오늘은일요일: 실화냐?
[파티] 오늘은일요일: 너네 진짜 개못한다
[파티] 불좀켜줄래: ?
[파티] rxrx78: ?
[파티] 야옹이라옹: ㅇㅅㅇㅋㅋㅋㅋ
레이드가 끝나고 보상을 나눠 가질 때쯤이 되자 시간은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좋아. 이 정도 시간이면 아무리 일휘일비라 해도 절대 못 기다리겠는데?’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게임에서 유저 만나려고 이 시간까지 기다리겠는가. 다시 한번 내 기가 막힌 계획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던전 밖으로 나온 그때였다.
[전체] 일휘일비: 오일님!!
“이런 시발…….”
던전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위치에서 나를 부르며 팔짝팔짝 뛰는 일휘일비의 캐릭터를 마주하자마자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파티] sky004: 와....이건좀....
[파티] 아스타로트: ㄷㄷㄷㄷㄷㄷ
[파티] 여여랑: 미쳤다;
[파티] 마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야옹이라옹: 일휘일비쨩 지금까지 계속 기다린거?
[전체] 일휘일비: 당연하죠~^^
[전체] 야옹이라옹: ㄷ
언제나 컨셉을 잃지 않는 극한의 컨셉충 야옹이도 일휘일비의 또라이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미친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6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나를 기다린 일휘일비의 만행에 길드원들도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수군거렸다.
[파티] 여여랑: 딴겜하다 온거 아님?
[파티] 마하: ㅇㅇ그렇겟지
[파티] 저6천원있어요: 그거도 그거 나름 무서운데요ㅋㅋㅋㅋ
[파티] 울팀인성봐조인성: 뭔가.. 슬슬 흔적이랑 비교하는게 좀 미안해지는데
[파티] rxrx78: ㄹㅇ쟤가 더 심각함
그러거나 말거나 일휘일비는 내게 날듯이 뛰어와 다짜고짜 거래를 요청해 왔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가 싶어서 우선 거래 요청을 받았다.
“뭐야.”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이템 하나가 거래 창에 올라왔다.
거래 창에 사랑을 담은 종이학 (제작자: 일휘일비) 아이템이 올라왔습니다.
[전체] 일휘일비: 선물이에요 오일님ㅎㅎ
[전체] 일휘일비: 어때요?
[전체] 여여랑: 선물??
[전체] 마하: 머줌?
[전체] 일휘일비: 종이학이요
[전체] 일휘일비: 딱 천개 맞췄어요ㅎㅎ
[전체] sky004: ??????
[전체] 마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야옹이라옹: 어우
종이학은 생활 도구 NPC가 판매하는 종이를 사서 직접 제작해야 하는 아이템으로, 하나 만들 때마다 엔터 키를 눌러야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일휘일비는 내가 레이드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종이학을 제작한 것이다. 하나 만들 때마다 엔터키를 꼬박꼬박 눌러 가면서.
‘아, 소름.’
새벽이 넘어가는 늦은 시간 동안 던전 입구에 서서 엔터키만 탁… 탁… 눌렀을 일휘일비를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닭살이 올라온 양팔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가차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전체] 일휘일비: ㅠㅠ
[전체] 일휘일비: 오일님 왜 거절해요?ㅠ
[전체] 오늘은일요일: 받겠냐?
한숨을 내쉬며 연달아 날아오는 거래 요청을 다 쳐 냈다.
하여간 이 새끼랑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본다니까. 길드원의 말처럼 흔적보다 일휘일비가 두 배는 성가셨다.
‘왜 자꾸 이런 놈들이 꼬이는 거지?’
내 겜생은 왜 항상 이따위로 흘러가는 거냐고. 나 혹시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한 데다 기껏 세워 둔 계획까지 다 망해 버리니 두통이 밀려왔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로 차라리 게임을 끄려는데, 거래 요청을 그만둔 일휘일비가 이번에는 채팅을 보내 왔다.
[전체] 일휘일비: 근데 오일님
[전체] 일휘일비: 생각보다 겜을 좀 못하시나봐요?
[전체] 오늘은일요일: ?
[전체] 오늘은일요일: 뭐?
[전체] 여여랑: 헙..
[전체] 야옹이라옹: ㅇㅅㅇ;;
[전체] 일휘일비: 여기 던전 레이드가 빡센건 맞는데
[전체] 일휘일비: 암만 그래도 6시간을 넘을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ㅎㅎ
[전체] 일휘일비: 보통 5시간이니까
[전체] 일휘일비: 솔직히 오일님 파티면 4시간 컷 예상했거든요
[전체] 오늘은일요일: ?ㅋㅋㅋㅋㅋㅋ
[전체] 일휘일비: 서버 1위 길드고 길마도 같이 있는 파티니까 4시간 컷도 충분했을텐데
[전체] 일휘일비: 흠... 뭐...
[전체] 일휘일비: 실력이 제가 생각한만큼은 아닌가보네요?ㅋㅋㅋㅋㅋㅋ
화면에 올라오는 채팅을 보자 키보드에 올려진 손이 절로 바들바들 떨렸다.
“이 새끼가 지금…….”
대놓고 나를 비웃는 내용에 근처에서 우리를 구경하던 길드원들마저 드물게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끼어들지 못했다.
[전체] 일휘일비: 에이 그래도 괜찮아요
[전체] 일휘일비: 좀 실망하긴했지만 오일님을 좋아하는 제 마ㅡ
빠악!
일휘일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무기를 휘둘렀다. 정수리를 봉으로 얻어맞은 일휘일비의 체력이 순식간에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때마침 크리티컬이 터져서 대미지가 두 배로 커진 덕분이었다.
‘이 새끼가 감히 필드 PVP를 켜 두고 내 앞에서 이딴 소리를 지껄여?’
자신을 새벽까지 기다리게 만든 나를 놀리기 위해서 내뱉은 개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빡쳤다. 어떻게 이토록 사람 성질을 잘 돋우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필드 PVP도 끄려면 끌 수 있었을 텐데, 대놓고 켜 둔 걸 보면 이것도 의도한 걸지 모른다. 뭘 노리고 켜 둔 건진 모르겠지만. 나한테 처맞으려고?
퍽, 콰직, 퍼억! 매타작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눈이 돌아간 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을 일휘일비가 쥐새끼처럼 휙휙 피해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체] 일휘일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자식이 채팅에 이어서 손뼉을 치는 감정 표현까지 띄웠다. 그걸 본 내 공격이 더욱 화려해진 건 당연했다.
[길드] 야옹이라옹: 둘이 잘노네 ㅇㅅ;ㅇ
[길드] 마하: 이 새벽에 지치지도 않나
[길드] 불좀켜줄래: 아니근데
[길드] 불좀켜줄래: 저 뉴비 볼수록 흔적 떠오르지않음?
[길드] sky004: ㄹㅇ요
[길드] 마하: 흠
[길드] 마하: 혹시 부캐인가?
[길드] 여여랑: 헐 ㅁㅈ
[길드] 여여랑: 흔적 계삭했잖아요
[길드] 여여랑: 아크하려면 새로 키워야할텐데
[길드] 영화별론가: 하는짓이 너무 비슷하긴함
정신없이 일휘일비를 패던 나는 길드 채팅을 보고 눈가를 좁혔다.
‘……흔적의 부캐?’
확실히…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흔적이 갑작스러운 계정 삭제로 사라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계정을 삭제하고 접었다가 다시 복귀한 거라면? 그래서 계정을 새로 만들어서 온 거라면?
이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짜증 나는 뉴비가 사실은…….
‘흔적이라고?’
머릿속에 떠오른 닉네임에 자연스럽게 하늘색이 떠올랐다. 지난 1년간 지긋지긋하게 마주해 온 흔적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하늘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