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깐만요, 도해준 씨, 잠깐 내 얘기를…….”
“닥쳐! 당신 지금 나 좆같으라고 이딴 개소리하는 거지?”
“진정해 봐요.”
서정연이 제 멱살을 움켜쥔 내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체온이 손등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급하게 알려 줄 생각은 저도 없었어요. 진심이에요.”
“…….”
“근데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요? 도해준 씨, 어제 저 사칭하는 사람 만나고 오지 않았어요?”
사칭. 그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있는 서정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제 내가 슈텔 도시 광장에서 마주친 ‘heunJeok’은 짐작했던 대로 가짜가 맞았다. 어나더 길드의 부길마인 노퓨쳐와 함께 작정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사칭범인 것이다.
나는 서정연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멱살을 놔주었다. 내가 다시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던 서정연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구겨진 셔츠 옷깃을 매만졌다. 깨끗한 베이지색 셔츠가 목 부근만 꾸깃꾸깃한 게 웃겼다. 꼴 좋다.
“알고 있는 거 다 말해. 그다음에 믿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좋아요. 어차피 한 번에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어요.”
테이블 구석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 든 서정연이 화면을 두드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 제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
우습게도, 그 말을 듣자 눈앞에 있는 남자가 흔적이며 곧 일휘일비라는 웃지 못할 현실이 확 느껴졌다.
일휘일비가 내게 알아보고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한 채팅은 파티 채팅이었다. 파티에는 우리 둘만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 대화를 알고 있는 서정연이 일휘일비라는 증거였다.
“이건 부길마인 노퓨쳐라는 유저랑 나눈 대화예요.”
서정연이 핸드폰을 내게 건네줬다. 화면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메시지가 띄워져 있었다.
“도해준 씨는 길드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이던데, 전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상대는 부길마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한 달 전에 계정 문제로 얘기 나눈 게 끝이었어요. 그래서 상황 파악하는 데 좀 어렵더라고요.”
서정연의 말을 들으며 메시지 내용을 살폈다.
요즘도 아크함?
ㄴㅍㅊ
오랜만
하죠
별일없고?
아무리 계삭이라지만 그렇게 접어서 좀 미안하네
ㄴㅍㅊ
ㄴㄴㄱㅊ아요
벌써 한달이나 지낫는데
길드는?
ㄴㅍㅊ
길드도 ㄱㅊ
제가 잘 관리하고 잇어요
신경안써도됨요
그래
ㄴㅍㅊ
왜요?
혹시 다시 하게요?
ㅋㅋㅋ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봤음
ㅅㄱ해
ㄴㅍㅊ
네
노퓨쳐가 보낸 메시지를 읽은 나는 눈가를 좁혔다. 텍스트에 담겨 있는 의미심장한 내용도 문제긴 했지만, 그보다 더 거슬리는 건.
“이거 진짜 멍청한 새끼네.”
“그렇죠?”
서정연이 은근히 떠보는 말에 노퓨쳐가 모조리 걸려들었다는 점이었다.
‘길드는 내가 잘 관리하고 있다’라거나 ‘신경 안 써도 된다.’라는 부분이 참 웃겼다. 거기에 행여나 서정연이 다시 돌아올까 봐 눈치 보는 거까지. 아주 골고루 다 했구만.
“노퓨쳐가 이번에 나타난 제 사칭범과 협력 관계라는 건 확실해요.”
“그럴 만해. 애초에 노퓨쳐가 길마 자리에서 비켜 줘야 저런 짓도 가능할 테니까.”
“어제 여기저기 반응을 좀 살펴보니까 대부분 진짜 흔적이 나타났다고 믿더군요.”
처음으로 잔을 들고 커피를 마신 서정연이 나를 보며 웃었다.
“한 명은 끝까지 안 믿은 것 같지만.”
“당연하지.”
그 한 명은 물론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을 녀석에게 돌려줬다.
“내가 저런 허접한 방법에 넘어가겠냐? 그리고 하나도 안 똑같아서 속아 주려고 해도 속아 줄 수가 없던데.”
“그 정도인가요?”
“어. 어제 만나서 채팅한 거 스샷 찍어 놨는데 볼래?”
“네.”
사칭범의 뒷담을 할 생각에 신나서 내 핸드폰을 뒤지던 나는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왜 신나서 저 자식한테 스샷을 보여 주니 마니 하고 있어?’
그럴 만한 상대도, 상황도 아니었다. 급히 헛기침하며 꺼낸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안 보여 줘요?”
“그건 됐고. 하려던 얘기나 마저 해.”
“하려던 얘기요?”
“네가 흔적이고, 일휘일비라는 걸 나한테 털어놓은 목적이 뭐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서정연이 이어지는 내 질문에 묘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목적이 있어 보여요?”
“개소리하지 마. 너 어나더 길드는 아예 때려치운 거 아니었어? 다시 돌아갈 작정이었으면 일휘일비를 키울 때 진작 돌아갔겠지. 근데 아니잖아.”
차분히 말을 듣던 서정연이 이내 픽 웃었다.
“맞아요. 어나더 길드로 돌아갈 생각이 없던 것도 맞고, 목적이 있는 것도 맞아요.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눈치가 빠르네요.”
아마 서정연은 목적이 없었으면 지금 이 대화도 안 했을 거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흔적과 똑같았다. 항상 헤실거리고 돌아다니지만, 실상은 속을 알기가 어렵고 목적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그런 성향을 가진 놈이 왜 우리 길드랑 1년이 넘도록 전쟁하면서 싸운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목적이 뭐야.”
“도해준 씨는 궁금하지 않아요?”
“뭐?”
“노퓨쳐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하잖아요.”
잔을 내려놓은 서정연이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이 기댔다.
“아무리 노퓨쳐가 저를 대신할 놈을 구하고 싶다고 해도 그게 쉽게 구해지는 건가요? 보통은 타인을 따라 하면서 사칭 범죄를 하진 않잖아요.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을 구하기도 까다로울 텐데.”
“그거야… 네가 좀 유명한 놈이었냐? 그리고 흔적이 되면 어나더 길드를 갖게 되는 거잖아.”
“어나더 길드는 제가 나오면서 망해 가고 있었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따져 본다면… 글쎄요. 도해준 씨가 관리하는 요일 길드 정도라면 모를까, 지금의 어나더 길드는 이미 망한 길드일 뿐이죠.”
그래도 1년이 넘도록 활동해 온 길드일 텐데, 어나더 길드에 대해 설명하는 서정연의 목소리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길드원과 길드에 나름 애정을 가진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전쟁할 때 말고는 흔적이 길드원들과 놀거나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긴 했다.
“네가 구하기 어렵다고 말해 봐야 이미 구해서 사칭범이 활개 치고 다니는데 이제 와서 뭐 어떡하려고?”
“그래서 직접 들어가서 보려고요.”
“직접 들어간다고? 어딜?”
“어디긴요.”
서정연이 환하게 웃었다. 봄날의 햇살이 떠오르는 화사하고 예쁜 웃음이었다. 그런 웃음을 얼굴 만면에 띤 채로 녀석은 어마어마한 소리를 지껄였다.
“어나더 길드죠.”
“뭐라고?”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서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볼 거예요. 궁금증도 해결하고, 사칭하고 있다는 증거도 모으고, 완전 일석이조 아닌가요?”
“아니, 잠깐만.”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통이 밀려오는 이마를 짚으며 서정연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널 사칭하는 놈이 있는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직접?”
“네. 안 될 거 있나요.”
“안 될 거… 없긴 하지. 없긴 한데.”
“어젯밤부터 오늘 카페에 오기 전까지 다른 방법이 있나 찾아봤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요. 굳이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고.”
“길드에 어떻게 들어가게?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도 없잖아.”
“노퓨쳐가 서버 채팅으로 떠들었잖아요. 오늘부터 길드원 모집한다고. 부캐 만들어서 들어가야죠.”
날씨 얘기하듯이 미친 소리를 하는 서정연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와, 이놈이 진짜 흔적 맞나 보다…….’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사칭 당했다고 직접 길드에 쳐들어가서 알아볼 계획을 세우냐고.
“그래. 온라인 사칭도 범죄니까 일단 응원한다. 그래서 이 얘기를 나한테 왜 하냐?”
“눈치 빠르면서 자꾸 모른 척 물어보네…….”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린 서정연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같이 가죠.”
“…설마 나보고 부캐로 같이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자는, 그런 좆같은 제안하려는 거 아니지?”
“그런 좆같은 제안이 맞아요. 같이 가요.”
미친놈.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싸늘하게 노려보자 서정연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어차피 도해준 씨도 찝찝하잖아요.”
“미안하지만 별로 안 찝찝해.”
“정말요? 그 사칭이 나타난 걸 제일 걱정해야 하는 건 요일 길드일 텐데요?”
“…….”
“그 사칭범이 얼마나 저를 따라 할진 모르지만, 남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최소한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은 할 텐데. 그럼 제가 했듯이 요일 길드에도 시비를 걸지 않겠어요? 길드 전쟁 선포도 할 거고.”
안타깝게도 이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난 새벽에 계속 해 온 고민과 완벽히 일치했으니까.
사칭이든 뭐든 어쨌든 ‘heunjeok’이라는 타이틀을 단 유저가 돌아온 이상 어나더 길드는 예전처럼 우리 길드와 전쟁하려고 할 거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놔야 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리자 서정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까 함께 가서 살펴봐요. 과연 어나더 길드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