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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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으려니, 헤드셋에서 날 찾는 서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해준 씨.]
“…….”
[도해준 씨? 어디 갔어요?]
“안 갔어.”
[왜 대답 바로 안 해요. 뭐 하고 있어요?]
“너 같으면 하겠냐…?”
그 와중에 나 딴짓하나, 안 하나 단속하는 서정연이 어이없다 못해 웃길 지경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너 나한테 무슨 원한 있지?”
[원한이요?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개새끼야…….”
이젠 화낼 기운도 없었다. 이마를 짚고서 중얼거리듯 따지자 서정연이 잠시 침묵했다.
[화났어요?]
“내가 화낼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거 아니었냐? 아까 화내지 말라고 말해 놓고서 뭘 모른 척이야.”
[그건 그렇긴 한데… 일단 진정해 봐요.]
우습게도 진정하라는 말을 듣자 도화선에 불이 붙듯, 잠잠했던 감정이 확 치밀어 올랐다.
“진정? 진정하라는 소리가 나와?”
[화 많이 났네요.]
“때려치워! 이럴 거면 다 때려치우라고!”
[안 돼요. 실망시킨 건 미안한데, 노퓨쳐를 도발하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노퓨쳐한테 도발을 왜 하냐고? 사이가 좋아져도 모자랄 판에!”
[그래야 우리를 어떻게든 어나더 길드에 넣으려고 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안 해도 들어갈 수 있었어. 애초에 나한테 친추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우리를 길드에 넣으려는 이유였잖아.”
[들어가고 끝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이야 티거 길드 덕분에 노퓨쳐 눈에 띄었지만, 저거 하나만 믿고 버티기는 힘들어요.]
책망이 짙게 묻어난 내 말도 서정연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 차분한 음성에 폭풍이 일어난 것처럼 파도치던 내 감정도 조금은 진정됐다.
“…티거 길드가 언제까지 우리한테 덤벼들지 불확실하니까 보험이 더 필요하다는 건 나도 동의해. 하지만 일단 들어가고 나서 생각해도 될 문제잖아. 너무 과한 도발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거 모르냐?”
[이 정도면 적절한 도발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부캐가 아니라는 티를 좀 낼 필요도 있었고요.]
“뭐? 그럼 내 길드 언급한 이유가…….”
[요일 길드 언급한 게 제일 중요했어요. 길드 랭킹 1위니까 뉴비 행세를 하는 우리들이 알 만한 길드고, 노퓨쳐의 눈에는 우리가 뭘 모르는 놈들처럼 보일 테니까.]
이어지는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되냐? 그럼 이렇게 도발해 두면 뭐가 달라지는데?”
[많이 달라지죠. 노퓨쳐가 요일 길드라면 거품 물고 반응하니까. 이제 노퓨쳐는 우리가 얼마나 쓸모 있든 상관없이 자기 길드에 박아 두려고 눈 뒤집혔을 거예요.]
“무슨… 아니, 잠깐만. 노퓨쳐가 내 길드를 그렇게 싫어한다고?”
[싫어해요. 요일 길드가 아니었으면 어나더 길드가 1위 자리를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멍청하죠. 요일 길드랑 전쟁을 한 덕분에 어나더도 그나마 클 수 있었던 건데.]
“너라면 모를까, 노퓨쳐하고는 엮인 일이 없는데… 아직 다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다른 길드원들도 노퓨쳐는 전쟁할 때 빼고는 만난 적 없다고 했고. 그런데도 저렇게 우리를 싫어하는 게 가능해?”
[저도 그게 신기하더라고요. 제가 계삭하고 난 뒤에도 계속 그러나 내심 궁금했는데 이번에 사칭 데려오는 거 보고 여전하다는 걸 알았죠. 아무튼 제가 노린 건 이거예요. 노퓨쳐에게 ‘계륵’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남 주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도 애매한 그런 존재 말하는 거야?”
[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잖아요. 도해준 씨는 실제로 요일 길드 길마니까, 만약 길드원을 모집하고 있는 기간이라고 가정해 봐요. 노퓨쳐처럼 우리가 탐나지 않겠어요?]
“그거야…….”
탐난다. 탐날 수밖에 없다.
만렙 유저를 몇 번이고 이긴 뉴비 파티. 개개인의 컨트롤 실력도 좋고, 포지션 잡는 방식도 터득한 뉴비들이다. 심지어 티거 길드와의 교전으로 화제성까지 갖춘 상태고.
부캐일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쯤이면 별 의미 없다. 부캐라서 접는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안 접고 계속 길드에서 활약해 주면 이득인 거고. 한마디로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다.
[노퓨쳐도 그 걱정을 할 거예요. 얘네들이 진짜 요일 길드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요. 들어갈 가능성도 크니까 더 불안하겠죠. 가뜩이나 요일 길드한테 밀리는데, 이런 인재들까지 뺏긴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거고.]
“뺏길 바에는 어떻게든 데리고 오자… 이런 마음이 들도록 일부러 건드렸다는 거지?”
[맞아요. 전 노퓨쳐가 우리를 더 탐내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티거 길드 문제가 시들해져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허…….”
거기까지 들은 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서정연, 이 자식은 미친놈이 맞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상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걸까. 그간 서정연이 날 괴롭힌 건 장난 수준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퓨쳐가 불쌍해졌어.”
[하하.]
지친 기색으로 한탄하자 서정연이 소리 내서 웃었다. 웃을 수 있는 저 여유가 부럽다.
‘나였어도 짜증 나고 신경 쓰여서 어떻게든 데려오고 싶을 거야.’
대놓고 채팅으로 ‘라이벌 길드가 더 나아 보이니까 거기 가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속이 뒤집힐 만했다. 나도 이 정도로 울컥하는데, 우리 길드를 싫어하는 노퓨쳐는 저 채팅을 보고 얼마나 빡쳤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내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잠자코 기다리던 서정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뒤늦게 설명해서 미안해요. 노퓨쳐가 갑자기 여기로 오겠다고 해서 저도 좀 놀랐거든요. 이번에는 대충 넘어가고 설명부터 해 줄 걸 그랬네요.]
“…됐어. 나도 화냈었으니까.”
[아직 화 덜 풀린 거 같은데요?]
“닥쳐! 넌 그 재수 없는 말투가 문제야.”
겨우 진정시킨 감정이 저 깐족거림 한 번에 다시 확 타올랐다.
“너 때문에 요 며칠 진짜… 내가 스트레스를 하도 받아서… 아, 위 쓰려.”
[저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윗배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정연, 저 새끼가 만악의 근원이었다. 쓰린 배를 움켜잡고 있으려니 문득 노퓨쳐가 안쓰러워졌다.
[그럼 우리 30분 정도만 쉴까요? 그동안 진정하고 있어 봐요. 파티원들한테는 제가 설명해 둘 테니까.]
“아, 맞아.”
그 말을 듣자 잊고 있던 좋은날씨와 여여랑이 떠올랐다. 황급히 게임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채팅창에 둘이 나눈 파티 채팅 기록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파티] 빚과송금: 노퓨쳐 마상입고 간거같은데ㅜㅜ
[파티] 쥐안에든독: 어나더 전 길마, 어나더 길드가 요일 길드보다 한참 딸린다 발언...“충격”
[파티] 빚과송금: 우리 이제 어케요?
[파티] 빚과송금: ??
[파티] 빚과송금: 일욜님?
[파티] 쥐안에든독: 어디가셨지?
[파티] 빚과송금: 엥
[파티] 쥐안에든독: 요일님???
[파티] 쥐안에든독: 이런 개판 상황에서 잠수를?
[파티] 빚과송금: 개빡쳐서 흔적이랑 현피뜨러 가신듯ㄷㄷㄷㄷ
[파티] 쥐안에든독: ㄷㄷㄷㄷㄷ
[파티] 쥐안에든독: 흔적님도 말없는거 보니까 진짠가봐여;
[파티] 빚과송금: 킹리적갓심ㄷㄷ
[파티] 빚과송금: 그럼 우린 이제 머함?
[파티] 쥐안에든독: 기다려야할듯....
[파티] 빚과송금: 하 우리만 버리고 둘이 데이트갔네
[파티] 쥐안에든독: 역시 그런거져?
[파티] 쥐안에든독: 이거 저만 이상한거 아니져?
[파티] 빚과송금: 일욜님 전부터 흔적이랑 기류 묘하더니 점점 의심스럽네요ㅜㅅㅜ
[파티] 쥐안에든독: 그니깐요;
[파티] 쥐안에든독: 둘이 진짜 수상함ㅡㅡ
[파티] 빚과송금: 흔적 계삭한 뒤에 일욜님 뭘해도 노잼이라고 했던거도 의심스럽고
[파티] 쥐안에든독: 라이벌 길드 길마끼리 눈이 맞다니
[파티] 쥐안에든독: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 그 자체 ㄷ.ㄷ
[파티] 빚과송금: 꺄악~!!!~!
[파티] 빚과송금: 로맨틱행 >.<
[파티] 쥐안에든독: >.<
[파티] 쥐안에든독: 결혼까지 가보자고~
[파티] 빚과송금: 가보자고~
[파티] 빚과송금: 흔적S2오늘은일요일
 
“…….”
이 자식들이 서정연도 볼 수 있는 파티 채팅으로 무슨 소리를 떠들고 있는 거야.
여여랑의 로미오와 줄리엣 발언에 추가 타격을 입은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안 되겠다. 서정연이 얘기한 대로 조금 쉬면서 멘탈 회복 좀 해야겠다.
“나 이따가 올 테니까 애들한테 설명 제대로 해 놔…….”
[다녀와요.]
헤드셋을 벗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온 서정연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মই প্ৰতিদ্বন্দ্বী হোৱা বন্ধ কৰি দিম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