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씨, 오늘 컨디션 어때.”
제작사로 향하는 길. 운전석에 앉은 우태가 넌지시 묻자, 도형이 슬며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좋아, 오늘부터 시작이야. 잘해 보자.”
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동하는 내내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별을 담은 잔>의 출연 제안을 받고, 사전 미팅에서 대본을 읽었던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작에서 한번 연기를 했다지만, 예현의 이미지를 더욱 명확하고 견고하게 다지고 싶었다. 적어도 과거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인정하는 거지만, 어쩌면 그 시절에 해성의 존재를 조금은 방패막처럼 사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오롯이 혼자였다. 자신의 연기력으로 승부해야만 하는 상황이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야만 했다.
어느새 거뭇하게 손때가 타고, 조금은 너덜너덜해진 대본에는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대사 하나하나에 예현이 어떤 마음일지, 어떤 감정일지 적어 두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눈빛이 좋을지, 표정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해석해 덧붙였다.
예현이 곧 도형이 될 수 있도록. 김도형이 곧 유예현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한참 대본을 읽다 보니 어느새 제작사 건물에 도착했다. 대본을 정리해 옆 의자에 내려 둔 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재수 없게 올라가는 도중에 정해성이랑 마주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지?”
우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도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마주치면 또 어때. 앞으로 계속 볼 건데.”
“야, 너는 속도 좋다. 2년 만에 보는 건데, 껄끄럽지도 않냐?”
“일 때문에 보는 거잖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헤어진 건 난데, 형이 더 난리네.”
“재수 없는 건 맞잖아. 아주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일이 있었던 건 둘 다 똑같은데, 너 혼자만 죽어라 바닥 기었던 거 생각 안 나? 덤덤한 네가 더 신기하다.”
도형은 우태의 말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제 막 지하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뿐.
7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발이 불쑥 튀어나와 문 사이를 가로막았다.
닫히던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고, 곧이어 무표정한 얼굴로 해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우태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휘둥그레진 눈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어, 우태… 아니, 지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도형 씨도, 오랜만이에요.”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해성의 매니저, 도 실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황했던 우태는 금세 표정을 되찾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도 실장님도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이야, 우리 정 배우님은 여전히 신수가 훤하시네.”
“얼굴에 철판을 깔아서요.”
들었구나. 도형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우태의 모습이 보였다.
민망하겠지. 해성이 그 이야기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흠, 짧게 헛기침하던 우태가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기 무섭게 닫힘 버튼을 꾹꾹 눌렀다.
“오랜만이에요, 도 실장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도형의 모습에 도 실장 또한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잘 지내지? 어디 아픈 덴 없고?”
“네, 잘 지내요. 운동도 시작해서 전보다 더 건강해졌고요.”
“그건 다행이네요. 촬영에 지장이 없을 테니까.”
툭 던진 해성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냐며 눈빛을 보내는 도 실장이나 지 실장과는 다르게, 도형은 그 말의 속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 제게는 인사를 건네지 않느냐는 뜻이다. 이따금 유치한 모습을 보이던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정해성 씨. 오랜만입니다.”
도형의 담담한 대답에 해성은 고개를 살짝 숙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네 사람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올라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필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사람이 정해성과 김도형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네 사람만을 태운 채 7층으로 올라갔다.
평소에는 그렇게 빠르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처럼 느리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던 도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영롱한 기계음이 7층에 도착했음을 알린 순간이었다.
“내리자, 도형아.”
우태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도형의 팔을 잡아끌어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다.
갑작스럽게 저를 잡아당기는 우태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도형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며 그의 뒤를 쫓았다.
한참 빠른 걸음으로 걷던 우태가 어휴, 한숨을 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겁먹을 거면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해?”
“야, 내가 지금 겁먹어서 너 끌고 나온 줄 알아?”
“그럼 뭔데?”
다시 뒤를 돌아보며 해성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확인하던 우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도형을 바라보았다.
으으, 괜히 몸을 떨며 두 손으로 팔을 벅벅 문지르던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들어선 안 된다는 것처럼.
“정해성, 너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 꼭 야생 동물이 소동물 사냥하는 것처럼 눈을 번뜩이더라니까? 엘리베이터 문으로 비치는데 그게 얼마나 소름이 돋던지. 너 진짜 몰랐어?”
“…어, 몰랐어.”
괜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도형은 주먹을 질끈 말아 쥐며 엘리베이터 쪽을 힐긋거렸다.
해성이 오기 전에 빨리 사무실에 들어가자며 채근하는 우태가 아니었다면, 그가 올 때까지정신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나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떠나지 않는 의문만이 머리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
해성은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우태와 도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해성아.”
만약, 자신의 매니저인 성혁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계속 도형의 뒷모습을 곱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들린 건, 성혁의 커다란 한숨 소리였다.
“땅 꺼지겠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인데?”
“놀리냐?”
정말 모르는 건데. 어깨를 으쓱거리던 해성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도 있지만, 해성은 언제나 아날로그시계를 선호했다.
쓸데없이 연락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만을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미팅 시간이야.”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빨리 말해.”
“너, 눈빛 좀 숨기면 안 돼?”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말에 당황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랬냐는 의문도 아니고, 언제 그랬냐는 반항심도 아니었다.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숨겨 보기로 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미간을 좁힌 그가 다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었다.
“진짜 몰라?”
평소였다면 정말 모른다고 받아쳤을 텐데, 오늘은 정곡을 찔린 탓인지 그 말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성혁의 말이 맞다. 도형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
‘안녕하세요, 정해성 씨. 오랜만입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도형이라는 이름에 당황한 것도 사실이지만, 표정을 관리하는 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마음에 덤덤하게 고개를 들어 도형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부부의 이름으로 묶였던 시절에는 차마 보지 못했던, 갓 데뷔했던 시절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도형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움찔거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 또한 제가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부터 웃기고 이상한 일이지만.
시선을 떼어 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도형에게 꽂힌 눈길은 떠나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콧날이 오뚝했나 싶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그 위를 살포시 덮었다가 올라가는 기나긴 속눈썹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도형과 잠자리를 하더라도 세심하게 하나하나 뜯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애초에 그의 히트사이클이 너무 심해 본능에 못 이겨 임했던 잠자리가 대부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한가.
만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눈을 만져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저답지 않은 충동적인 감각에 움찔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야, 도형이 히트사이클이 언제였냐.”
그때, 심각하게 묻는 성혁의 질문에 해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왜 궁금하냐는 표정이었다.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좀. 제발. 그 눈빛.”
두 손가락을 굽혀 위협하는 성혁의 몸짓에도 해성은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조만간이네.”
웃기지. 헤어졌는데도 그의 히트사이클 주기를 입력해 둔 건.
이제 챙겨 줄 필요도 없고, 그에 맞게 자신이 쉬어야 할 이유도 없는데. 주기적으로 알림이 오도록 설정한 캘린더를 보니 괜히 속이 답답해졌다.
성혁 또한 그런 해성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핸드폰을 꺼낸 순간부터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손끝으로 힘이 실렸다.
“그래서 네가 도형이한테 눈을 못 뗀 거라고 생각하겠다고. 어쨌든, 몇 년 동안 서로 페로몬 맡으면서 살았고, 익숙해진 걸 테고. 뭐… 난 베타라서 모르지만.”
제 시선의 이유는 그렇게 정의 내려지는 건가. 괜히 씁쓸해졌다.
단지 그 때문일까, 의문이 따라오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런가 봐.”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 생각과 감정에 정의를 내려야 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올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일을 하러 온 것뿐이니, 주어진 것에만 최선을 다하고 돌아가면 된다.
저는 아마 도형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현실을 살아가겠지.
“조심할게. 걱정하지 마.”
넌지시 던지는 한마디에 성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 걸었다.
“형.”
대답도 없는 성혁을 따라가 괜히 어깨에 팔을 둘러 본다. 치워, 짧게 돌아오는 대답에도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도 속에 담긴 한숨은 채 사라지지 않는다.
‘마주치면 또 어때. 앞으로 계속 볼 건데.’
담담하게 말하던 도형의 목소리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저를 마주하던 눈빛을 곱씹던 해성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만하라고 했는데. 괜히 성혁의 말을 복창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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