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련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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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난감한 순간이 반복되고, 시련 또한 견딜 수 있는 정도로만 들이닥친다던데.
이 상황마저도 제가 잘 넘길 수 있는 시련인 걸까. 도형은 고민에 빠져들게 됐다.
 
“자, 도형 씨랑 유찬 씨 마주 보고! 유찬 씨 좋아요, 그렇게 사랑스럽게! 리얼하니까 좋네.”
 
잔뜩 신난 목소리와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이처럼 민망할 수 없었다.
극에 딱 어울리는 눈빛이다, 두 사람 케미가 좋은 것 같다,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 같다.
수없이 쏟아지는 말에 샵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만 잊자….’
 
생각을 곱씹을 때마다 불쑥 다가오는 유찬의 얼굴 때문에 다짐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만다.
 
‘아, 진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나직이 전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도형아.”
 
눈을 길게 휘어 웃는 유찬의 얼굴이 보인다. 그 순간, 도형은 숨을 꾹 참아야만 했다.
언제였더라, 유찬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서 그런 댓글을 본 적이 있었다.
 
나 원래 최유찬한테 관심 없었음. 근데 <너 혼자 살잖아> 나와서 생얼로 히죽히죽 웃는 거 보고 완전 감김. 왜 감기냐고? 안 봄? 최유찬 입덕 영상 안 봄? 안 본 눈 삽니다 리얼 천사 강림임. 오빠 어디가서 끼부리지 마라 진짜 오빠 웃지 마라 아니 웃어주라 아니 웃지 마라
 
웃는 게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이런 댓글을 쓰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코앞에서 웃는 얼굴을 보니 그 댓글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비즈니스에 비즈니스를 더한, 완벽한 배우의 웃음이 이토록 치명적일 줄 누가 알았겠어.
보통은 나도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할 텐데.
 
“좋아! 이제 유찬 씨가 도형 씨 손을 꽉 잡고, 도형 씨는 시선 피하면서 부끄러운 표정!”
 
그 미소에 어쩔 줄 몰라 안달복달하는 건 김도형, 저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사진작가의 요구가 이어지기 무섭게 유찬이 도형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요구가 덧대어진 것도 아닌데, 제게 얼굴을 바짝 붙이니 그대로 고개를 휙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형의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에 촬영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슬쩍 눈을 굴려 현장을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이곳을 향해 있었다. 각 배우들의 스태프들과 사진작가. 그리고 그의 보조까지.
메인 커플을 찍기 전, 서브 커플부터 찍고 싶다는 작가의 의견을 따른 게 잘못이었다. 적어도 유찬과 상의를 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말리지는 않았을 텐데.
 
“자 이번에는 도형 씨 허리를 꽉 끌어안을게요! 그렇지! 도형 씨는 유찬 씨 어깨 밀어냅시다. 힘껏! 유찬 씨는 밀리면 안 돼!”
 
유찬은 잔뜩 흥이 올라 외치는 작가의 말에 곧잘 포즈를 취해 주었다.
도형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선 그의 한쪽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주문하지도 않은 자세까지 잡았다. 천천히 깍지 껴 잡는 손이 왜 그렇게 뜨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유, 유찬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힘껏 밀어내 보지만, 유찬이 그 손길에 밀릴 리 만무했다. 되레 능글거리는 미소로 도형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왜?”
“과몰입이야. 너.”
“어, 과몰입 맞아.”
 
그리고 유찬이 도형을 힘껏 끌어당긴다.
그의 팔이 이토록 단단했던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수많은 감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고 만다. 맞붙은 어깨 사이에 깍지를 낀 두 사람의 손이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받은 역할이 딱, 지금 내 마음이랑 똑같거든.”
 
진짜 왜 이러는 거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누른 채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연신 좋다는 말만 하는 사진작가가 이렇게 야속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촬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그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해 역할과 자신을 일체화시키고 있는 유찬에게도 익숙해져야 할 테고.
하지만 머리와 몸은 언제나 따로 노는 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찬에게 이끌리던 촬영은 끝이 났다. 작가는 좋은 컷을 많이 건졌다며 뿌듯해했고, 유찬은 모두 도형이 잘 도와준 덕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도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널뛰는 심장을 간신히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어, 물 좀 마셔. 너 얼굴 터지겠다. 그렇게 부끄러워?”
 
우태가 다가와 물을 건네는 순간에도 도형은 대답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빨대를 물고 물을 쭉쭉 빨아올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촬영장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마자 메이크업 스태프들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톡톡 두드린다.
아직 단체 샷이 남았던가. 이럴 땐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게 편했다. 괜히 유찬과 눈이라도 마주한다면, 촬영의 여운에 허덕거릴 것 같았다.
하아, 길게 한숨을 뱉었던 그때. 이어지는 작가의 외침이 바짝 달아오른 도형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다음은 해성 씨랑 소연 씨!”
 
해성의 이름만 들어도 반응을 하는 건 언제쯤 고쳐지는 걸까.
두 사람의 촬영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반.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
이리저리 엉키는 욕망들이 머릿속에서 편을 나누어 다투고 있었다.
얼굴을 두드리던 손길이 하나둘 멀어지고 완연하게 혼자가 되었을 때, 도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걸 보지 않는 건, 내 손해야.’
 
해성에게는 분명 보고 배울 만한 것이 있을 테니까.
 
‘어쨌든… 인정하기 싫지만, 저 사람은 내 롤 모델이니까.’
 
그의 연기를 보며 연기자를 꿈꿨다. 비록 첫 바람은 그의 곁에서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욕심이었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켜보자. 저 사람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나랑 똑같이 쉬고 돌아왔어도, 그때처럼 여전히 멋질지….’
 
단순히 배우로서 선배의 현장을 탐구한다는 일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태프들 사이에 슬쩍 섰다. 한 사람 정도는 도형의 걸음에 의아함을 느낄 법도 한데, 촬영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들리는 건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 사진작가의 작은 탄성뿐이었다.
과연 톱스타로 불릴 만한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작가의 별다른 요구가 없어도 완벽하게 배역에 녹아들어 있었다.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본다거나, 사랑스럽게 마주 보며 웃기도 했다. 이마를 맞댄 채 끌어안은 모습은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고 해도 의구심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형이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저와 똑같이 쉬고 돌아왔음에도 배역을 완벽하게 이해한 그의 재능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 순간, 곁에 바짝 붙어 서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역시, 정해성은 깔 게 없네.”
 
중얼거리는 유찬의 눈빛 또한 진지했다. 어쩐지 분하다는 목소리를 들으니 도형 또한 재차 해성과 소연에게 시선이 향한다.
 
“나도 조금… 분위기를 잡아야 했나?”
 
아쉽다는 듯 대답하는 유찬의 말에 도형이 슬쩍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아니래.”
“그래도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한 거면 된 거 아니야?”
 
부루퉁해진 유찬의 모습에 자꾸 웃음이 터진다. 도형은 그의 어깨를 툭 때리며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표정 좋고, 자세 좋고… 도형아, 우리도 다시 찍을까?”
 
어느새 허리를 곧게 편 유찬이 도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고는 조금 더 밀착했다.
왜 유찬이 배우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뭘 다시 찍어. 됐거든.”
 
괜히 핀잔 어린 말을 툭 던진 도형이 다시 화면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뭐, 다시 찍고 싶은 마음이야 매한가지였지만.
 
“아, 왜. 다시 찍자. 나는 저것보다 더 멋있게 할 수 있는데.”
 
유찬이 다시 한번 웃으며 도형의 어깨를 툭 쳤다.
 
“됐다니까, 힘들어.”
 
도형이 도리질하며 슬쩍 옆으로 물러나자, 유찬이 그 곁으로 따라붙었다. 키득거리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촬영장의 스태프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딱 한곳, 소연과 해성이 서 있는 곳만큼은 그러지 못했지만.
 
“정해성 씨.”
 
해성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저를 마주하는 소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 보고 있고, 전부 티 나요.”
 
주어 없이 가슴을 푹 찌르는 말이었지만 그는 프로였다. 해성은 능숙하게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소연의 허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곤 가볍게 내려앉은 손끝으로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끌어왔다. 바짝 밀착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리라. 아련함으로 물든 소연의 표정만이 앵글에 담길 것이 분명했다.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주의하도록 하죠.”
 
그녀가 눈치챘을 정도라면 스태프들 역시 제 미미한 변화를 감지했을 테지.
촬영이 흔들릴 정도로 동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가 따라오기 시작하면 자신이 후회하고 있다는 것마저 인정해야만 하니까. 후회는 언제나 미련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도형을 향한 미련만큼은 아니어야 한다. 제 결정에 후회가 없는 삶, 그게 해성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었으니까.
소연을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를 취했을 때, 그녀의 얇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앞으로 참아야 할 날이 더 많을 텐데… 매번 그렇게 동요할 생각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키득거리며 웃던 소연이 사진작가의 첫 요구에 따라 그의 턱선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반짝거렸다.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해 무척 즐겁다는 사람처럼, 한쪽 입꼬리가 둥그렇게 말려 올라간 것도 잘못 본 게 아닐 터였다.
 
“최유찬 씨, 김도형 씨한테 마음 있잖아. 촬영 시작부터 눈빛이 남다르던데. 몰랐어요?”
 
동요하지 말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수없이 다짐하던 것들이 그 한마디에 흔들리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잘 보이지도 않는 촬영장 어딘가를 멀리 바라본다.
소연이 함께 시선을 옮겨 주었기 때문일까. 감독은 먼 곳을 바라보는 두 연인이라 생각하며 연신 셔터를 빠르게 눌렀다.
 
“재미있겠네.”
 
웃음기 섞인 그녀의 말에 해성은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뒤늦게 자각한 정해성 씨가 질투에 미치는 모습 보는 거.”
 
아니라는 말을 꺼내야 했는데, 좀처럼 나오지 않는 건 긍정의 뜻일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열심히 부정하고 있으면서, 이어지는 소연의 말에는 또 한 번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모습 많이 보여 줘요, 나 무척 기대하는 중이거든. 정해성 콧대가 제대로 꺾이는 모습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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