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당연한 건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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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랜만입니다. 송 작가님.”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으리라 믿습니다.”
 
숨이 덜컥 막힌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순간과 함께, 어두운 방 안에서 온갖 생각에 휩싸여 바닥으로 내려앉던 자신의 모습이 뒤따라 떠올랐다.
마음을 굳게 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떨어질 자리도, 튕겨 나갈 곳도 없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요. 좋습니다. 기대하죠.”
 
송 작가의 대답을 끝으로,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새하얀 바지를 입은 도형은 말 그대로 무슨 색으로든 물들 수 있는 상태였다.
인터뷰와 촬영을 하는 곳은 2층짜리 건물. 새하얀 테라스에 나간 도형의 뒤쪽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하얀 피부에 스며드는 붉은 노을은 제법 대조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고, 눈을 감고, 다시 아련하게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도형의 몸에도 선명한 노을이 내려앉았다.
송 작가는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도형을 촬영했다. 좋다는 말도, 그게 아니라는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순간을 만끽하는 그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옷을 세 벌, 네 벌째 갈아입고 가장 마지막에 입은 건 새카만 목 폴라와 면바지였다. 장소 또한 1층 정원으로 옮겼는데, 어둠에 묻힐 것만 같은 의상 탓인지 새하얀 도형의 얼굴과 1층에 가득 피어 있는 새빨간 꽃이 더욱 선명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막 벗어난 자신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이제야 빛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 얼굴을 빼꼼 내민 순간을 남기고 싶어서, 도형은 해사하게 웃었다.
송 작가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럴수록 셔터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조명에 따라 능숙하게 자세를 바꾸고, 자연스럽게 바닥에 눕고, 나무에 기대는 그의 모습을 말없이 렌즈 속에 담았다.
 
“김도형 씨.”
 
처음으로 송 작가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놀란 도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여기까지 찍어 놓고 이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걸까. 담담하게 대답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네?”
“젖어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수영장을 바라봤다. 촬영에 쓰일 수도 있다며 물을 갈았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말인즉, 옷이 젖어도 상관없다는 말이겠지. 한참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도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괜찮아요. 몸은 튼튼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수영장에 들어갈게요. 잠수해 있다가, 내가 이름을 부르면. 그때 나오는 겁니다. 단, 전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눈만 보이게 나오면 됩니다. 딱, 눈빛만.”
 
눈빛으로 모든 걸 전하라는 이야기였다. 도형은 망설이지 않고 수영장으로 걸어가 천천히 몸을 담갔다.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도형은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대로 몸에 힘을 풀어 뒤로 넘어간다. 연달아 들리는 셔터 소리에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엉덩이에 힘을 준 채 몸을 굽히니, 바닥으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가라앉고, 내려앉는다. 찰박이는 물소리만이 선명하게 남았을 때. 도형은 천천히 눈을 떠 조명이 비추는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빛을 바라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 빛은 이따금 해성이기도 했고, 그와 결혼하기 직전 연기에 몰두하던 제 모습이기도 했고.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서는 미래의 제 모습이기도 했다.
손을 뻗어 잡아 보려고 해도 손끝에조차 걸리지 않는 건 그때와 같았다. 애달픈 마음에 입술을 꽉 짓누른다. 목 끝까지 차오른 숨에 더는 견딜 수 없던 그 순간조차, 도형은 눈을 힘껏 감은 채 버텨 냈다.
그때처럼. 자신이 견뎌 낸 그 시간처럼. 이미 한번 거쳐 온 길은 어렵지 않다. 이대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는 벗어날 테고, 이겨 낼 테니까.
 
“김도형 씨!”
 
마침내 송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형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면에 머리칼이 맞닿는 느낌이 들었을 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자잘한 전류가 되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수면 위로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뚝, 뚝 흘렸다.
과거와 현재의 자신이 지금 이 찰나에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가라앉던 김도형이 다시금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오는 과정.
김도형의 또 다른 시작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분이었기에, 가능성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좋았어, 오케이!”
 
송 작가의 쾌감 어린 목소리와 함께 도형이 숨을 크게 내뱉으며 수면 위로 불쑥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카만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나, 그저 눈물만 펑펑 흘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모두 끝나 옷을 갈아입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후부터 시작한 촬영치고는 빨리 끝났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지만, 도형은 어쩐지 부족했다.
조금 더 보여 주고 싶었다. 그때에도 미처 내보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든, 그 누구든 봐 주었으면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메이크업 팀이 머리를 말려 주는 손길에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데, 송 작가가 도형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마침 머리를 다 말렸다는 메이크업 팀의 이야기에 도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이 단단했다. 꼭,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 내 줄 사람인 것 같아서. 그 시작을 제대로 끊어 준 것만 같아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작가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김도형 씨.”
“제가요?”
“눈에 보였거든요. 간절함이.”
 
또, 코끝이 시큰거린다. 괜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한참 생각하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송 작가를 마주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아봐 준 게 아니라, 이제야 김도형 씨가 의미를 찾은 거겠죠.”
“의미….”
“앞으로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의미가 참 중요하거든. 화면 너머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
 
때로는 누군가 건넨 한마디가 마음을 찌르고 헤집기도 한다던데.
도형은 지금 이 순간, 송 작가가 건넨 말이 딱 그렇게 와닿았다.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 어쩌면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송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우태는 도형의 부탁을 받아 따뜻한 음료와 쿠키를 촬영장에 배달했다. 모두가 하나씩 가져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
 
유독 피곤한 하루였다. 주차장에 들어온 해성은 도착했다는 성혁의 말에도 쉽게 눈을 뜰 수 없었다.
 
“야, 정해성.”
 
마지막 부름에 느릿하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조수석에서 저를 툭툭 치는 그의 손길에 어렵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내일은 오후 스케줄이니까, 아침까지 실컷 자. 안 깨울게.”
“…깨워도 못 일어나.”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자라는 잔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자마자 뒤를 돌아 경수와 성혁을 번갈아보았다.
그래도 피곤한 하루를 잘 버텨 낼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고 자신을 서포트해 주는 그들이 있기에.
 
“오늘도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둘 다.”
“오냐, 내일 보자.”
 
성혁의 말에 손만 몇 번 흔들어 준 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비틀거리는 게 퍽 우습다.
버튼을 누르고 그저 무심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도착했다는 기계음이 울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무섭게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오늘 왜 이렇게 유독 피곤한가 했는데,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김도형.’
 
도형을 만났기 때문이다. 언젠가 마주하겠지, 같은 업계에 있으니까. 회복이 되고 난 뒤엔 민망할 정도로 자주 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게 자신의 복귀와 맞물리게 될 줄 누가 알았으려고.
더욱 기분을 미묘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깨닫지 못할 것 같았던 것들을 머리에 담게 되고. 도형을 본 순간 자꾸만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다는 사실이었다.
헤어졌으니 그런 것일 테지. 마지막까지 잔인했던 자신을 뒤늦게 깨달아서. 저에게 해 주었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 떠올랐으니까.
머리를 뒤덮는 수많은 이유는 결국, 하나같이 자신의 무심함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참, 이러고도 뻔뻔하게 잘 웃고 돌아다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눈이 뻑뻑했다. 머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옷을 벗고, 샤워 가운을 입고, 욕조에 물을 받은 걸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였다.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오랜만이네.”
 
모든 생활의 끝에는 도형이 있었다.
잔뜩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따뜻한 미소가 그를 반겼다.
속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이유로 건네는 수프 한 그릇, 다 먹어 갈 즈음 내밀던 제 취향의 허브티.
그리고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침실까지.
이제 와 후회하고 고마움을 곱씹어 봤자 늦었다는 것을 잘 안다. 잃은 뒤에 후회하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늦어도 너무 늦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다시 도형의 발목을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이 곁에 없어야 더욱 힘차게 날갯짓을 할 수 있다면, 그대로 날아가라 보내 주는 것이 옳다. 그저 미안한 마음만 전하자.
수많은 다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욕조에서 일어났다. 아직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한 게 신경 쓰였지만, 좀처럼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침대에 털썩 눕기 무섭게 온몸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어렵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이 뜨거운 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약이라도 먹을까. 내일 오후에 촬영이라고 했으니, 오전에는 병원을 가 봐야지.
무거워지는 몸을 따라 잠이 밀려오면 좋을 텐데. 왜 항상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리다가, 손등을 이마에 올렸을 때.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열이 나고 있다.
복귀한 이후, 너무 가열 차게 달려온 탓이라고 생각했다. 줄지어 있던 광고와 잡지 인터뷰. 방송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 잡지 않았으나, 잡지는 그와 또 별개인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보낸 몇 주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푹 쉰다.
 
‘왜 이렇게 몸을 안 챙겨요.’
 
이 순간마저도 도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기 때문에.
 
‘어린애도 아니고, 형이 뭐, 강철 인간이라도 돼요?’
 
울먹거리던 목소리였다. 그때에는 귀찮게만 느껴졌는데. 알아서 잘하겠거니, 그렇게 여겨 주기를 바랐는데.
 
‘좀 자고 있어요. 죽 끓일게. 약은 성혁 형이 받아다 준대요.’
 
지금 생각하면 자신이 죽일 놈이기는 했다.
 
“도형아.”
 
넌지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채,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김도형.”
 
한참을 읊조리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헛웃음을 쳤다. 문득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해성은 손을 뻗어 베개 아래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잡힌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켠다.
그는 늘 그랬듯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아플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 늘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
무너지는 순간엔 저를 생각해 달라 말했던 그 사람의 번호였다.
신호음이 한참 이어지고,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형… 집이야? 자고 있었으면 미안. 근데… 나 열이 좀 나서, 집으로 좀 와 줘.”
 
대답이 없다. 자다가 받은 건지, 짜증이 난 건지.
 
“도성혁 실장님.”
 
또 다시 그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건 정적뿐이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왜 조금 전까지는 밀려오지 않던 잠이 이제야 와르르 쏟아지는 건지.
형, 듣고 있어? 열에 들뜬 입술을 작게 달싹거리며 한숨을 푹 내뱉는다.
그리고 해성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꼭 퓨즈가 나간 사람처럼 잠이 든 탓에, 이어지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잘 자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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