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같이 가기로 했다고?”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유찬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최유찬, 정면!”
결국, 오 실장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지만.
도형의 메이크업을 해 주던 민 실장이 그런 유찬의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도형 씨는 얼굴 돌리면 안 돼요.”
“네, 실장님.”
유찬은 머쓱한 듯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마주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굳이 갈 필요가 뭐 있어. 이유도 영 탐탁지 않은데.”
“유찬아, 나중에. 사람 많아.”
“아니… 하, 그래. 나중에.”
메이크업을 받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더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질 것 같았다. 듣는 귀가 많을 땐 괜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경험에 의한 교훈이었다.
“도형 씨, 오늘은 머리 어떻게 할까? 옆으로 넘기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앞머리 내릴까?”
“도형이는 앞머리 내린 게 나아요.”
“쟤가 낫다고 하니까 옆으로 조금 넘기고 싶어요.”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유찬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김도형.”
“최유찬.”
오 실장의 말에 꼼짝없이 거울을 향해 얼굴을 돌려야 했지만.
“아니, 실장님. 도형이가 먼저 얄밉게 굴잖아요.”
“어휴, 정말. 도대체 몇 살이야? 가만히 보면 꼭 우리 막내 같아.”
“실장님, 막냇동생도 있어요?”
“그럼.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냇동생 있지.”
유찬은 금세 오 실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도형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 지금 유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웃으며, 농담을 하는 일.
친한 사이에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친분이 쌓이기 전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형 씨, 요즘 얼굴 좋아진 거 알아요?”
민 실장의 물음에 도형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응. 도형 씨 얼굴, 참 좋아졌어. 좋은 일 있나 봐요?”
“좋은 일….”
도형은 잠시 생각했다.
좋은 일이라는 게 꼭 어느 한 가지로 정의되어야 하는 걸까.
더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지옥 같지 않다거나. 집 안에 홀로 남아 외로움을 삼켜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토록 원하던 연기를 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하루를 보내는 일. 이따금 생각이 깊어지기도 하지만, 그에 잡아먹히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는 제 자신이 되었다는 것.
하나, 둘 모여 지금의 행복을 이루고 있는 거라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닌 걸까.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찰나.
“민 실장님, 그거 제 덕분이에요.”
유찬이 다시금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했다.
“유찬 씨 덕분이라구?”
“그럼요. 같이 촬영하지, 밥 먹지, 수다 떨지. 얼마나 좋은 일이야.”
“이 자신감 어쩔 거니. 안 그래요, 민 실장님?”
“유찬 씨는 저 자신감이 또 매력이기는 하지.”
“아이, 참. 진짜라니까. 그치? 도형아, 맞지? 아 대답 좀 해 봐! 네가 대답을 해야 내 자신감에 근거가 생기지!”
세 사람의 대화에 도형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었으나, 소소한 행복들이 모여 만든 하루가 제게는 좋은 일이었다.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제 안의 행복에 어쩐지 속이 따끈해지고 있었다.
메이크업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해성은 뒤늦게 도착해 그들 다음으로 소연과 함께 메이크업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서, 다시 아까 이야기로 좀 돌아가자.”
“뭘 또 돌아가.”
“왜 만나는데. 나 그 사람 좀 불안해. 아니, 너랑 만나는 거 불편해.”
“왜 불안하고 불편해?”
때로 도형의 질문은 가장 중요한 정곡을 찌르는 경향이 있다.
차마 입을 열 수 없게끔 만드는 한마디.
하지만 그에 굴할 유찬이 아니었다. 도리어 어깨를 활짝 편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는 것 같아서.”
순간, 도형이 움찔거리며 입을 꾹 닫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자꾸 알짱거리는 거, 영 거슬려.”
어떤 대답도 내어 주지 못한 채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쟤는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다 생각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진짠데.”
“알았으니까 그만해.”
“도형아.”
유찬이 도형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기자, 그의 가녀린 체구가 힘없이 딸려 온다.
“유찬아, 나는….”
그리고 도형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뒤를 돌아본 그 순간.
“유찬 씨, 도형 씨! 준비 끝났으면 리허설 들어갑시다!”
나 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결국, 두 사람은 대화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채 카메라 앞에서 서로를 마주해야 했다. 주고받는 눈빛 속에서 어떠한 시선이 오갔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자, 8부 23신. 온영이 예현에게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도형은 유찬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나 감독의 리허설 시작 사인과 동시에 눈을 떴다.
“오늘… 예현 씨에게 마지막 고백, 하러 왔어요.”
그렇게 말하는 유찬의 얼굴이 그저 온영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배역으로 마주해야만 연기에 몰입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내가 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돌.”
구슬프게 웃는 그 모습에 제 마음이….
“그래서 어디에 부딪히든, 어디로 굴러가든. 난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단단하니까.”
왜 이렇게 울컥 차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 말이 유찬 본연의 속내처럼 느껴져서일까.
“근데 돌도 부서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나보다 더 단단한 바위에 부딪히면, 돌도 깨질 수가 있었어.”
“온영 씨.”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고백이에요. 마지막으로 부딪혀 보고, 그래도 내가 깨질 것 같다면… 그만하려고요. 나도 나를 지켜야죠.”
유찬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사를 읊조렸다. 그 모습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왜 이토록 따뜻하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예현 씨.”
유찬은 가슴 속에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을 토해 내듯 말했다. 웃고 있으나 웃지 않는 듯한 눈매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결국, 도형은 차오르는 감정을 이겨 내지 못했다. 그의 새하얀 볼 위로 투명한 물줄기가 죽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그 순간, 유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리허설이니 여기에서 끝내도 괜찮았지만, 나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는 건 이유가 있을 터였다. 메인 카메라도 도형을 향해 있으니, 아직은 괜찮겠지.
생각해 보면, 예현의 대사 앞 지문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듯. 배우님이 해석한 예현의 감정을 보고 싶습니다.>
보통의 지문과 달랐다.
하지만 도형은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유찬만이 나 감독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쳐야 할지 몇 번이고 물어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을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도형도 예현의 감정에 제 흐름을 맡기고 싶었던 걸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도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예현은 저와 많이 닮았다. 소용돌이치는 감정들 중 어떤 게 진정 자신이 원하고 느끼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가 전해 주는 온기를 뿌리칠 용기는 없으면서, 붙잡을 용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 이렇게 또 거절당했네.”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온영의 목소리 위로 다시금 유찬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니, 유찬의 목소리 위로 온영이 겹쳐지는 걸까.
도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래. 저와 많이 닮은 예현이라지만, 딱 하나 다른 게 있었다.
“붙잡으면, 붙잡힐 거예요?”
적어도 예현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오롯이 마주할 줄 안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예현 씨.”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가 어그러진 마음이라, 서툴렀어요. 무서웠어요. 겁이 났어요. 그래도 당신은 나를 좋아하니까, 곁에 있어 주니까, 쫓아와 주니까. 내가 좀 더 머뭇거려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대사를 하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린다.
예현의 대사가 마치, 유찬을 대하는 제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저는 더 못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저로서는 예현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하니까.
“그저 기댈 수 있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이어도 괜찮을 마음인 줄 알았는데….”
다시 고개를 숙인 도형이 코를 훌쩍거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도, 배우답지 못한 모습은 아닐까 싶었다.
“나도, 좋아해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미안해요… 당신이 끊어 내려고 할 때까지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요.”
대본에서 예현은 온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지만.
아니, 저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뒤늦게 깨달아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눈을 마주할 수 있는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눈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외면하던 지난날이 미안하기에.
정적이 이어진다. 리허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복받쳐 오른 감정을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제가 생각할 때 예현이 온영을 마주하는 건 바로 이 순간이어야 했다.
“나도… 좋아해요.”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전할 때.
지난날과 감정, 이야기들은 모두 뒤로한 채. 현재의 예현으로서 온영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
“좋아해요. 온영 씨.”
두 번째 고백에 온영은 환하게 웃어야만 했는데.
“…진짜, 예요?”
그는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잠시나마 온영으로 보였던 얼굴이 다시금 유찬으로 돌아온다.
그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니 저도 민망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라는 마음이 물밀듯 밀려오기 무섭게 저 또한 얼굴을 붉혔다.
“컷! 아주 좋아!”
그 순간, 나 감독이 컷을 외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의 얼굴이 제법 만족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 본 촬영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겠어?”
유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형은 자신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일단 본 촬영도 지금 이대로 가 보고 영 안 나온다 싶으면 리허설 본이랑 짜집기해 보자고. 혹시 몰라서 촬영은 해 뒀으니까. 알았지?”
잔뜩 신난 나 감독의 모습에 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순간, 모니터 뒤에 멀뚱히 서 있던 해성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못마땅한 그의 표정. 저를 마주하기 무섭게 뒤를 돌아 버리는 그의 모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행동의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저 이건 연기일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형아.”
하지만 저를 붙잡는 유찬의 손길에 우뚝 멈추고 만다.
“가지 마.”
이어지는 말에 도형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가지 마. 도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