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꿈이었던가. 잠결에도 떠올리려 애쓰던 그 무렵, 머리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천천히 눈을 떴다.
가물거리는 시선 너머로 보이는 건, 한숨을 푹 쉬고 있는 성혁의 모습이었다.
“…형.”
“야 이 자식아, 이렇게 안 좋으면 어제 들어오기 전에 말을 하든가.”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는데, 머리가 지끈거려 입을 뗄 수 없었다.
꼭 팽창한 풍선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한숨을 푹 쉬며 다시금 눈을 힘껏 감았다가 떴다.
어제 제대로 전화를 한 게 맞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고맙다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을 때, 이어지는 그의 한마디에 사고 회로가 정지한다.
“아프면 나한테 전화를 하지, 왜 도형이한테 전화를 해서 애를 놀라게 만들어.”
“…어?”
도형이라는 이름에 머리가 붕 뜨고 만다. 그러지 않아도 멀어지는 의식이 점점 더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도형이가 놀라서 나한테 전화 왔더라. 우태한테 물어서 겨우 연락했다고. 너 아픈 것 같은데, 말도 없고 전화도 안 끊은 거 보니 그대로 잠든 것 같다고. 얼른 가 보라고 애가 아주 사색이 돼서 말하는데 내가 더 놀랐잖아, 인마.”
이상하지. 조금 전까지 몽롱했던 정신이 거짓말처럼 또렷해졌다. 손을 더듬거려 베개 옆 핸드폰을 집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자신이 잘못 걸 리가 없는데. 어쩌면 이건 확언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제발 아니기를, 부디 아니라는 걸 자신이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며 목록을 훑었을 때.
정확히 찍혀 있었다. 수신인 김도형. 이름 석 자를 보자마자 온몸의 피가 사악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안 물어볼 테니까, 일단 있어 봐. 죽 데워 올게.”
성혁이 일어나 방을 나가고, 해성은 자신의 핸드폰을 뚫을 기세로 노려봤다.
‘분명, 성혁이 형 번호를 누른 것 같은데….’
일순간, 온몸으로 우두두 소름이 돋았다.
익숙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고 했는데, 그게 하필 도형이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플 때 생각이 나는 건 당연히 김도형이 아닌 도성혁이어야 했고.
아플 때 찾는 사람 또한, 더 이상 도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럴 때만 기대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저 또한 원하지 않는데.
창피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프다는 이유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성혁에게 할 말을 도형에게 했다.
해명을 할까 싶다가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로 전해야만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건 변하지 않는다.
해성은 도형의 번호가 찍힌 화면을 슬쩍 문질렀다.
“…내가 말해서, 뭔가 바뀌기는 하는 건가.”
어쩌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더 이상한 사람으로 남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전해야 하는 것을 분명 알고 있는데, 이대로 피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 일단 사과는 해야지. 놀랐을 수도 있잖아.”
저만큼이나 놀란 건 성혁도, 우태도 아니다.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 상황을 마주한 도형이겠지.
한참 고민하다가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느리게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도댕댕
네게 전화하려던 게 아니었어, 미안하다.|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건 너무 냉정한가 싶어서.
전화하려던 게 아니었던 건 맞지만, 일단 상황이 벌어지고 난 뒤니까. 미안하다는 사과가 얄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결국, 전부 지워 버리고 새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도댕댕
성혁 형한테 전해줬다며. 고마워. 나도 모르게 전화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미안해.|
이 정도면 됐나. 또 한참 고민하며 텍스트를 바라보지만, 어딘가 성에 차지 않았다.
실수를 한 건 맞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되어 버리는 그 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니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또 적어 둔 텍스트를 모두 지우고 말았다.
도댕댕
전화한 줄 몰랐어. 성혁 형한테 전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는 조심할게, 미안해.|
이제야 조금 나은 것 같았다.
오롯한 진심을 담은 메시지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확언만큼 바보 같은 게 없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 또 같은 변명을 하는 건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앞으로는 조심한다는 말은 저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오는 말이다. 그래, 이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렵다, 어려워.”
도형에게 보낼 메시지를 고민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고민을 한 적은 있었던가. 사실 그런 적이 더 드물었던 것 같다.
도형이 적는 내용에 그대로 반응해 답장을 적었고.
귀찮을 땐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적도 허다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면 감정이 담기지 않아도 내어 주었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편한 사람. 가장 큰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 버리는 사람이 바로 김도형이었으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에도 해성은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제대로 전송이 됐나, 슬쩍 화면을 켜 다시 한번 확인을 한다.
눈을 감았다가 재차 번쩍 뜨고는 화면을 노려본다. 혹시라도 당장 답장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짧게 한숨을 뱉던 그가 핸드폰을 내려 둔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
한편, 도형은 소파에 누워 대본을 읽고 있었다.
원래 같았더라면 드라마를 위한 활동을 이어 갔어야 하는데,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획사 대표의 판단하에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다.
전날 화보 촬영이 있었던 탓이다.
‘도형아, 너 그렇게 죽어라 일 안 해도 돼.’
꾸짖듯 말하는 대표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일단, 너부터 돌아보는 연습을 해. 지금은 그게 우선이야. 알았어?’
맞아, 그게 맞지.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우태의 모습도 떠올랐고.
“쉬는 것도 쉬어 본 사람이 할 줄 알던데… 나는 그래 본 적이 없네.”
중얼거리다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지금의 도형으로서는 무얼 하며 쉬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려니 따분하고, 바깥으로 나가자니 돌아다닐 곳이 마땅하지 않다.
잠시간의 공백마저도 도형에게는 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법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과거의 제 작품을 돌아보며 오답 노트를 쓰듯 고쳐야 할 부분을 찾는 것도 오늘은 쉬고 싶었다. 결국, 도형이 선택한 건 <별을 담은 잔>의 대본을 훑는 일이다.
주인공인 해성이나 소연처럼 자주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자신의 역할이 갖고 있는 비중도 만만치 않았다.
혜아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딛고자 떠난 여행에서 예현은 온영을 만나게 된다.
적당히 넉넉한 집안의 막내아들인 그는, 특별한 스노우볼을 만들어 판매한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던 온영은 어느 날, 별을 연구하기 위해 그 나라를 방문한 예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세계였기에, 예현이 온영을 밀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같은 남자이기에 어렵다는 말로 거절했으나, 온영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닌다.
사랑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를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간 예현은 우연히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천문학 수업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금 마주한 온영. 두 사람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사랑이라는 두 사람의 감정이 결국 그들의 고난과 역경이 된다.
생각보다 진득한 감정선이 필요했다.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세상.’
그렇기에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다.
감독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도형의 시선이 슬쩍 테이블 위 핸드폰으로 향한다.
이제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저 생각에서 멀어지게끔 하기 위해서 일부러 대본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을 뿐이지.
“너도 참, 너다. 잠깐 한눈팔았다고 바로 핸드폰이나 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어젯밤, 갑작스러운 해성의 전화에 얼마나 놀랐던가.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 가던 밤의 조각이 도형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받지 않을까 했지만, 온 신경은 여전히 해성에게 향해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하게 전화를 받았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간 순간 전화가 끊어질까 봐.
모든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약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 끊어야 하는데, 매정하게 왜 전화를 했느냐 쏘아붙여야 했는데.
‘형… 집이야?’
다 죽어 가는 그의 목소리에 온몸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프구나, 단박에 깨달았다. 이제껏 그가 몸져누울 때마다 곁을 지켰던 건 자신이었으니까.
‘자고 있었으면 미안. 근데… 나 열이 좀 나서, 집으로 좀 와 줘.’
성혁을 찾는 전화였구나. 어서 전화를 끊고 우태에게 연락해 성혁의 번호를 받아야만 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오롯이 혼자이기에 가능한 욕심이다. 우태나 유찬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를 악물고 욕심을 떼어 냈을 텐데.
‘도성혁 실장님.’
그 부름을 마지막으로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이어졌다. 그대로 잠들었나 보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뱉었을 때, 도형은 자신의 욕심을 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우태에게 전화해 성혁의 번호를 얻었다.
‘정해성이 아파서 죽든 말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형, 이 사람 쓰러져서 드라마 차질 생기면 그건 나한테도 문제인 거야.’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설득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우태는 성혁의 번호를 도형에게 넘겼다.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말을 도형이 딱 잘라 거절했기 때문이다.
‘너, 진짜 그것만 알려 주고 끊어야 돼. 쓸데없는 짓 하지 않기다. 어? 형이랑 약속이야.’
몇 번이고 강조하던 우태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성혁이 말하지 않았으려나. 그가 말하지 않아도 통화 기록에는 남았을 텐데.
해성이 제게 연락해 고맙다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기대하고 만다.
미련이고 감정이고 모두 접어 버렸다 단언했으면서.
한참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우태의 말을 조금 인용하자면, 정해성이 괜찮아졌든, 괜찮아지지 않았든.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됐어. 아무 생각 하지 마. 신경 꺼. 그냥 호의였잖아. 뭘 바라는 거야.”
멍청이. 중얼거리며 다시 대본에 시선을 돌린 그때. 핸드폰이 묵직한 진동을 일으키며 유리 테이블 위를 크게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핸드폰을 덥석 집어 올렸다.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다. 선명하게 찍힌 정해성, 이름 석 자에 몇 차례나 심호흡하며 속을 가다듬는다.
긴장하지 말자, 절대 긴장하지 말자. 기대도 하지 말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핸드폰 잠금을 해제한다.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를 본 순간 도형은 입꼬리에 힘을 잔뜩 실어야만 했다.
정해성
전화한 줄 몰랐어. 성혁 형한테 전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는 조심할게, 미안해.
미련한 새끼.
핸드폰을 힘껏 쥔 채 고개를 숙인다. 결국 이 정도였는데, 조심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다시금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두번 다시 기대하지 말자. 결심하고 또 결심하며 헛헛한 숨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