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산을 넘고 나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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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끝내고 나면 언제나 양가감정에 휩싸이고는 한다.
더는 배역에 몰입하며 스케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안도감.
더불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적막에 낯선 마음.
물론, 아직 종방연도 남았고 드라마 홍보를 위한 프로그램 출연이 남았지만.
그건 드라마 촬영과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해성의 스케줄이 있는 날. 도형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휴일을 즐기라며 우태의 동행도 마다했다.
그래서인지, 우태는 끊이지 않고 도형에게 전화를 계속했다.
 
[진짜 그 집에서 사는 거야?]
“일단은. 형, 오늘 쉬는 날인데 왜 이렇게 내 스케줄을 체크해?”
[야, 이게 무슨… 아니, 짐 챙기고 갈 거였으면 나 부르지 그랬어.]
“됐네요. 나도 운전할 줄 알아.”
[차는 있고?]
“응. 해성이 형이 빌려줬어.”
[너도 좀 사라. 돈도 있는 놈이.]
 
푸스스 웃던 도형은 옷과 속옷을 챙기고, 새롭게 쓸 다이어리도 가방에 넣었다.
깔끔하게 청소까지 마친 뒤라 그런 건지,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던 곳인데.
어쩐지 남의 집에 와 있는 이 기분은 뭘까.
 
“알아서 할게. 아무튼, 얼른 빛나 누나랑 놀아. 나 조카도 보고 싶어.”
[이 자식이, 못 하는 말이 없어! 야! 무슨 조카, 조카 같은 소리 하네.]
“어? 이 반응 뭐지? 이거 누나한테 일러도 돼?”
[어어, 끊는다. 도형아 조심히 들어가고. 가서 꼭 연락해!]
 
도형은 다급히 전화를 끊는 우태의 목소리에 소리 내어 웃었다.
못 말려.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집을 휙 둘러봤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마침표.”
 
나 감독이 했던 말을 곱씹는다.
제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마침표. 그중 하나가, 어쩌면 이 집일지도 모른다.
어느 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된 공간이 아니던가.
그 끝에 갇힌 채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그 시간 내내 이 집은 제게 커다란 둥지가 되어 주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도록, 저를 지켜 주었다.
 
“고마워.”
 
도형은 나직이 속삭이며 웃었다.
 
“그래도 나, 여기에서 행복했어.”
 
아주 많이.
쑥스러운 듯, 민망하게 중얼거리던 도형이 걸음을 옮겼다.
어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해성의 향기가 만연한, 그의 온기가 잔뜩 배어 있는 집으로.
신발에 발을 욱여넣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그때.
 
“김도형 씨!”
 
어디선가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도형이 뒷걸음질 치자, 그는 실실 웃으며 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엔드패치 기자, 옹진혁입니다. 잠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엔드패치.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오래전, 자신의 일이 터졌던 그때부터 단 한 순간도 우호적인 기사를 써 준 적이 없는 곳이다.
그러니 더더욱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수밖에.
 
“죄송합니다. 소속사를 통하지 않은 개인 인터뷰는 하지 않습니다.”
 
세리와 우태가 일러 준 대로 말하며 그를 피하려는데, 옹 기자는 재차 도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에헤이. 왜 이러실까.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할 말 없습니다.”
“임하경 씨 관련인데, 그래도 없어요?”
 
도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경이 엔드패치와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봐, 있네.”
“아니, 저는-”
“김도형 씨. 임하경 씨를 이용해 정해성 씨와 최유찬 씨의 관심을 끌었다던데, 이 말이 사실입니까? 임하경 씨 사고 당시, 임하경 씨를 방패처럼 사용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형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당황해 그를 바라보자, 옹 기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임하경 씨와도 인터뷰 마쳤습니다. 사귈 것처럼 관계 형성 다 해 놓고 이용만 당했다던데. 처음에는 최유찬 씨, 나중에는 임하경 씨였다고… 이게 사실인가요?”
 
뭐라고?
도형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무슨 인터뷰를 한 건지, 임하경과의 관계는 또 무슨 말인지.
당황한 도형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에이, 또 모른 척한다. 임하경 씨가 전부 인정했다니까요?”
“그럴 리가요. 인정하고 말 게….”
 
어디 있어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형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자가 꺼낸 녹음기에서 재생되는 목소리가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김도형 씨와 비밀리에 좋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런 말인가요?]
[네… 선배와 촬영을 하면서 가까워졌고, 저도… 선배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어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성급하게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저 좋은 마음으로 관계를 이어 가고 있는데.]
[있는데?]
[갑자기 도형 선배가 해성 선배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유찬 선배랑 부쩍 붙어 다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타깃이 저로 바뀐 기분? 물론…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같이 쇼핑도 하고, 연락도 자주 주고받았고. 그래서 제 SNS에도 도형 선배와 찍은 사진이 종종… 올라왔던 거고요.]
[흠… 어떤 식으로 임하경 씨를 이용했다는 거죠?]
[저와 함께 있으면서 해성 선배님을 자극하려 했던 것 같아요. 요전에 백화점에 같이 갔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일부러 해성 선배님을 불렀더라고요. 데이트, 가자고 했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해성 선배님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우리가 찍은 사진, 그거 말하는 거죠?]
[…네, 맞아요.]
[배우 편파는 무슨 말입니까? 나태석 감독님이 그럴 분은 아닐 텐데요.]
[편파…라고 해야 할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당장 활동하는 건 지금 이 드라마뿐이에요. 그런데… 도형 선배님이 히트 사이클을 앞두면 언제나 스케줄이 크게 변동이 됐어요. 당장 내일이 촬영 날이었는데 선배 컨디션에 따라 2주, 혹은 3주까지 미뤄진 적도 있고. 다른 선배들의 러트 시기가 겹쳐도, 저를 비롯한 조연 배우들의 스케줄은 존중되지 않았어요.]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자기도 모르게 가방을 툭 떨어트린 도형이 허겁지겁 다시 가방을 들어 올렸다.
 
“봐요. 다 수긍했잖아. 김도형 씨, 겁내지 말고 그냥 말해 보세요. 우리가 뭐, 김도형 씨 잡아먹겠어요?”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기서 한마디만 잘못해도 모든 일에 흠집이 난다.
드라마, 나태석 감독, 정해성, 최유찬. 그리고 저와 소속사까지도.
그럴 수는 없었다.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김도형 씨.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괜찮다니까.”
 
회유하려는 기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도형은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까딱하다가는 그들이 어떤 기사를 쓸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 아무리 충격적이고 다소 놀랐을지라도 정신은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소속사 통해서, 정식으로 인터뷰하겠습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말을 하면, 제 입장도 곤란해져요. 회사도 마찬가지고요.”
“진짭니까? 진짜로… 정식으로 요청하면, 인터뷰 진행하는 거죠?”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옹 기자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도형의 비위를 맞춰야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하경 씨의 주장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온전히 한 사람 말만 믿고 그런 기사를 내도 되는 건가요?”
 
도형의 말에 옹 기자는 코웃음을 쳤다.
참 나,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도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 사람은 잃을 게 없으니 거짓말을 못 하는 겁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무명 인생 그대로 나락 갈 텐데, 거짓말을 하겠어요?”
“만약 그게 모두 진실이 아니라면요. 그땐 엔드패치도 같이 책임지시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확답은 못 하시네요. 임하경 씨 주장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않고 이거다 싶어서 기사 쓴 거. 맞죠?”
“아, 그게 중요합니까. 지금?”
“…뭐,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죠. 어쨌든 인터뷰는 소속사로 문의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답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형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옹 기자를 지나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사건은 선을 넘었지. 임하경. 그의 이름 석 자를 곱씹으며 차에 올라탔다.
 
***
 
같은 시간.
으레 있는 광고주 미팅을 마친 해성은 30분째 회사 주차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해성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안 되겠냐?”
 
성혁의 말에도 해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 진짜 도박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절대 그냥 안 끝나. 너 진짜, 기껏 여기까지 쌓아 온 거 어쩌려고 그래. 어?”
“각오했어.”
“야이씨, 너만 각오하면 될 일이야. 이게?”
“그리고 이 정도로 정해성 안 무너져. 그 정도 프라이드는 있어.”
“아니, 야… 하, 진짜!”
 
성혁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 한숨을 터트렸다.
물론, 성혁 또한 알고 있었다. 이대로 해성을 말린다고 한들, 그가 들을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을 쾅쾅 내리치며 제 팔자를 탓하는 사이, 해성은 결심을 한 듯 조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이어지고, 곧이어 조 대표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어, 조금 전에 나가 놓고. 무슨 일이야?]
“지난번 상의드렸던 일. 기억나시죠. 그 문제로 좀, 뵙고 싶은데요. 대표님.”
 
조 대표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말을 잇지 않았다.
 
[그래, 올라와.]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해성은 그러겠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망설이지 않고 차에서 내리자, 성혁은 자포자기한 눈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난 분명히 말렸다.”
“응. 도 실장님은 말렸지.”
 
대충 대답하며 엘리베이터를 올려다본다.
한 층, 한 층 내려오는 숫자를 눈에 담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곱씹었다.
자신의 결정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 모르는 게 아니다.
어쩌면 이제까지 쌓아 온 정해성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성은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가장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 버릴 수 있다는 다짐은 진심이었으므로.
 
“사랑에 미치면 나라도 팔아먹는다더니.”
 
성혁은 혀를 끌끌 차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해성은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표실로 올라가는 층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마침내 조 대표가 있는 10층에 도착했다.
서서히 문이 열리자, 반짝거리는 복도가 눈앞에 보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한 발자국을 내디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에 멈추어 섰을 때, 성혁이 다시 한번 해성의 팔을 붙잡았다.
 
“마지막이다. 진짜 마지막이야. 그래도 할 거야? 진짜로?”
“내가 한다고 해 놓고 안 한 적 있어?”
“…없지. 그래, 없어. 그러니까 더 속이 터지지. 내가.”
“그만 말려도 돼. 난 마음 굳혔어.”
 
해성은 덤덤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의 인생이 뒤바뀔지도 모르고, 자신을 보는 시선 또한 달라질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그는 굳건했다.
대표실 앞까지 거침없이 걸어가던 그가 잠시 주저했다.
이유는 하나. 상의 없는 이 결정이 도형에게 또 한 번 상처가 될까 봐.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제 오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지.
결국, 다시금 마음을 굳힌 채 문을 두드렸다.
 
“정해성입니다.”
“들어와.”
 
고개를 젖힌 채 생각을 곱씹던 해성이 대표실로 들어갔다.
나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선, 나를 이루는 세계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입안에 남는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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