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대화는 잘하고 있을까요?”
걱정 어린 우태의 목소리에 성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잘하지 않을까요? 해성이도….”
말을 하려던 성혁이 숨을 참는다. 이걸 그냥 툭 뱉어도 되는 건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성혁의 모습에 우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입을 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마시던 우태가 탁! 소리 나게 맥주잔을 내려 뒀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말을 꺼냈다.
“도형이가 또 상처받을까 걱정입니다. 정해성 씨가 한두 번 그랬어야죠.”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성혁이 입을 벙끗거리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목으로 넘기는 느낌이 묵직하다.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말을 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토해 내듯 입을 달싹였다.
“해성이도 후회하고 있어요.”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는지, 우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해성에게 후회라니.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근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 녀석도… 후회하고 있어요 . 도형이한테 했던 행동, 말. 전부 다.”
“아니, 아니 잠깐.”
우태가 고개를 저으며 성혁의 말을 가로막았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말이었다.
“정해성 씨,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 같다던데?”
분명 도형에게 그렇게 들었으니까.
그런데 후회한다고? 도형에게 했던 행동, 말, 과거 자체를 모두 후회하고 있다고?
“그건 무슨 말이에요?”
더욱 놀라운 건, 성혁도 우태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는 점이다.
그게 말이나 되냐는 듯 당황하는 성혁의 표정에 우태 또한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해성이 누굴 좋아해요? 쟤가?”
하! 코웃음을 치던 성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앞에 놓인 치킨 한 조각을 포크로 푹 찔렀다.
“그래, 좋아한다고 할 순 있겠네. 김도형을.”
“…예?”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해성이 쟤, 이번 작품 시작하면서 내내 도형이 이야기만 했으니까.”
“이야기를 했다는 건… 설마.”
“네. 아마도 후회랑 직결되는 쪽으로.”
성혁의 대답에 우태가 놀란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체 도형은 뭘 보고 해성의 마음을 재단하게 된 걸까.
아니, 그것보다 해성이 갑작스럽게 후회를 하게 된 이유는 뭐지?
흥미진진한 상황임에도 걱정이 앞섰다. 또 도형이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떨치지 못한 걱정들을 곱씹으며 말없이 맥주로 목을 축였다.
***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퉁퉁 부은 눈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도형은 해성이 건네는 물티슈로 눈가를 꾹꾹 찍어 냈다.
“아직도 울어?”
“…아니요.”
“그런데 왜 고개를 안 들지.”
꼭 이런 건 캐치가 빠르다. 넌지시 묻는 해성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도형이 어렵게 한마디를 뱉었다.
“…싫어서요.”
“뭐가?”
“눈 부은 거 보여 주기 싫어서.”
“한두 번 보나?”
또, 괜히 찔렸고.
“괜찮아.”
이어지는 말엔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차피 한 번 터졌으니 두 번 터지는 건 어렵지 않다.
괜히 밀려오는 심통을 참지 못한 채, 해성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형은 왜 저한테 잘해 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도형의 머리를 만져 주려던 해성이 움찔거리며 제자리에 굳는다.
“어?”
“…제가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휘둥그레진 해성의 눈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이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이어진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자신이 도리어 묻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너 말고?”
당황해 또 한 번 묻자, 해성을 마주하는 도형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제가 왜 나와요?”
“너니까 네가 나오지. 누가 나와.”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던 도형과 해성은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해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대화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거 알지.”
“…그런 것 같아요.”
“처음부터 상세히 말해 봐. 무슨 말이야.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한층 누그러진 해성의 모습이 낯설다.
이런 모습을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제가 성인이 된 이후, 연예계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울 것 같은 기분에 다급히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손을 맞잡았다.
“…지난번에, 임하경 씨랑 같이 촬영할 때요.”
임하경이란 말에 해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도형아, 미안한데.”
혹시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걸까?
아직 알아가는 중이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찾아온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해성을 봤을 때, 도형은 깨달았다.
“…누군지 모르겠다.”
이건 진심이라는 사실을.
고뇌하는 듯 잔뜩 일그러진 진실의 미간만 봐도 알 것 같았으니까.
“…누구였지?”
입을 벙끗거리던 도형이 아, 짧게 탄식했다.
이럴 때 기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아니, 그보다는 민망해해야 할 일인가.
당연히 하경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해성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제가 오해한 것이 뻔한 상황이다.
잠시 생각을 곱씹던 도형이 핸드폰을 꺼내 SNS 화면을 열어 해성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이 사람.”
그리고 하경이 자신을 태그한 사진을 톡톡 가리켰다.
“형 동기로 나오는 사람이요.”
“…아, 이 사람.”
얼굴을 보여 주니 기억이 나는 듯했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기억하지 않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했는데.
도형이나 성혁이 매번 말하던 사실인데도 결국, 이렇게 까맣게 잊고 만다.
“그래. 이 사람이랑 촬영한 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도형은 귀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정말 이걸 말해도 괜찮은 걸까. 복잡해지는 머리를 다스리려 애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이….”
무슨 말로 이어 가야 할지 퍽 난감했다.
하지만 진상을 알기 위해서라면 해성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겠지.
결국, 입을 열어 쥐어짜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하경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하는 내내 자꾸 해성의 눈치를 보게 됐다.
곁에 앉아 도형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해성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헛웃음을 쳤다.
“정해성, 이빨 빠진 호랑이 다 됐네.”
“…그럼.”
“아니야.”
해성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왜 믿어. 물어만 봐도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물어봐요.”
말문이 턱 막혔다. 짧지만 굵직한, 반박거리를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으니까.
“헤어진 사람한테, 이제 서로의 앞길을 응원하는 사이가 되자고 했는데. 나는 이제… 형한테 아무 존재도 아닐 텐데.”
이유를 하나둘 털어놓는 도형의 눈이 꼭 물기로 축축이 젖는 것만 같았다.
제 착각일까. 아니면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손을 뻗어 도형의 한쪽 얼굴을 붙잡은 뒤 제 쪽으로 돌린다. 저를 향하게끔,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끔.
“네가 내게 아무 존재도 아닐 거라는 건.”
“…….”
다음 말이 분명 있을 텐데, 툭 뱉은 한마디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다.
해성의 손을 잡아 떼어 내려고 했는데, 이어지는 말로 도리어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반대이길 바란 건가.”
해성은 저를 마주하는 도형을 잠자코 응시했다.
휘둥그레지는 눈, 당황해서 달싹거리는 입술, 그러쥘 때 느껴지는 손끝의 힘. 흔들리는 숨결까지.
하나하나 모두 제 눈에 담은 채, 어렵게 다음 말을 뱉었다.
“내가… 착각한 거 아니지.”
숨이 덜컥 막힌다.
자신이 정해성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여기에서 인정하고야 만다.
유찬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감정의 울림을 정해성에게는 느끼고 있으니까.
그의 한마디, 눈빛 하나, 숨결 하나에 이토록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니까.
“아니면.”
도형이 숨을 삼켰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이어지는 해성의 목소리에 온몸으로 자잘하게 전율이 일었다.
“내가 오해해도 되는 부분인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인정하고 깨달아 버린 건 별개의 이야기다.
그가 받아들이는 건 둘째 치고, 저 또한 수긍해야만 했다.
어째서 해성이 제게 이런 행동을 하는지, 오해해도 되는 거냐 묻는 건지.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
“형, 대답할 거 남았어요.”
“…대답?”
갑작스럽게 샘솟은 용기 하나가 도형을 움직였다.
“나한테 왜 잘해 주는 건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
해성은 그 물음에 당황하고 말았다. 흘려들은 줄 알았더니,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 솔직하게 말하자는 것.
지금 자신의 마음과, 어째서 도형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까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것 같더라고.”
제대로 전해 본 적 없는 진심은 언제나 장황해지기 마련이다.
줄줄이 늘어놓는 말이 제대로 전해지길 바라지만, 이럴 땐 말솜씨가 서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네가 해 주던 것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
“너를 위함이라는 말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짓밟았는지.”
도형이 고개를 숙였다.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었다.
들어야 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게 될까 봐. 제 손을 꽉 맞잡는다.
파도에 쓸려 가거나, 깊이도 알 수 없는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그래서… 후회한 거예요?”
“아니, 이유 중 하나일 뿐이야.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그게 뭔데요? 의문 가득한 눈으로 해성을 바라본다.
대답이 기대되는 걸 보면, 김도형도 아직 멀었다.
정해성에게 벗어나려던 이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 절절히 깨닫게 된다.
“나는 너를 놓친 적이 없더라.”
도형이 아랫입술을 힘껏 짓씹는다.
그의 대답을 후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단 한 번도, 너를 잡은 적이 없었으니까. 힘껏 붙잡고 있었더라면, 네가 내 곁을 떠날 일도 없었을 텐데. 잡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놓아줬다고 생각하다니. 웃기잖아. 오만한 거고.”
해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네가 놓친 거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수많은 생각을 곱씹었다.
저 또한 도형을 놓쳤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놓친 게 아니라, 잡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붙잡아 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포기한 것처럼 생각한 과거를… 죽도록 후회했어.”
진심일까. 이건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믿어 줄 수 있을까.”
단박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도형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해성을 바라보다가, 급하게 눈을 피할 뿐.
두서없이 말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상황이 되니 생각으로만 곱씹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내가 어떻게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