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The And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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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를 마치고 온 그날 밤.
기분이 미묘했다. 해성의 짐은 진작 들어와 있었으니, 도형의 짐만 들어온다면 더욱 안정적이고 완벽해질 거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손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잠이 안 와?”
“그러는 형은요, 잠이 안 와요?”
“응.”
“왜요?”
 
몸을 옆으로 돌려 해성을 마주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이런 어둠 속에서마저 해성의 모습만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떨려서.”
“새삼스럽게?”
“응. 새삼스럽게. 도형이 너랑, 또 이런 나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떨리고, 새롭고, 행복하고, 벅차서.”
 
원래 이렇게 표현이 적나라한 사람이었나.
이전의 해성을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이미 현재의 해성에게 파묻힌 지 오래다.
그를 한참 바라보던 도형이 해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인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혹 싫어하진 않을까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소원이 있는데.”
“응. 뭔데?”
 
말을 꺼내는 게 어렵다. 이게 뭐라고, 당연히 요구할 수도 있는 건데.
아니,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도형아.”
 
해성의 부름에 슬쩍 몸을 떼어 낸 도형이 그와 눈을 마주한다.
 
“각인…해 줘요.”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건 해성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 뜻을 알고나 이러는 건지. 복잡해지는 머리를 다잡고 그의 어깨를 힘껏 그러쥐었다.
 
“그거, 무슨 뜻인지 알지.”
“응. 알아.”
“…각인하고 나면, 그 뒤도 알고 있고?”
“나 바보 아니에요. 어린애도 아니고.”
 
좀처럼 꺾이지 않을 의지였다.
제 어깨에 닿은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도 수차례 고민했어요. 왜 형은, 내게 각인을 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우리는… 짝이 되지 않는 걸까.”
“…그건.”
“알아요. 언제든 날 놓아줄 셈으로 그랬다는 거. 그리고… 나 역시, 형의 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형, 나는…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내 짝은 형이 맞아요. 그렇게 느꼈으니까. 설명할 수 없지만-”
 
도형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해성이 단번에 그의 위로 올라탔다.
말을 듣기나 한 건지, 그의 눈빛은 어느새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너만 느낀 거 아니야.”
“…네?”
“너와 짝이라는 사실. 나도 느꼈어. 그날, 내가 너를 붙잡았던 그 밤에.”
 
도형의 눈이 촉촉해졌다.
저 혼자만 느낀 게 아니라는 사실에, 그와의 미래를 믿고 나아가도 된다는 현실에 가슴이 뭉근해졌다.
 
“오늘 각인하면, 나한테서 못 도망가.”
“그렇게 속박당하길 원했다면요?”
 
뒤이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한껏 달뜬 도형의 페로몬이었다.
천천히 퍼져 나가 해성의 신경을 자극한다. 코 아래에서 맴돌던 향을 듬뿍 들이마셨을 때, 해성의 묵직한 페로몬이 도형의 몸을 조여 왔다.
 
“해성이 형.”
 
두 팔을 뻗은 도형이 해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술을 포갰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떼어 냈다.
 
“어디든 도망갈 수 없게 만들어 줘요.”
 
스스로 목줄을 매겠노라 다가오는 오메가를 뿌리칠 수 있는 알파는 없다.
목을 내어 주고, 그곳에 각인을 남겨 달라 말하는 도형을 어떻게 밀어낸단 말인가.
저 또한 도형이 곁에 남아 도망갈 수 없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해성은 탄식에 가까운 숨을 낮게 터트리며 도형의 옷자락을 말아 올렸다.
발끝부터 들끓는 열기를 곱씹으며, 제 몸 구석구석에 피어오르는 열꽃을 받아들이며.
도형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오메가가 되는 밤이라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해성이 전하는 열기를 오롯이 받아 내기로 했다.
달님마저도 구름에 숨어 버린 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결합을 축하하는 별님만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
 
***
 
두 사람의 결혼식은 햇볕이 따뜻한 어느 오후, 그들이 따로 섭외한 야외 결혼식장에서 진행되었다.
주변에 가드들을 세워 기자들의 출입을 막았다. 오직 초대받은 소수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은 저마다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배우나 업계 관계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례는 나태석 감독의 몫이 됐다. 두 사람의 시작과 끝, 그리고 또 다른 시작까지 함께 봐 준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이 입장하는 순간엔, <별을 담은 잔>을 함께한 동료들이 일렬로 서서 꽃을 뿌려 주었다.
앞으로 가는 길엔 꽃만 울창하게 피어 있기를, 더는 에둘러 가며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 감독 앞에 섰을 때, 그는 시큰해지는 눈시울을 꾹 누르고 덤덤하게 주례를 이어 갔다.
 
“우리는 지금. 배우 정해성과 배우 김도형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둘이 되고자 이 앞에 선 정해성 씨와 김도형 씨를 보고 있습니다.”
 
나 감독의 주례를 듣던 해성이 흐뭇하게 웃으며 도형을 힐긋거렸다.
도형 역시 해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똑같이 맞춘 새하얀 턱시도가 쏟아지는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긴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둘은 이미 많은 고난을 거쳤고, 각자의 산을 넘어 돌고 돌아 다시 만났으니까요. 아마… 지금처럼 해가 쨍쨍한 하늘보다, 고즈넉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날이 더욱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또한, 배움이겠죠.”
 
도형과 해성은 팔짱을 낀 채로 손을 꽉 맞잡았다.
나 감독을 마주하는 그들의 눈이 어느새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인생에 있어 배움은 떼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일을 거쳐 가며 배웁니다. 첫 걸음마, 옹알이. 그로부터 시작된 배움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두 사람처럼 말이에요.”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해성은 도형을 통해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도형은 해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서로에게서 얻어 낸 것으로 다시금 손을 맞잡은 이 순간이, 벅차고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모쪼록 갈라져 보낸 시간동안 얻은 것들을 토대로, 영영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영원이란 덧없는 단어라지만, 덧없음을 꽉 채울 만큼 두 사람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힘든 시간마저도 서로 의지하며 버텨 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원합니다.”
 
나 감독의 주례사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도형의 모친은 연신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는데, 그보다 더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건 우태 쪽이었다.
 
“도형, 도형이. 꼭, 흑… 꼭, 행복해야 하는데.”
 
누군가 본다면, 우태가 도형을 낳았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윤 대표가 등을 찰싹, 두드릴 정도였다.
이어지는 결혼식은 평범했다.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부모님에게 절을 하고. 딱 하나, 특이한 게 있었다면 축가를 생략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반지 교환식이 있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도 실장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자, 해성과 도형이 서로를 마주했다.
 
“계속 똑같은 말이라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해성은 머쓱하게 말하며 손에 쥔 반지를 도형의 손끝에 살짝 걸쳐 두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렇게 반지를 끼워 주는 건, 너 아니면 안 돼. 도형아.”
 
그리고 해성이 반지를 끼워 준다.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언젠가 미리 받았던 반지를 가만히 보던 도형이 숨을 꾹 참는다.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그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
도형은 벅찬 마음을 미소로 중화하며 저 또한, 반지를 꼭 쥐었다가 해성의 손가락 끝에 살짝 걸쳐 주었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 그리고 나도, 영원을 약속하는 건 형 아니면 안 돼요.”
 
해성은 도형이 끼워 주는 반지를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그러곤 성혁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대로 도형의 허리를 휘어 감아 입술을 맞댔다.
 
“신랑 화끈하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야유에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입술을 맞대고, 숨을 섞으며 오늘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누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얼굴이 떨어졌을 때, 성혁이 한숨을 탁 터트리며 다시 마이크에 가까이 다가갔다.
 
“예, 아주 화끈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신랑 정해성 씨와, 신랑 김도형 씨에게 커다란 박수 부탁드립니다! 행복해라, 해성아!”
 
저게 무슨 사회야. 중얼거리던 해성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을 들었다.
둘은 팔짱을 낀 채 새빨간 버진 로드를 걸었다. 손님들의 갈채가 그들의 양 옆에서 쏟아졌다.
 
“행복하세요!”
“행복해라, 이젠 헤어지지 말고!”
“이혼 두 번은 허락 못 해!”
 
진심 어린 축하들이 쏟아질 때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폈다.
도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제 손님석에 앉은 유찬을 발견했다.
해외 스케줄이 끝나는 대로 바로 달려온다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올려 주었다.
단순한 제스처였으나, 도형은 그 뜻을 단박에 알아챘다.
고마워. 입모양으로 전하는 진심에 유찬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답했다.
 
“결혼식 도중에 딴 남자를 보면 쓰나.”
 
그때, 곁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옆을 살짝 돌아보니, 어느새 버진 로드 끝에 다다른 해성이 도형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기에, 도형은 괜히 그를 흘겨보며 팔짱을 낀 채로 손을 힘껏 맞잡아 주었다.
 
“미안하지만, 딴 남자가 아니라 친구거든요.”
“어쨌든 남자는 남자지.”
“이상하다. 나는 정해성 말고는 남자로 안 보이는데.”
“정말?”
“그럼, 정말. 그러니까 여기, 여기에 잇자국도 도장처럼 남겼지.”
 
제 목 뒤를 톡톡 두드리는 모습이 그저 앙큼할 뿐이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 웃으며 자신들이 걸어온 버진 로드를 돌아보았다. 양옆으로 저들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다가 다시금 눈을 마주한다.
멀리 돌아온 길은 결국 정해성과 김도형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게 만들었다.
붉은 실은 끊어지지 않았고, 그들을 이루는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기에.
 
“사랑해. 지금보다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서로를 향한 애정을 다시금 곱씹으며 마음에 새겨 두었다.
해성은 도형을 번쩍 안아 든 채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환호를 배경으로,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약속을 몇 번이고 전하며.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위한 슬레이트가 닫히는 순간이었다.
 
 
< 슬레이트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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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 güncelleme: Mar 1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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