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유찬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어 지킬 수 있게 해 달라. 그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도 솔직하지 못한 모습일 테고.
유찬에게 안긴 채 눈만 끔뻑거리던 도형이 그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이거, 고백이지?’
심장이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리가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이제껏 유찬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도, 그런 사이가 되리라고 예감한 적도 없으니까.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걸 당연하게 여기진 않지만, 고마운 마음은 여전해. 그래도 나는….’
그의 감정이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그때, 자신의 몸이 유찬과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얼굴을 마주하면 어색해질 것 같았다. 고백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니까.
상대에게 마음을 전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눈빛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지. 제 인생에서 저를 향한 고백이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에,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진지한 표정이라면 그 나름대로 머리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 것 같고. 장난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혼란스러울 것 같았는데.
“…진심이야.”
유찬의 얼굴은 상상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나도 지금에야 깨달았고.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아무 대답도 하지 마. 그냥, 듣기만 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한곳에 멈춰 있지 못하는 눈동자가 사방을 살피는 게 보였다.
하아, 크게 한숨을 뱉던 유찬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오른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왜 하필 이 순간에, 멋대가리 없게.”
도형은 자리에 주저앉는 유찬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미안, 너도 당황했겠다.”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면서도 침묵은 계속됐다. 이 상황에서도 저를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여러 가지 감상이 밀려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백을 받은 순간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저 또한 사람이니까. 좋아한다는 말이 가져다주는 울림은 모두에게 비슷할 것이다.
다만, 당장 유찬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 설렘은 고백이라는 그 단순한 절차에서 비롯된 것이지, 유찬을 향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한참 생각하던 도형은 유찬의 앞에 마주앉아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저를 바라보지 않는다.
팔 안쪽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
“유찬아.”
“너 못 봐. 이런 얼굴을 어떻게 보여 줘.”
생각보다 제법 귀여웠는데, 그 생각을 하다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손을 뻗을 듯 말듯 어색하게 움직이던 그때.
핸드폰이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잠깐만….”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핑계일 것 같아서.
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희망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지우드]
발신자가 하필이면 우태일 게 뭐람.
‘이러고 있는 거 들키기라도 하면….’
우태가 얼마나 놀라고 걱정할지 불 보듯 뻔했다.
걸려 오는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끊지도 못할 때.
“김도형, 얘는 어디 있길래 전화도 안 받고.”
투덜거리는 우태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아주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었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꼭 들켜서는 안 될 상황에 처한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어쩌지,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에 비해 도형의 고민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눈을 힘껏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급하게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지금 우태 형도 나 찾고 있고… 나한테 생각할 시간 좀 줄 수 있어?”
얼마나 당황한 건지, 말이 빨라지고 말았다.
최유찬을 대하는 김도형답지 않게.
긍정이냐 부정이냐, 유찬의 대답만을 기다리며 초조함에 입술만 꾹 깨물고 있던 그 순간.
잠시 끊어지나 싶었던 전화가 다시 걸려 온다.
‘미치겠네.’
진동 소리가 꼭 타임 리밋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어질 때쯤.
고개도 들지 못한 유찬이 손을 죽 뻗었다.
따듯한 온기가 종아리에 두어 번 닿더니, 더듬더듬 무릎을 향해 올라온다. 소중하게 감싸 쥐듯 천천히 움직이는 손끝이 어찌나 간지러운지, 도형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해성에게서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각이다.
고작 손끝에서 오는 간질거림일 뿐인데, 숨이 막힐 것 같은 떨림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주저앉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유찬의 손이 제 손과 맞닿은 순간, 도형은 숨을 참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줄 모르는 건 유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가만히 멈추어 있더니, 손끝을 세워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감각이 지워지기도 전에 검지를 뻗어 도형의 검지에 살며시 걸었다.
걸쇠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얼마나?”
“어?”
“…얼마나 필요한데?”
간신히 뱉은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속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손가락을 걸고 있을 뿐인데도 전해지는 열기가 적나라했다. 침착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눈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얼마나 필요하다고 해야 하지? 그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게, 그러니까.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손에서 진동을 일으키는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의심을 살 수 있다.
결국, 도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찬의 손을 놓았다.
“이, 이따가 이야기해. 알았지? 나 먼저 나간다!”
변명으로 뱉기에는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도형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채 식히지도 못한 채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쾅! 문이 닫히기 무섭게 손을 들었다.
“형, 나 여기 있어.”
유찬이 문 너머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꼭,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얼굴이 왜 이렇게 벌겋냐?”
의아하게 묻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이 깜짝 놀라 고개를 크게 저었다.
이러다 유찬이 듣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당황해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야. 무슨 얼굴이 벌겋대.”
“맞는데 뭘. 너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아.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어, 없었어! 빨리, 빨리 가자. 촬영은 누구부터 하는데?”
“아닌데, 벌겋잖아… 야, 도형아. 아 잠깐만! 도형아!”
뒤따라오는 우태의 부름에도 도형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식히기 바쁠 뿐.
***
이후, 도형은 민 실장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화장을 수정해야만 했다.
어디서 이렇게 열이 올랐냐, 화장이 뜰 것 같다, 눈 화장은 왜 번졌냐는 둥.
하지만 쏟아지는 잔소리에도 머리는 꼭 구름처럼 붕 떠올라 있었다.
해성과의 대화로 얼이 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것도, 미련하다는 그의 말에 숨이 턱 막혔던 것도 맞다.
그런데 유찬이 던진 한마디로 직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먼지처럼 휙 날아가 버렸다. 도형에게 남은 건 당혹감과 민망함, 좋아한다는 고백에서 온 설렘. 딱 그뿐이었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괜히 곱씹어서 또 들뜨지 말자. 스스로를 다잡으며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을 때.
“유찬 씨도 메이크업 끝났어?”
민 실장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다시 한번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타이밍 한번 좋지.
“네, 다른 분들도 끝나지 않았어요?”
꼭 유찬의 목소리가 저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백을 받은 것뿐인데, 말 한마디와 시선 하나하나 모두 제게 닿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단순히 제 생각일 뿐이라고, 너무 앞서가지 말자 다짐했지만.
“다 끝났지. 그런데 유찬 씨, 도형 씨를 왜 그렇게 봐? 하긴, 오늘 메이크업 잘되긴 했어. 그치?”
민 실장의 한마디에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얼굴조차 괜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잘 보이고 싶다거나, 괜찮아 보였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동요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날까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누군가 옆에 털썩 앉는 게 느껴졌다. 오른쪽으로 바짝 다가오는 온기에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러게요. 오늘 메이크업 되게 잘됐네요.”
바로 옆에서 들리는 유찬의 목소리에 흠,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평소처럼 웃으며 간지러우니 떨어져라 말을 할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렇게 의식을 해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건지.
얼굴을 스치는 브러쉬의 감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우태가 저를 찾아와 데려가기를, 촬영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그 채근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뿐.
“자, 이제 됐다. 눈 떠도 돼, 도형 씨.”
민 실장의 말이 원망스럽게 들렸던 건 처음인 것 같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천천히 눈을 떴지만, 어쩐지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고는 냅다 도망쳤던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김도형.”
잠시간의 정적 끝에, 유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이 전해지는 목소리에 놀란 도형이 옆을 슬쩍 돌아봤다.
“너 아까 얼굴 빨개졌다며?”
뭐야, 다 들었어? 하긴,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말했는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저를 마주하는 유찬의 모습이 괜히 얄미웠다.
아까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더니, 이제는 능글맞게 웃기까지 했으니까.
어떤 모습이 진짜야? 묻고 싶었지만 결국,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거든. 그냥, 더워서 그랬어.”
담담하게 대답하는 도형의 모습에 유찬은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 시간, 도형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애써 그어 둔 선을 넘어 멋없게 고백을 한 지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제 등을 떠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가가고 싶다. 만지고 싶고,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 도형이 찾는 사람이 더 이상 정해성이 아닌, 최유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친한 친구, 각별한 동기. 그 틀을 간신히 지켜 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틀이 무너져 내린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감정임을 인정했다.
도형을 가만히 쳐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푹푹 찔리는 오묘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준비 끝났으면 이동하지.”
이어지는 말에 도형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는다.
삐딱하게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해성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 모습에 괜히 숨이 턱 막힌다.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을까. 어떤 말부터 듣고 있던 걸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머리에 맴돌았다.
“다른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이나 봅니다. 김도형 씨, 최유찬 씨.”
그의 건조한 목소리에도 유찬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도형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도형아. 우태 형은 차 빼러 갔어.”
“어? 어어, 가자.”
도형은 저도 모르게 유찬을 따라가게 됐다. 마침표를 선언한 해성보다 차라리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유찬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유찬과 함께 해성의 앞을 지나치던 그때였다.
“…들러붙지 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지만, 도형의 눈에 해성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반듯하게 잘 넘긴 뒷머리만이 보일 뿐.
‘…누구한테 한 말이야?’
던지지 못한 질문만이 속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