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미련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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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다른 게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해성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담담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도형과 함께 떠오르는 건, 제작 발표회에서 대답하던 유찬의 모습이었다.
 
‘김도형 씨와 관련된 질문에 대한 건… 답을 드릴 수 없겠네요. 공적인 이야기를 논하는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논한다면, 오늘의 제작 발표회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도형에게 정말 아무 마음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부정할 수 있었겠지. 친구 사이일 뿐이니 억측은 그만두라고. 괜한 스캔들로 곤란한 일이 벌어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정도 판단은 가능한 나이고, 연차였다. 별 뜻 없는 말 한마디에도 흔들리는 것이 이 바닥의 입지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쯤 채워진 위스키를 가만히 내려 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아 반짝거리는 서울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도형과 헤어진 직후 다급히 알아본 집치고는 퍽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실이지만,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는 불빛을 볼 때면 괜히 머리가 소란스러워진다.
그러한 순간에 푹 파묻혀 있노라면, 어떠한 잡념도 더 떠오르지 않고 가라앉기 마련인데.
 
‘그게 정해성 씨와 무슨 상관입니까?’
 
자꾸만 도형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제가 최유찬 씨와 무슨 사이라고 한들, 정해성 씨가 신경 쓸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미 끝난 사이이고, 자신이 떠나게끔 만든 사람이 아닌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맞지 않는 사이이니 여기까지 온 것일 텐데.
어째서 다 끝난 마당에 도형의 모든 것들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걸까. 그것도 최유찬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이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사람 붙잡지 말아 주세요.’
 
아니, 신경이 쓰이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도형이 제게 냉정해졌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차오른 감정들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래,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도 이렇게 냉담한 표정으로 저를 밀어내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한참 상념에 빠져 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얼마나 웃기고 오만한 모습인가.
홧홧한 속을 달래려, 차디찬 위스키를 꿀꺽꿀꺽 삼켜 버렸다.
탁! 유리 테이블이 깨질 기세로 세게 유리잔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 몸을 눕히듯 기댔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온 거냐. 정해성.”
 
언젠가, 기억에도 없는 누군가가 제게 남긴 말이 떠올랐다.
 
‘너, 그렇게 살다간 영영 혼자 살 거야. 누구도 못 버틸걸?’
 
표독스러운 표정과 설움에 찬 목소리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의 정해성이 얼마나 무심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날이 선 목소리에도 모든 것들을 까맣게 잊은 걸 보면 말이다.
도형. 김도형. 이전에는 입에 담는 게 더 어색했던 그 이름이, 오늘따라 집요하게 입술 안쪽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
 
이틀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스케줄을 해치우면서도 유찬의 관심은 오롯이 도형에게 향해 있었다.
어딜 가든 도형을 찾았다. <별을 담은 잔>으로 슬슬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어디서든 마주치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야속하게도 도형과 마주치는 스케줄은 없었다.
투덜거리는 그에게 매니저가 뭐라고 했더라.
 
‘대본 리딩이나 드라마 촬영이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 도형이를 너처럼 부르지는 않을 거야.’
 
그래, 그랬다.
도형을 부르기엔 아직 제대로 드러난 게 없고, 그의 소속사 역시 도형의 소식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스케줄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오롯이 배우의 판단만으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이 바닥의 섭리였으니까.
하루빨리 도형의 소속사가 여기저기 스케줄을 잡아, 저와 마주치는 빈도가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촬영에 들어가면 마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우 도형과 마주할 수 있는, 포스터를 촬영하는 날이 다가왔다. 발 빠르게 샵에 먼저 가서 그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기가 막히게 오전 인터뷰 스케줄이 잡혔다.
하필이면 새벽부터 시작해 아침이나 되어야 끝이 나는 일정이었다.
우태에게 물어보니 도형은 새벽부터 샵에 가서 미리 메이크업을 받는다고 했다. 초조한 마음에, 인터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형, 빨리. 빨리 가자.”
“대체 왜 이래? 누가 보면 너 진짜 도형이 좋아하는 줄 알겠어. 걔 어디 도망 안 가.”
“정해성이 같이 있잖아. 또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빨리.”
 
채근하는 그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좋아하는 줄 알겠다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지 제작 발표회 때 유찬이 툭 뱉은 발언은 그 어디에도 기사로 실리지 않았다. 기자들 또한, 이슈화를 할 정도로 특별한 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테고.
물론, 그만큼 유찬의 소속사가 힘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히 척을 지고 적으로 만들어 좋을 게 하나 없는 대형 소속사.
차라리 다행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을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샵에 도착하기 무섭게 차에서 내린 유찬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스케줄 때문에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한 상태이지만, 아직 도형이 끝나지 않았다면 나란히 앉아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싶었다.
 
“원장님, 오랜만이에요.”
“어머, 유찬이 왜 이렇게 뜸했어? 설마, 우리 샵보다 더 좋은 곳 찾았다, 뭐 그런 서운한 소리 아니지?”
“에이, 그럴 리가요. 메이크업 팀이 좀 더 충원되기도 했고. 들렀다가 움직일 시간이 나야죠. 앞으로 자주 올게요.”
“그래, 어차피 나 감독님 작품 내내 우리가 서포트하잖아. 그거 말고도 자주 보면 더 좋겠지만. 응?”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원장의 모습에 유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샵을 두어 번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되물었다.
 
“도형이는요?”
“아… 도형 씨?”
 
짧은 대답과 함께 원장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진다. 뭔가 일이 있구나 직감한 유찬이 휙 돌아 끝 방을 가리켰다.
 
“저기 맞죠? 도형이가 매번 메이크업 받던 곳.”
“으응, 맞긴 맞는데. 잠깐, 잠깐 유찬 씨!”
 
다급히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밀려드는 불안감을 억지로 집어삼킨 뒤, 메이크업 룸으로 가까이 걸어갔을 때.
 
“좋아 보여. 예전과 다르게.”
 
해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당장에라도 들어가 도형을 끌고 나오면 좋을 텐데. 여기서 자신이 끼어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일단 지켜보는 게 맞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에 속이 갑갑해졌다. 민 실장과 매니저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그 순간에도 유찬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 이야기했다.
도형이 나온다고 해도, 마주하는 건 저 하나뿐인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 집에서 지내나?”
“…위자료니까요. 직접 그 집을 처분해 나갈 때까지는 있어야죠.”
“미련하구나.”
 
하마터면 그대로 방에 쳐들어갈 뻔했다. 당신이 뭘 아냐고, 그간의 김도형을 본 적이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를 힐난하고 비난하는 자신을 상상하다가, 그보다 더 절망하는 도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너졌던 시절의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해성이 알아주길 바란 것 또한 아닐 테니까. 앞서가려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 자리를 지켰다.
참자, 참아야 한다. 수없이 자신을 다스리던 그쯤.
 
“너무 잘 지내서 탈이고, 좋지 않을 이유도 없어요. 다시는 이렇게 사적으로 알은척,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해성 씨.”
 
도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도형이 문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피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날 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옆방으로 들어갈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모든 건 이내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방에서 빠져나온 도형의 얼굴이 벌겋게 올라와 있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본 순간, 켜켜이 쌓은 생각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다소 충동적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유찬은 도형의 손목을 붙잡은 채, 비어 있는 옆방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최유찬.”
 
이어지는 도형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는 게 못 견디게 힘들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은 채 도형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등에 닿은 문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성을 잃고 페로몬을 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페로몬 조절에 능숙한 편이었지만, 유독 감정이 널뛰기 시작하면 주먹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게 페로몬이었다.
더더군다나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가능성이 더 높다.
 
“유찬아. 왜 이러는 거야, 최유찬.”
 
품에 안긴 도형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등에 닿지도, 제게서 떨어지지도 못한다. 그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떨림만이 느껴질 뿐.
유찬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왜 이런 행동을 한 걸까.
어째서 도형이 우는 것 같은 모습에 손이 먼저 나가고,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던 건가.
친구 사이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감정이라지만, 해성을 향한 분노나 도형을 향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끓어오를 만한 충동이 아닐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이 단숨에 뚝 끊어지고 만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있었으나, 가슴을 절절 끓게 만드는 열기는 그대로였으니까.
애틋함과 속상한 마음이 뒤엉켜 제멋대로 입을 열게 만든다.
 
“네게… 해 줘.”
“뭐? 잘 안 들려. 이것 좀 놓고 말해.”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도형을 더욱 힘껏 끌어안는다. 팔 안으로 스며드는 그의 체온에 턱 언저리가 절절 끓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말을 입에 담았다.
도형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부디 자신의 마음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기를 바라며.
 
“네게…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해 줘. 내가 널, 지킬 수 있게 해 줘. 도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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