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깨닫게 되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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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당분간 도형의 촬영분에 유찬이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스케줄을 짜 준 FD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대본을 써 준 작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어쨌든, 덕분에 촬영을 하는 내내 조금은 가볍고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도형 씨!”
 
뒷마무리를 하고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던 그때, 나 감독이 도형을 불렀다.
 
“아,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도형의 모습에 나 감독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도형에게 물었다.
 
“내일부터 지방 촬영인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그… 조금, 불편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안 불편해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는 편하겠죠.”
 
활짝 웃는 도형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 감독은 씁쓸하게 미소를 끌어 올릴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줄 뿐.
모두에게 인사를 마친 도형이 저만치에서 저를 기다리는 우태에게 다가갔다.
 
“잘했냐?”
 
웃으며 저를 반기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했지. 내가 누군데.”
“속 썩이는 김도형.”
“아니지, 일 잘하는 김도형.”
 
너스레를 떠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형이 앉는 걸 확인한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바로 시동을 거는 게 아니라, 잠시 생각에 잠긴다.
 
“도형아.”
 
핸드폰을 확인하던 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응?”
“…혹시.”
“혹시?”
“요즘 누가 널 찍는다거나, 지켜본다거나 하는 느낌 없었어?”
 
누가 자신을 찍는다거나 지켜본다.
딱히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제가 아닌 다른 배우도 느꼈어야 옳다.
애초에 요즘은 촬영장 아니면 집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다 문득, 하경과 함께 백화점을 갔던 날이 떠올랐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다가 그대로 속에 삼키고 말았다.
 
“갑자기 왜?”
 
머뭇거리던 우태는 탄식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한테 전화 왔어. 엔드패치에서 너, 열애설 터트리겠다고 했다더라.”
 
열애설. 한마디에 도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머릿속으로 천둥이 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큰 소리가 나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더니, 이내 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니, 진정하자. 도형은 핸드폰을 주우며 심호흡을 했다.
백화점에서 느꼈던 그 시선이 엔드패치였던 걸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고 불편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유찬이 쫓아갔을 땐, 아무도 없었다고 했는데.
 
“짚이는 거 있어?”
 
우태의 물음에 한 차례 숨을 삼키게 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꾼다. 숨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고, 덮어 둔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니까.
 
“형, 사실….”
 
사실대로 말하자. 상황을 알리고 나면, 소속사에서도 마땅한 대응책을 준비해 두겠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속이 답답해졌다. 어째서 이토록 다사다난할까. 연기에만 몰두하며 안온한 하루를 보낼 수는 없는 건가.
마음속에는 어느새 야속함만 남아 도형을 벅벅 긁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털어 둘 수는 없었다.
 
***
 
도형의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우태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사측에서 해결할 문제이니, 당장은 드라마에 집중하라며 격려 아닌 격려도 덧붙였지.
하지만 일이 닥쳤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마음을 놓는 건 쉽지 않다. 집으로 돌아와 푹 쉬어야 하는 시간인데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밖에 있는 누군가 일거수일투족 자신을 감시할 것만 같았다.
 
‘김도형 씨! 현재 심경에 대해서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A 스토리에서 나왔습니다. 정해성 씨와 이혼 건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정해성 씨를 발판 삼아 유명세를 노렸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해성과 헤어진 직후 있던 일들이었다.
어딜 나가든 질문하는 사람들이 쏟아졌다. 몇 번이나 거절하고 선을 그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깊이 자리 잡은 기억과 경험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언제고 재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더더욱.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얼굴을 파묻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쏟아지면 좋으련만. 아무리 눈을 감고, 양을 몇 마리씩 세어 봐도 나아지지 않는다.
 
“…추워.”
 
냉기조차 없는데 온몸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몸을 더 웅크리는데,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잘 때에는 진동마저도 꺼 두는 편이라 누가 연락을 해도 받지 못하는 일이 태반인데. 운이 좋네. 괜히 으스대듯 말하며 핸드폰을 집었다.
누가 연락했을까. 유찬이? 그게 아니면, 우태인가. 하여간 두 사람 모두 걱정이 많다.
괜찮다고 대답해 줘야지 생각하며 잠금을 해제했는데, 뜻밖의 인물이 보낸 메시지에 당황하고 말았다.
 
정해성
 
자고 있습니까? 
 
 
해성이었다. 왜 이럴 때마다 제게 손을 내미는 걸까.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게 야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상이 들었다.
어디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게 아니라면 약해지는 순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낼 리 없지.
 
정해성
 
소식, 들었습니다. 엔드패치. 
 
 
이어지는 메시지 한 통에 도형이 핸드폰을 힘껏 쥐었다.
 
정해성
 
지 매니저가 한 말은 아니고, 윤 대표님이 우리 회사로 연락을 줬더라고. 
 
 
답장은 한 통도 하지 않는데,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오는 게 꼭 지난날 제 모습 같았다.
대답 한번 없던 해성의 옆에서 조잘거리던 자신의 모습. 뒤바뀐 이 상황이 낯설지만,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정해성
 
회사 측에서도 충분히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요즘 이렇게 말을 늘어놓는 일이 잦은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과거의 제 모습을 모르는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와서.
 
정해성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김도형과 친해지고 싶다고.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겠거니 했는데, 연달아 도착한 메시지가 도형의 생각을 뒤엎었다.
 
정해성
 
아니요. 
같이 있어 주고 싶은 마음 대신입니다. 
 
 
도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혹시 잘못 본 건 아닌지, 두 눈을 비비면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해성의 이름이 찍힌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선배?”
[그거 말고, 예전처럼 불러 주면 안 됩니까. 우리 지금은 일하는 중 아닌데.]
“…하지만-”
[듣고 싶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이건 반칙이지. 약해지는 순간을 찌르고 들어와 이런 말을 하는 건.
잠시 머뭇거리던 도형이 손톱을 톡, 깨물며 입을 열었다.
 
“해성이 형.”
[불안해서 못 자고 있는 건가.]
“…조금. 그러네요.”
[…….]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뱉는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던 그 찰나.
 
[잠시만 창문 좀 열어 볼래?]
 
해성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달이 예쁘게 떴나. 아니면 별이라도 반짝이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 기분 전환을 위함이라면야.
도형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가까이 걸어갔다. 닫힌 창문을 살짝 열었을 때, 빵! 짧은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아래.]
 
이어지는 해성의 목소리에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비상등을 깜빡거리는 그의 차가 보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못 자고 있을 것 같아서.]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도형의 물음에 해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뚜렷하지 않지만, 머리를 긁적거린다거나 핸들을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다.
 
“형.”
[예전에 이혼하고, 걱정… 걱정이 돼서.]
 
귓가에 붙인 핸드폰을 꼭 쥔다.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를 붙잡아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내려갈 용기는 없다.
그러다 누구라도 만난다면. 단순한 열애설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와 본 적이 있었어. 여기, 이 자리에.]
“그때도 나는… 못 자고 있었어요?”
[그랬었지. 방에 불빛이 새던데. 무드등이던가.]
“맞아요. 내 생일에 선물 받은 거요.”
[기억나. 달 모양이었지.]
 
기억하고 있구나. 저에 관한 건 아예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관심이라는 건 제게 허용되지 않는 말이라고 여겼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도형이 창틀에 팔을 올린 채 얼굴을 기댔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지켜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지켜본다고? 도형이 고개를 돌려 골목의 양 끝을 보자 귓가로 해성의 옅은 웃음이 들렸다.
 
[파파라치들. 서성거린다 하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수 있잖아.]
“괜찮아요.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이제까지 해성의 모습과 사뭇 달랐기에, 도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저 아래에 있는 해성을 바라보는데, 짧은 한숨이 들렸다.
 
[안 될까?]
“…하지만.”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도형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아래를 바라볼 뿐이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 또렷한 시선만큼은 명확하게 와 닿아서.
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닫고,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그냥 돌아가라고 말하는 게 저다운 모습일 텐데.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해성이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잘 때까지만요. 제가 잠들 때까지만.”
 
해성은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어.]
 
이어지는 해성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도형은 아무 말 없이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이전처럼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신기한 일이다. 해성의 숨소리를 듣고, 자신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것뿐인데 이토록 마음이 편안해진다니.
아니, 사실 이 또한 기억에 있는 일이지. 오래전, 결혼 생활을 할 땐 그랬으니까. 다른 게 아닌, 해성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과 위안을 찾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과거를 상기하니 다시 목 끝이 아릿해졌다. 고개를 가로젓고, 핸드폰을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 두었다.
막상 눕긴 했는데, 바로 잠이 쏟아지지 않는다. 몇 번 뒤척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리고, 쥐고, 발을 바르작거린다.
 
[얼른 자. 뒤척거리지 말고.]
 
해성의 말에 도형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한마디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 하품을 하며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형.”
[응.]
“…고마워요.”
 
할 말은 많았다. 이전에도 이런 당신을 바랐다는 말. 왜 이제야 저를 이토록 챙겨 주냐는 물음.
하지만 더는 과거를 끌어오고 싶지 않았다. 해성이 만들어 준 이 안락함에 취한 채 단잠에 빠져들고 싶다.
 
[나도.]
 
왜요? 되묻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말이 무척 듣고 싶었는데, 귓가에 아른거리던 해성의 목소리는 어느새 휙 날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까무룩 잠이 들어 듣지 못한 것일 테지만.
사실 해성은 그로부터 한참을 혼자 중얼거렸다. 이따금 도형이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말을 뚝 멈춘 채 그가 잠드는 걸 확인하듯 침묵을 유지했다.
 
[노력해 볼게. 내가.]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를 끝으로 옅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깜빡거리는 화면 위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지만, 도형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최햇살 님의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오전 02:32]
[최햇살 님의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 온 전화입니다. 오전 02:35]
최햇살
 
도형아 이제야 소식 들었어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일어나면 연락해 
 
 
해성의 전화는 여전히 끊기지 않았다.
잘 자, 좋은 꿈 꾸자. 조용히 읊조리는 해성의 목소리가 깊은 꿈을 헤매는 도형의 곁에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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