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해성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의 단단한 팔을 매만지다가 눈꺼풀을 올려 뜨면 곤히 잠든 해성의 얼굴이 보인다.
“…더 자.”
그의 투정 아닌 투정이 이어졌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듯, 도형을 힘껏 끌어안고 한숨을 내쉰다. 그때와 똑같았다.
처음에는 멍하니 있던 도형도 천천히 해성의 등을 끌어안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어깨와 쭉 뻗은 등. 코끝으로 느껴지는 익숙한 체향까지.
‘…이제야, 비로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속으로 삼킨다.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한참을 누워 있던 도형이 해성을 깨웠다.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었지만, 곧 촬영에 들어간다.
“형. 나 방에 돌아가야 해요. 곧 사람들 나와요.”
도형의 나직한 목소리에 해성이 뒤척거리다가 한쪽 눈을 떴다.
“…몇 시인데?”
“6시.”
“집합은.”
“9시.”
아직 멀지 않았느냐 대답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수긍하고는 베개 위에 얼굴을 문지른다.
준비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하니까.
피팅을 해야 하고, 메이크업과 헤어도 들어가야 한다.
“그래. 일어나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형이 몸을 일으킨 순간, 허리로 적잖은 통증이 밀려왔다.
“아….”
허리를 붙잡고 자리에 멈칫하자, 해성도 몸을 일으키며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의 회로가 빠릿빠릿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입꼬리를 슬그머니 말아 올려 웃던 그가 도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적응하겠지.”
그 말도 얄미워서. 도형은 해성을 슬쩍 흘겨봤다.
“적응할 만큼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리고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순간, 해성이 손을 뻗어 도형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쪽 어깨에 제 얼굴을 올려놓고는 몸을 바짝 밀착한다.
“정말?”
능구렁이. 도형은 시선을 맞추지 않고 턱을 살짝 추켜올렸다.
“뭐, 모르는 거니까.”
“괜찮겠어?”
“뭐가 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은근슬쩍 페로몬을 내뿜고 있으니, 후각이 제일 먼저 반응한다.
“형!”
당황한 도형이 두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벌써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의 페로몬을 맡으니 몸이 먼저 반응한다. 남다른 감각에 해성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침부터 누가 도발을 제대로 해 준 덕에.”
어느새 그에게 단단히 잡혔고, 침대에 쓰러지듯 눕게 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
“형, 페로몬. 페로몬 좀.”
“글쎄. 그걸 어떻게 하는 거였지.”
해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도형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마치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는 듯,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
애정이 담뿍 담긴,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간지러워.”
도형도 웃으며 해성을 살짝 밀어냈다. 낮은 웃음소리가 밭은 숨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를 막기 위해 손을 뻗지만, 터무니없는 힘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벽으로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해성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불안한 행복. 그럼에도 영영 기억하고 싶은 순간.
이 찰나의 아침이 도형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
해성의 품에서 풀려난 건, 그로부터 1시간 뒤.
7시, 아슬아슬하게 방으로 들어온 도형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우태에게 잔뜩 혼이 나고 있었다.
“내가 어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우태가 보여 준 건, 해성이 보낸 메시지 한 통.
정해성
도 실장님과 뜻깊은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도형이가 혼자 자는 게 무섭다고 해서, 제가 함께 있을 생각입니다. 내일 아침에 돌려보내겠습니다.
이건 학부모가 보낸 메시지 아닌가 의심하게끔 만드는 내용이다.
“네가 봐도 심각하지?”
“응. 이건… 꼭, 학부모 같네.”
진지하게 대답하는 도형의 목소리에 우태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핸드폰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도형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재차 그를 바라본다.
괜히 얄미운 마음에 손을 들어 도형의 이마에 딱밤을 놨다.
“아! 형, 아파!”
“아프라고 때렸다. 정신 안 차려?”
혼쭐을 내는 우태의 목소리에 도형이 웃으며 이마를 매만졌다.
“미안해. 형.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될 게 따로 있지, 야. 하필 정해성. 아니, 하필 여기서.”
우태는 당혹감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도형을 바라보다가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 뭐… 이미 벌어진 일. 내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냐마는.”
그래도, 어휴! 크게 탄식을 터뜨린 우태가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쯧, 혀를 차던 그가 도형을 힐긋거렸다.
“그래서. 좋았냐?”
“어?”
도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우태가 베개를 냅다 집어 도형의 얼굴을 꾹 눌렀다.
“얼굴, 얼굴! 표정 관리!”
민망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태가 쥐고 누르는 베개를 힘껏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탓이다.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 뒤로 우태의 한숨이 들렸다.
“행복했냐고.”
도형은 우태의 질문에 어젯밤과 오늘 아침을 상기했다.
해성의 모습과 표정을, 손길과 숨결을.
그리고 어쩌면, 평생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정해성의 다정함과 온기를.
한참 생각하던 도형이 베개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우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했어?”
“응. 행복했어.”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안심이 된 모양인지, 우태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우태가 이번에는 손을 뻗어 도형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그럼 됐어.”
이어지는 한마디에 도형 또한 눈을 길게 접어 웃었다.
우태의 손길은 다정하다. 피만 섞이지 않았지, 어디에 가서 친형이라고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 됐다는 말이 꼭 단단한 방패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은 어딜 가든 해성과의 관계로 위축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머리를 쓰다듬던 우태가 장난스럽게 도형의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너만 행복하면 된 건 맞는데.”
어딘가 살벌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 절로 깨갱, 꼬리를 내리게 된다.
혼이 나는 거다.
“한 번만 더, 이렇게 대책 없이 굴면… 그땐. 너.”
잠시 말을 고른다.
무슨 말을 해야 효과적으로 도형을 겁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대표님한테 말한다.”
툭 뱉으며 머리를 쥔 손에 힘을 풀자, 도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 돼!”
윤 대표에게 이야기가 들어가면? 아마 불려 가서 5천 시간은 더 혼날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부터 시작해서 무슨 생각이냐는 잔소리를 듣겠지.
고개를 빠르게 젓던 도형이 우태의 두 팔을 붙잡았다.
“나중에 내가 말할 테니까. 어? 형, 안 돼. 대표님은 안 돼.”
“그러니까, 대책 없이 굴지 말라고. 아이, 참. 아, 모르겠고!”
“아, 형. 제발. 응? 안 그럴게. 안 그럴 테니까.”
애원하는 도형의 모습이 재미있는 건지, 우태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제발, 형. 부탁하는 도형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평소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고, 유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오늘 촬영은 유진이 예현을 붙잡으러 쫓아와 설득하는 장면이었다.
스태프들은 걱정에 걱정을 이어 갔다. 지난번, 해성을 상대로 제대로 몰입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도형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각자의 배역에 몰입했다.
“컷! 너무, 너무 좋았어! 두 사람. 어제 우리 몰래 특훈이라도 한 거야?”
나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한 번에 받아 낼 정도로.
전체 샷과 바스트 샷을 따로 잡느라 두어 번 같은 연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흔들림이 없었다.
덕분에 오후 8시 종료로 예정되어 있던 촬영이 6시쯤 마무리될 수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스태프들과 인사하는 사이, 경대가 도형에게 다가왔다.
“김도형. 너 진짜 특훈했어?”
“무슨 특훈?”
경대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도형에게 가까이 붙어 나직이 속삭였다.
“지난번에 너, 정해성 씨한테 완전 잡아먹힐 것처럼 연기했단 말이야.”
“…자, 잡아먹히다니.”
당황했다.
그 말의 속뜻을 모르지 않는데. 우태와 대화했을 때처럼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펄쩍 뛰며 뒷걸음질 치는 도형의 모습에 경대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아, 아하하. 하하. 우리 도형이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네. 그치?”
곁에 있던 우태가 도형의 어깨를 주무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경대의 이상한 눈초리가 더욱더 이어졌을 것이 뻔했다.
“매니저님도 그렇게 느끼셨죠?”
“그럼요. 아무렴요. 연기력에서 밀릴 애가 아닌데 왜 저럴까 하긴 했지.”
“에이, 아니에요. 연기력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 말을 하려던 경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말을 하다 보니 이건 아니지,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말도 안 되지. 전남편 상대로.”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아하하, 어색하게 웃던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그렇지.”
“아무튼. 너 오늘 진짜 좋았어. 두 사람이 연기로 줄다리기하는 것 같아서 보는 내가 다 흥미진진하더라니까?”
난감했던 것도 잠시, 이어지는 경대의 칭찬에 도형의 얼굴이 다시 한번 밝아진다.
“그래? 괜찮았어?”
“그렇대도! 스크립터 눈썰미를 뭘로 보고. 아무튼,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김도형 배우님. 다음 촬영 때 뵙겠습니다.”
친구에서 스크립터 본연의 자세로 즉각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푸스스 웃고 말았다.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 도형 또한 고개를 숙였다.
“예. 경대 씨도 고생 많았어요. 다음 촬영 때 봬요.”
그리고 두 사람은 웃으며 주먹을 부딪쳤다.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우태와 함께 움직이는데 곁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형, 내 얼굴 뚫리겠어.”
“조심하라고 했냐. 안 했냐.”
“안 들켜. 안 들켜. 전부 지켜본 형만 알지.”
“넌 다 티가 나요. 얼굴이나 표정에 다 그려진대도?”
“…안 나거든요?”
“나거든요.”
유치하게 투닥거리며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우태는 한쪽 팔 아래에 끼고 있던 패드를 켜 이것저것 살폈다.
“내일은 너 오랜만에 광고 하나 있다. 기억하지?”
“응. 우유 광고.”
“걱정이다, 걱정이야. 우유도 못 먹는 애가.”
“괜찮아. 우유는 락토 프리로 준비해 준다고 하셨잖아.”
“아니, 네 팬들은 다 알 텐데. 참 나….”
“그래서 더 효과가 좋을 수도 있지. 유당 불내증 김도형도 먹을 수 있는 우유.”
어이없다는 듯 웃어 버리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 또한 미소를 그렸다.
바뀐 거라고 해 봐야, 풀리지 않았던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쥐지 못할 것 같았던 누군가의 진심을 쥐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를 보내는 마음가짐과 기분. 자신의 불안을 해소시키는 이 정체 모를 안도감까지.
상쾌한 공기까지 폐부로 깊숙이 밀고 들어오니, 조금 더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다.
차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저 앞으로 익숙한 벤 한 대가 보였다.
“어? 성혁 형님!”
형님? 도형이 고개를 돌려 우태를 바라봤다.
“성혁 형님?”
“어어, 호형호제하는 사이잖냐.”
“언제부터?”
의아하게 묻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너랑 정해성이 대책 없이 문 걸어 잠근 어젯밤부터.”
일부러 이러는 거다.
도형이 우태를 흘겼지만, 그는 아랑곳 않은 채 성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형 친화력 하나는… 인정이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는 찰나, 성혁의 곁으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하마터면 저 또한 그의 이름을 힘껏 외치며 부를 뻔했다.
해성이 형! 하고.
그런 도형의 마음을 알아챈 듯, 성혁이 해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곤 두 사람이 걸어오는 쪽을 손짓으로 알려 주었다.
평소처럼 무미건조한 시선이 닿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와 해성은 언제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는데.
“…와, 정해성.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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