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전하지 못했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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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이 스태프들과 사라진 뒤, 도형은 우태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끝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이다.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잔상이 눈을 감아도 여전히 생생했다.
 
“형.”
“…엉.”
 
잠에 취한 우태의 목소리에 도형이 잠시 숨을 삼켰다.
우태를 솔직하게 만드는 건 술기운이 아닌 잠기운이었다. 다음 날이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이따금 자신이 찾지 못하는 답을 원할 때마다 도형은 우태가 졸린 찰나를 이용했다. 그게 상처를 주는 답변이더라도, 냉정해지지 못할 때 이정표가 되고는 했으니까.
 
“내가 유찬이한테 흔들리는 게, 옳은 걸까.”
 
정적이 이어진다. 졸린 건지, 웅얼거리며 말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기다린 끝에, 힘겨운 듯 말을 뱉는 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찬이가 아니더라도… 네가 누군가에게 흔들리는 게, 틀린 건 아니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다. 새카만 어둠에 뒤덮인 천장을 보면, 그대로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게… 이기적인 건 아니니까.”
“응. 그렇지.”
“하지만, 도형아….”
“응?”
 
다시 말이 없다. 침묵으로 뒤덮이는 어둠 속에서 도형은 눈을 떴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천장을 가로지른다.
조금 전에는 보지 못한 빛. 마치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 눈앞에 보인 주변인들을 빛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같다.
 
“네 마음은, 비워 두고… 네가, 준비를 끝내고 나면… 그때.”
 
그리고 말이 뚝 끊어졌다. 아무래도 졸음을 이겨 내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하지만 도형은 우태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전한 이야기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태에게 답을 얻으면 잠이 올 것 같았는데, 어쩐지 눈을 감아도 졸음이 밀려오지 않았다. 되레 속이 더 답답해질 뿐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 두기. 준비를 끝내기.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닌데, 막상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막막함에 몸을 뒤척거리는데, 순간 핸드폰이 반짝였다.
 
정해성
 
자고 있나. 
 
 
해성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킨 도형이 괜히 옆 침대에 있는 우태를 힐긋거렸다.
 
정해성
 
  아니요 안 자요.
  무슨 일이세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과는 전혀 먼 감정이겠지만. 이 시간에 연락한 해성이 무척 낯설었다.
저와 해성은 촬영 스케줄이 다른 경우가 더 많았다. 해성은 촬영을 할 때 절대 핸드폰을 보지 않았지만, 그건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을 하다가 짬이 난 도형이 연락을 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읽지 않았다는 표시, 1이라는 숫자도 꼭 문신처럼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 정해성이 먼저 연락을 했다.
 
정해성
 
잘 자라는 인사, 하고 싶었습니다. 
 
 
잇따라 도착하는 메시지에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툭 놔 버렸다.
 
정해성
 
친해지려면 이게 먼저인 것 같아서. 인사. 
 
 
“미친 거 아니야.”
 
중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나. 순간 놀란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우태를 힐긋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잠에 푹 빠진 그는 미동도 없다. 휴, 짧게 한숨을 쉬고 다시 핸드폰을 노려봤다.
 
정해성
 
안 됩니까? 
 
 
답이 없는데도 연이어 오는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더 속이 뒤집힌다. 차라리 이전처럼 행동하는 게 나았다. 행동반경이나, 그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예측할 수 있어 저 역시 어렵지 않게 그를 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해성의 행동이 도형은 불편하기만 했다.
 
정해성
 
  인사는 고맙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물어봐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용기 내서 보낸 메시지였는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혹시 취한 건가. 핸드폰을 쥔 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을 즈음.
 
정해성
 
친해지고 싶습니다. 김도형 씨랑. 
 
 
다시 한번, 눈을 의심케 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올리고 핸드폰을 눈앞까지 가져왔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걸까 싶어서.
 
정해성
 
한 번도 김도형 씨랑 친해지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니, 잠깐.”
 
꼭 해성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대답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눈을 몇 번이나 비벼 봐도, 핸드폰에 찍혀 있는 메시지는 그대로였다.
 
정해성
 
그러니까, 친해집시다. 우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어떻게 전남편이랑 친해질 수 있어요.
도형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힘껏 그러쥐었다.
 
정해성
 
안 됩니까? 
  될 것도, 안 될 것도 없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정해성 씨와의 거리가 딱, 이만큼이라는 겁니다.
  친한 것도,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저 일로 엮인 사이.
 
 
보내고 나니 속이 답답해졌다. 아, 모르겠다.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오면 속이 편할 것 같은데.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을 쉬었을 때. 진동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보지 말자. 절대 보지 말자. 관심 끄고, 신경도 끄자.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따로 노는 법. 그의 인내심이 버텨 내는 건 고작 3분이었다. 도형은 핸드폰을 다시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해성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은 그저 일로 엮인 사람 하고, 차차 친해집시다. 
 
 
진짜 제멋대로네.
 
정해성
 
일단 늦었으니까 어서 자요. 
 
 
끝까지 자기가 최고지.
 
정해성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내일도 힘냅시다. 
 
 
더 떠올릴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메시지 한 통에 도형은 이불로 숨고 말았다.
 
정해성
 
잘 자, 도형아. 
 
 
왜 이럴 때만, 항상 이런 순간에만.
다시금 떠오르는 생각에 두 귀가 뜨끈해졌다. 자신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건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도록,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않아도 찾아오지 않는 잠이 꽤 오랜 시간 멀리 방황할 것 같았다.
 
***
 
어째서 아침은 찾아오고 해는 뜨는 걸까.
남들보다 일찍 침대에서 일어난 도형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대본 리딩을 위해 미리 내려와 있었다.
 
“예현이, 잠 못 잤어?”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나 감독이 도형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아, 감독님….”
“여기. 여기가 퀭해.”
 
나 감독이 자신의 눈 아래를 가리키며 웃자, 도형 역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하, 짧게 떨어지는 웃음이 제법 어색하다.
 
“고민이 많아?”
“…인생은 원래 고민의 연속이죠.”
 
흐음, 길게 한숨을 내쉰 나 감독이 도형의 곁에 앉아 두 팔을 책상 위로 올렸다. 주름진 손으로 깍지를 낀 채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야. 가장 이기적이어야 할 순간을 가끔 잊고는 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네? 짧게 묻자, 나 감독은 희미하게 웃으며 도형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지금 도형 씨가 그렇다는 말이야. 가장 이기적이어도 되는 시기인데, 그걸 잊고 있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 감독의 손길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그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형은 머리를 정리했다.
무슨 말일까. 몇 번을 곱씹어 봐도, 그 뜻을 제대로 알아챌 수 없다.
 
“도형 씨만 생각해.”
 
단조로운 목소리가 가슴 한 부근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지금 생각 많을 거 알아. 리딩 직전에 일도 터졌지, 두 놈은 정신없게 만들지.”
“…….”
“그래도 말이야.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서는 안 돼.”
 
갈대. 기가 막힌 비유였다.
그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지.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휙. 다시 이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휙. 어떻게 해야 곧게 설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갈대가 아니면 뭘까.
 
“묘목이라도 되어야지.”
“묘목이요?”
“그래. 뿌리를 내릴 땅을 찾아서,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타이밍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하지만.” 
“그게 꼭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야. 사람에게서 뽑혀져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사람에게 자리를 잡겠니. 그건… 힘들지.”
 
그렇다고 일에 휘말리면 세리와 우태가 또 걱정할 텐데.
나 감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 기회를 찾는데, 이어지는 말이 다시금 가슴을 푹 찌른다.
 
“정작 자리를 잡을 곳은 본인에게 있는데, 찾지 못하는 건 아니고?”
 
도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 감독을 마주했다.
 
“스스로에게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고, 가지를 뻗으면….”
 
잠시 말을 잇지 않던 나 감독이 도형을 향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형 씨 말대로 인생은 고민의 연속이니, 고민을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행복을 깨달아야지.”
 
마음 깊이 와닿는 이야기였으나, 여전히 도형에게는 저 높은 하늘의 구름과 같은 이야기였다. 잡힐 듯 보이지만 절대 잡히지 않는 것.
하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 볼게요.”
 
말로만 하는 대답이 아닌, 진심으로 나온 이야기였기에.
나 감독은 도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오늘은 어디를 보기로 했더라….”
 
제자리로 돌아가는 나 감독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도형이 책상 위 대본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스스로에게 뿌리를 내린다. 자리를 잡고, 가지를 뻗어 단단한 묘목이 된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이야기다.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은 자신을 다잡는 데 더 충실해야 한다는 점.
할 수 있어. 짧게 다짐하며 주먹을 꽉 그러쥔 사이,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힘차게 인사를 하는 유찬이었고.
 
“졸려, 정말… 아침부터 대본 리딩을 잡은 건 누구 생각이에요?”
 
뒤따라 들어오는 건, 피곤해 보이는 소연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해성이 들어왔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 나 감독과 나눈 이야기들이 먼지처럼 흩어진다. 어젯밤 나누었던 메시지 때문이다.
제발 말 걸지 마라, 알은척도 하지 마라. 그렇게 되뇌는 찰나.
 
“도형아, 어제는 잘 잤어? 나는 잠자리 하나 바뀌었다고 엄청 뒤척였어.”
 
유찬이 곁에 앉으며 우는소리를 냈다.
 
“여기 봐. 다크 서클.”
 
제 눈 아래를 짚으며 울상을 짓는 유찬의 모습에 도형이 희미하게 웃을 즈음.
 
“좋은 아침, 김도형 씨.”
 
그렇게 바랐던 일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형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해성이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에.
 
“…예?”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언제부터 형이 저한테 아침 인사를 전했어요? 물어보려는 입이 꾹 닫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 줬고, 곁에 앉아 있던 유찬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잘 잤어요? 그래도 여기 침대 꽤 괜찮던데.”
 
조금 전, 도형에게 어리광을 피우던 유찬의 말을 짓밟는 한마디였다. 유찬은 그런 해성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다시 예현이와 유진으로 지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되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 제발 저를 여기서 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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