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마지막 시련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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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기회?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적잖이 당황한 도형만큼이나 해성 또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딱 하나. 그가 저를 두고 꾸민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정확하게 이야기해 줘요. 그러면… 나도 생각해 볼게요.”
 
해성은 도형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시선이 돌아오자,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저는 잠자코 듣고 있겠다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선배, 제가 그랬잖아요. 서로 돕고 살면 얼마나 좋냐고. 넥타이 골라 준 날 한 말인데. 기억나요?]
 
숨을 참는다.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네. 기억해요.”
[다행이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뭘 도우면 되는 건데요?”
[나랑 스캔들 나면, 긍정해 줄 수 있어요?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에, 도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 보다가, 곁에 앉은 해성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하경의 말 때문이었다.
 
[해성 선배님한테 기대를 걸었는데, 보기 좋게 무시당했지 뭐예요.]
 
당황한 건 해성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도 모자라서, 제 이름까지 거론됐으므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 감독이 불렀던 그날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핸드폰 너머로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숨죽여 한숨을 토해 냈다.
 
[뭐, 이유는 알 것 같아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이어지는 말에 두 사람이 천천히 눈을 마주했다.
티가 났나. 아니면, 누군가 하경에게 정보를 제공한 걸까.
다시 한번, 의심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해성 선배님도 스캔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구나. 뭐, 그렇게 이해했는데… 아니에요?]
 
여기서는 즉답을 해 줘야 맞는 건데.
도저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성의 눈을 마주보고 있는데 어떻게 부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어떻게 아니라고 말하겠어. 지금도 같이 있을 텐데.]
 
작게 조소하는 하경의 목소리에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휩쓸릴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페이스를 되찾아야만 했다.
고개를 빠르게 내저은 도형이 목에 힘을 준 채 그에게 물었다.
 
“뭘 원하는 거예요. 스캔들, 그게 뭐 도움이 된다고.”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저질러 봐야 아는 일이고. 내가 뭘 원하는지. 그게 중요해요? 선배는 지금 선택을 해야 맞는 것 같은데? 아닌가?]
“…임하경 씨.”
[선택해요. 내가 두 사람 지저분하게 이용하는 걸 지켜볼 건지, 나랑 깔끔하게 열애설 인정하고 적당한 시기에 결별 기사 낼 건지.]
 
도망갈 곳이 없어 보였다.
어디로 향하든, 하경의 입김과 손길이 저들의 길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의 힘을 겪어 보지 않았던가. 모두가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면, 그 어떤 방패로도 막아 낼 수 없다.
일순간 밀려오는 기시감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대체 뭘 얻으려고.”
[셀프 마케팅이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할 만한 작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면 딱 좋겠다 싶었고. 최유찬 씨도 있지만… 그쪽은 영, 나랑 안 맞아서.]
 
웃으며 말하던 하경은 도형의 대답을 기다리듯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도형이 해성의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결심이다. 더는 무언가에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무엇도 잃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위함이었다.
 
[어떡할래요?]
“싫어요.”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에 거짓말을 섞는 일, 안 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이토록 의연할 수 있는 건.
저 또한, 단단해질 수 있는 힘을 얻었으므로.
더는 혼자가 아니며, 제 곁에서 단단하게 잡아 줄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도형은 확신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임하경 씨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요. 이렇게 자극적으로 끌고 간다 해서, 당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을 깨려 입을 여는 순간. 다소 날카로워진 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결정, 후회하지 말아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당신 역시 후회의 길로 가지 말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더는 전할 수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도형과 해성의 사이를 메우는 건 투박한 신호음뿐이었기에.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도형이 고개를 돌려 해성을 마주했다.
어떡해요, 엄습하는 두려움에 점철된 눈빛이었으나.
 
“괜찮아.”
 
해성은 그 또한 안아 주었다.
도형의 어깨를 붙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커다란 손으로 등을 쓰다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니, 이건 확언해선 안 되는 이야기다.
숨을 참고 생각을 고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너는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우리는 괜찮을 거야.
나직이 전하는 말이 도형의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몰려오는 불안은 어쩔 수 없는 법.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흔들리지 않기를, 떨어져 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손끝에 힘을 실었다.
 
***
 
“도형 씨, 얼굴이 왜 그래. 어제 잠 못 잤어?”
 
걱정스러운 나 감독의 목소리에 도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도 거의 끝물이라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돼서.”
“에이, 뭘 긴장하고 그래! 이제까지 잘해 왔으면서. 걱정하지 마. 하던 대로 해요.”
 
나 감독은 환하게 웃으며 도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촬영장은 여전히 분주했고, 마지막을 앞둔 분위기는 아쉬움과 서운함 또한 공존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평소 같았다면 도형 역시 웃으며 그들과 어울렸을 테지만.
오늘은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하경과의 마지막 촬영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하경과 촬영할 일은 없지만, 하필 그와 마주하는 마지막 촬영에 해성이 없었다.
소연이나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맞춘다고는 하나, 그들이 이런 속사정까지 아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오늘만 지나면 돼. 자신을 다잡으며 대본 읽기에 집중했다.
 
“리허설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조감독의 말에 도형은 대본을 한번 꼭 쥐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오늘도 잘 부탁해요.”
 
그때, 하경이 도형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드러낼 수 없다. 그와의 상황도, 제 불안함도.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이제 마지막이라 그런가, 되게 서운하다.”
 
하경은 넉살 좋게 말하며 도형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촬영 끝나도 연락 계속할 거죠? 그래도 우리, 나름 친해졌잖아요.”
 
응?
되물으며 웃는 모습에 목 언저리가 아릿해진다.
며칠 전, 제게 전화해 선택을 강요하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벙끗거렸지만, 도형은 애써 미소만 지었다.
 
“리허설, 들어가야죠.”
 
그 어떤 대답도 없었으나, 하경 또한 그런 도형에게 무어라 말을 얹지 않았다.
마치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처럼, 시선을 고정한 채 떼지 않을 뿐.
 
“자, 그럼 4부 22신. 예현이에게 유진의 이야기를 전하는….”
 
나 감독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리던 그때.
 
“어? 어어, 잠깐. 이거 왜 이래!”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도형과 하경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크레인에 고정된 조명판이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스태프들이 조명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넓적한 조명판은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졌다.
 
“선배, 위험해요!”
 
하경은 크게 외치며 도형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명판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하경은 도형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굴렀다.
사람들의 외마디 비명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경 씨!”
“도형 씨!”
 
스태프들의 외침이 이어지고 나서야 도형은 꽉 감았던 눈을 떴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바닥을 어지럽힌 게 눈에 들어왔다.
 
“리허설 중지! 구급차 불러!”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도형이 다급히 하경의 품에서 벗어났다.
철제 틀은 바닥을 나뒹굴고, 그는 다리를 붙잡은 채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명판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의 다리를 내리찍은 모양이었다.
일순간, 온몸이 오싹해졌다. 만약 하경이 없었더라면, 다치는 건 제가 되었을 테니.
 
“하, 하경 씨. 하경 씨,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선배는요? 다친 곳, 없어요?”
 
달뜬 숨을 내뱉는 하경의 질문에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요. 지금 내 걱정할 때예요?”
“다행이다. 선배가 안 다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는 하경의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며칠 전, 저를 협박했던 사실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자신을 감싸 주고, 지켜 주었다는 사실만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수라장이 된 촬영장에 구급차가 도착했고, 하경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조명 팀! 제대로 확인 안 해?”
 
나 감독의 거친 목소리에 분위기는 금세 살벌해졌다.
연출 팀 모두가 질책받는 사이, 배우들은 스태프들의 인솔하에 잠시 촬영장을 떠났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도형은 구급차가 떠난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지. 분명 하경이 저를 도왔고, 구해 준 건 사실인데.
다행이라며 웃는 그 얼굴이 왜 이렇게 뇌리에 남는 걸까.
저를 구해 줬기 때문에? 저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죄책감인가?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소음이 가시지 않는 머리가 웅웅 울릴 때.
 
“도형아!”
 
황급히 달려온 우태의 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
“괜찮냐고. 안 다쳤어?”
“어… 응, 난 괜찮아.”
“진짜로? 야, 어디 막. 부딪히거나 아프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니야. 진짜로 멀쩡해. 넘어질 때 어깨 조금 부딪힌 거 말고는….”
 
도형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팔을 휘휘 돌리며 웃었다.
그래, 저의 기우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계산할 새가 어디 있다고.
나중에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그리고 다시 한번, 그날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던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혹시 해성이 벌써 이 상황을 알게 된 걸까. 아니, 너무 빠른데.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두 눈에 또렷하게 들어오는 건, 하경의 이름.
이건 불길한 전조였다.
일이 터지고 말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도형의 머리를 울리고 있었다.
 
임하경
 
시작이 좋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고마워요 선배 
덕분에 스토리텔링이 더 쉬워지겠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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