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의 마지막 말에 하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관을 문지르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듯,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도형을 노려보았다.
“이런다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바들바들 떨며 묻는 하경의 목소리에 핸드폰 너머로 해성의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올 것도 없습니다. 남는 건 임하경 씨의 발악뿐일 테니까.]
“무,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하경이 손을 뻗어 도형의 핸드폰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도형은 가볍게 손을 뒤로 물리며 그의 손길을 저지했다.
그리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다. 도형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제껏 촬영장에서 보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됐어요.”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모습에 하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를 내려다가도 웃음을 억지로 머금으며 도형에게 다가왔다.
“선배,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당신도 알 거 아니야. 무명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일 하나 들어오지 않는 게 얼마나 처절한지! 넌 알잖아, 당신을 알 거 아니야.”
그럼에도 주변을 의식하는 걸까. 하경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도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더욱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뭐라고?”
“그래. 맞아. 이름 없는 배우로 사는 일. 밑바닥만 전전하며 사는 기분. 누구보다 잘 알지. 그래도 난, 당신이랑은 달라.”
“달라? 너랑 내가 다르다고?”
“적어도 연기자의 프라이드는 버린 적 없거든. 내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지, 남 이름 팔아 가며 승부할 생각은 없었어.”
픽 웃던 도형이 손을 뻗어 지갑과 립밤을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우태와 소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경을 힐긋 바라보던 도형이 몸을 돌려 걸어가려다가, 재차 뒤돌아 그를 마주했다.
“당신 인생을 좀 더 소중히 생각해요. 머리 굴리려다가, 어렵게 쌓아 온 거 모두 잃는 수가 있어요.”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끝까지 이를 갈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맥이 풀린다.
그래, 어차피 그런 사람이라면 더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겠지.
더더군다나 지금 그의 꼴을 보자니….
“뭐, 어차피 다 잃게 될 것 같지만.”
손에 쥔 것은 그 무엇도 남지 않아 보였기에.
도형은 냉정하게 뒤돌아 하경에게서 멀어졌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라는 듯, 높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그의 귀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
[<별을 담은 잔> 임하경, 나태석 감독 팀의 민낯을 낱낱이 밝힌다.]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이 조연 배우를 위한 처사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오메가, 알파 배우들을 위한 스케줄 조정은 암암리에 협의가 된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의 밑에 깔린 건 그 어떤 형질도 지니지 않은, 아직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한 배우들의 희생이 있었다. 연출진들은 과연,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는가? 조연 배우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결과는 아니었던가.
(중략)
누구나 사랑에 목마를 수는 있다. 놓치기 싫은 사랑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타인을 상처 입히며 얻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을 남발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건, 언제든 돌려받기 마련이다. 엔드패치는 이러한 제보를 받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이를 명목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나태석 감독의 팀에 있는, 사랑으로 상처를 받은 배우. 자연히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재결합을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고 한들, 그 감정과 관계가 얼마나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떠한 답변도 내놓지 못하는 이 상황이 진실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을까.
나태석 감독은 악성 루머에 강경 대응을 예고했지만, 엔드패치는 언제나 진실만을 추구한다. 우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한 자가 아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한 자의 편에 서기로 했다.
(중략)
(사진)
무엇이 진실인가. 과연, 진실한 마음을 이용한 사람은 누구인지. 판단은 이 기사를 읽는 여러분의 몫이다.
***
파티가 끝나고 정확히 2시간 뒤.
하경이 예고했던 대로 엔드패치는 드라마 속사정을 구구절절 적은, 기나긴 기사 하나를 게재했다. 동시에 여러 언론사에서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기사를 인용해 의문이 가득한 기사를 냈다.
인터넷을 가만히 살피던 우태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기사야, 칼럼이야. 하…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만.”
쯧, 혀를 차던 그는 세리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최대치로 분노했다는 걸.
“……어떻게 할 생각이니, 도형 씨.”
도형의 이름에 ‘씨’를 붙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던 우태의 시선이 도형에게 향했다.
“반박할 수 있는 증거는, 있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제 히트 사이클을 위주로 배우 스케줄 조정한 건 사실이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
“…….”
“하지만 유찬이를 이용해서, 임하경 씨를 이용해서 해성이 형이랑 뭔가를 하고자 했다. 이건,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죠.”
“어떻게?”
“……내일, 해성이 형이 토크 쇼 나가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래. 조 대표한테 들은 참이야.”
세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곁에 서 있던 비서가 건넨 물 한 잔을 받아 마시고 한숨을 크게 뱉었다.
“그게 완벽한 방패는 되지 못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방책은?”
“나 감독님 주도하에, 모든 스태프들이 인터뷰를 한 참이에요. 관련 기사 나올 거고, 마침 좋은 게 있더라고요.”
“좋은 거?”
“나 감독님은 드라마를 찍을 때마다 그 현장을 남기는 걸 좋아하세요. 지난 촬영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감독님이 데리고 다니는 보조가 그걸 모두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장 분위기나, 감독님이 다른 배우들을 대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어요.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모두의 상황을 고려하는 모습까지도.”
씩 웃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그 카드를 쓸 줄은 몰랐어. 나도 이제야 전해 들었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시더라. 본인만 욕을 먹는 거면 괜찮은데… 아무래도, 다른 스태프들까지 모두 영향이 가니까. 그건 두고 볼 일이 아닌 것 같대.”
“그래, 좋아. 거기까지는 됐어. 그럼 네 일은?”
도형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논란들이 모두 해결된다고 한들, 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거둘 방법이 없다.
한참 고민하던 그때였다.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고, 세리를 대신해 비서가 받았다.
“대표님. 지금 밖에 최유찬 배우가 와 있다고 합니다. 어떡할까요.”
유찬이 왔다는 말에 도형도 우태도 놀라 비서를 바라봤다.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유찬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글서글하니 웃는 얼굴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무슨 일이에요? 보시다시피 우리도, 여유롭게 이야기 나눌 상황은 아니라.”
“네. 저도 전해 듣고 급하게 스케줄 마무리하고 들어왔어요. 촬영이 금방 끝나서 다행이지. 앉아도 될까요?”
세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찬은 도형의 곁에 앉았다.
음, 한참 고민하던 유찬은 테이블 위에 있는 태블릿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논의 중이셨나 봐요.”
“…뭐,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저도 대표님과 이야기 끝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귀국하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에 도형과 우태, 세리까지 그를 쳐다봤다.
“제가 나서면, 바보가 되는 건 어느 쪽일까요?”
“유찬 씨가 나선다고?”
“네. 사실 좋은 감정을 키워 온 건 도형이와 정해성 씨가 맞다. 근데, 둘이 워낙 답답하게 굴길래. 내가 중간에서 좀 다리를 놔줬다. 또 스캔들부터 터지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열심히 방패막이를 해 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용당한 적이 없다. 오히려 도형이에게 치근덕대는 하경을 견제하느라 그날 백화점에도 따라갔다.”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모든 일에 증거가 따라온다니. 꼭 뭘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증거를 내밀면, 그것도 웃기지 않겠어요?”
유찬의 대답에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에 증거를 내밀 수는 없었다. 짜 맞춰진 것처럼 흘러가는데, 저들이 뒷받침하는 주장들을 일일이 반박하며 증거를 들이미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겠지.
도형을 겨냥한 것처럼 감정에 대한 일이라면 더더욱.
“아, 소연 선배님도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정해성 씨에게 멘토가 되어 줬고, 연애 상담 비슷한 것도 해 줬다고요.”
“그랬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럼요. 신인 배우 죽이기다 뭐다, 말은 나오겠지만. 그건 그쪽이 먼저 건드린 문제고. 사실 확인 없이 다짜고짜 도형이 걸고넘어진 것도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쪽이라고 뭐, 확실한 증거도 없는 것 같던데.”
유찬의 말에 세리는 고민하는 듯 미간을 꾹 눌렀다.
도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찬에게 고맙다, 부탁한다,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그때, 우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대표님. 사람들도 유찬이 입장이 궁금할 테고. 주변에서 하나둘,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여론도 많이 돌아설 거예요. 게다가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에 끊임없이 반박해야 한다는 건데….”
잔뜩 기가 죽어 말하는 우태의 목소리에도 세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찬은 마른침을 삼키며 도형의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세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좋아. 이번에도 신세 좀 질게요. 그리고 도형 씨도 가만히 있지 마. 해성 씨랑, 토크 쇼 하나 잡자. 나가서 전부 이야기하고 와.”
“대표님.”
“그렇게라도 해야지. 나 감독님도 나서 주는데, 도형 씨라고 가만히 있을 필요 없어. 뒷수습은 소속사 몫이니까, 가서 솔직하게 말하고 와.”
“…감사합니다.”
도형은 손을 힘껏 맞잡았다.
이제 됐다며 기뻐하는 우태와 저도 팩을 해야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유찬을 번갈아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또, 지난번과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움이 밀려서겠지.
밀려오는 걱정을 속으로 삼켜 낸다. 아니, 이번에는 잘될 것이다. 잘 해결되어 저 또한 문제없이 이 고비를 넘길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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