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행복의 또 다른 이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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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성공적으로 끝마쳤지만, 나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 몇몇과 조감독, 도형과 유찬은 무거운 한숨만을 뱉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주로 세미나실로 쓰이는 호텔의 어느 조그만 회의실.
 
“이거, 참….”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젓던 나 감독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몸을 젖히듯, 고개를 뒤로 하곤 앓는 소리를 낸다.
 
“이 새끼들은….”
 
악질적인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하나 때문이었다.
유찬과 도형이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걷는 사진이었는데, 기사에서 말하는 ‘비밀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예현과 온영의 모습을 한 컷에 담아 낸, 홍보용 포스터 촬영 사진일 뿐이었다.
 
“대체, 이거 어디서 어떻게 빠져나간 거야? 보안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따위 기사가 나가!”
 
태블릿을 쥔 나 감독이 소리를 버럭 지르다 이내 이마를 짚었다.
세간의 관심이 몰려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김도형과 정해성의 캐스팅을 결정한 순간부터,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각오했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누군가 집요하게 도형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한테는 할 말이 없어.”
 
나 감독은 한숨을 쉬며 유찬과 도형을 바라봤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아오, 내가 진짜… 한국 돌아가면 언론사들을 다 뒤엎든가 해야지.”
 
도형은 나 감독과 스태프, 조감독과 유찬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전, 잠시나마 통화했던 해성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차라리 잘됐어.’
 
덤덤하게 대답하는 그 목소리에 조금 서운할 뻔했지만.
 
‘기대감이야. 너에 대한 기대감. 그게 어느 쪽이 됐든, 사람들이 네게 주목하고 있다는 거고. 김도형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책상 아래에서 맞잡은 손을 꾹꾹 누르던 도형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나 감독을 바라본다.
 
‘써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뭘 준비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를 알릴 수 있는 판에 뛰어들어.’
 
해성의 말이 맞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부정적인 기사도 아니고, 물음표가 붙어 의구심으로 끝나는 기사가 아니던가.
모두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사에 쓰인 것처럼 유찬과의 관계가 연인이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관계성을 드라마에서 보여 주면 될 것이다.
 
‘그 판을 네가 쥐고 흔들면 돼.’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다 쏟아부어 판을 쥐고 흔드는 일.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임이 분명했다.
 
“괜찮아요. 감독님.”
 
그러니 더욱 담담할 수 있는 것이다.
곁에 앉아 있던 유찬도 놀란 표정으로 도형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던 도형이 아닌 것만 같아서.
예전 같았다면 도형이 저보다 더 걱정했을 텐데.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의 말에 나 감독은 자세를 곧게 해 도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노이즈 마케팅?”
“기사는 기사대로 두면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도형 씨?”
“그 사람들이 깔아 준 판이에요. 모두가 유찬이와 저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될 테고요. 촬영 중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가십에 귀를 기울일 거고. 그럼 더더욱 우리 두 사람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될 거예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도형의 말에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나 감독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가 깊이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긍정적인 생각의 반향이 손짓으로 나오고는 했다.
 
“응. 그리고?”
“어차피 드라마 방영까지는 2개월 남짓 남았어요. 그 시간을 버티고 나면, 결국 바보가 되는 건 누굴까요.”
 
도형의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살짝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본 나 감독이 하, 헛웃음을 쳤다.
 
“우리가 역으로 판을 쥐고 흔들어야죠. 어떻게든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면 돼요.”
“그러다 두 사람의 열애설이 진짜가 아니란 걸 알게 되면….”
“진짜이길 바랄 정도로 우리가 연기를 잘해야겠죠. 실망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요.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고, 드라마 포스터 촬영 중 찍힌 사진이었는데. 단순히 그뿐이라니 아쉽다. 그 마음이라면 드라마에 더욱 열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 이 말이 유찬에게 얼마나 잔인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찬이라면 자신의 제안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 공적인 이득을 위해 움직이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감독님, 모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조감독의 말에 유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얹었다.
 
“글쎄요. 이러나저러나 모험인 건 마찬가지고. 사실 웃기잖아요. 이런 기사까지 하나하나 반박하는 게, 꼭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고요. 원래 큰일에는 구설이 따르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도형이 말대로 우리가 이 판을 쥐고 흔드는 편이 더… 이득인 것 같은데요.”
 
유찬까지 도형의 말에 수긍하니, 나 감독 또한 그쪽으로 생각을 굳히는 듯했다.
아무래도 ‘판을 쥐고 흔드는 게 우리가 된다.’는 도형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에게 듣게 된 이야기라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겠지.
 
“그럼, 그렇게 합시다.”
 
나 감독의 말에 유찬과 도형이 씩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한국 돌아가면 많이 골치 아플 거야. 그건 각오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저야 뭐, 걱정 없습니다. 적당히 받아칠게요.”
 
유찬의 대답에 나 감독의 시선이 도형에게 향했다.
사실 걱정이 되는 쪽은 유찬이 아닌 도형 쪽이었을 것이다.
 
“한두 번이어야죠. 익숙하다고 하면 슬픈가요?”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결국, 크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도형은 나 감독과 조감독,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거리자, 도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너무 많은 관심을 받는 탓에, 번번이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드네요. 좀 덜 유명해야 했는데. 그쵸.”
 
능글맞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스태프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 참, 핀잔에 가까운 중얼거림과 함께 나 감독 역시 다시 한번 해사한 미소를 그렸다.
 
“남은 촬영도 잘 마치겠습니다. 그래야 지금 나온 기사들에 코웃음을 칠 수 있을 테니까요.”
“코웃음만? 나는 보란 듯이 SNS에 올릴 거야. 어? 누가 우리를 연인으로 보셨죠? 제대로 보셨네요. 온영이와 예현입니다. 라고.”
 
조그만 회의실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키득거리며 웃던 도형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해성을 떠올렸다.
이정표. 지금 그에게 딱 잘 어울리는 말 같았다.
어서 빨리 해성이 보고 싶었다. 그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
 
일주일간의 촬영이 끝났다.
누군가 말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한두 번 봐야 예쁘지, 계속해서 보면 물리고 질린다고.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눈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될 정도였으니, 이제는 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질린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혹은, 이참에 조금만 더 머무르면서 관광을 하고 싶다.
사람들의 의견이 하나둘 갈릴 때. 도형은 오매불망 돌아가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형, 또 연착되는 거 아니겠지?”
 
벌써 열 번도 넘게 이어진 똑같은 질문에 우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눈이 이렇게 쏟아지는데.”
“안 되는데… 한국 가야 하는데.”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는 코웃음을 쳤다.
이거 다 정해성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건데.
참, 관계가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 싶다가도.
차라리 예전보다 지금이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의 갈림길에 갇히고야 마는 것이다.
 
“형, 도 실장님한테서 따로 연락 없었지?”
“무슨 연락?”
“아니, 뭐….”
 
해성의 스케줄이라든가.
해성의 현재 근황이라든가.
저를 마중 나올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목 끝까지 나오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우태는 싱겁다며 코웃음을 치고 넘겼지만.
잠시 후, 연착된 비행기의 탑승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비행기에 올라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한국에 도착하겠다는 기대 하나로.
하지만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잠이 안 와.”
 
잠은커녕, 들뜬 마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제발 한국에 빨리 도착해라, 어서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다.
온갖 바람을 곱씹으며 착륙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인천 공항에 도착했고, 배우들은 모두 VIP 전용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기자들에게서 배우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역시, 해성은 마중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 없던 거겠지. 사정은 알고 있으나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돌아올 때도 연락 한 통 없더니.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차 문고리를 잡은 그때.
 
“도형아.”
 
씨익 웃는 우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선물이다.”
 
무슨 말이야. 당황한 도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열어 봐.”
 
차 안에 선물이라도 둔 모양이지.
금세 기분이 풀린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실실 웃으며 문을 활짝 열자, 뜻밖의 인물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도형 씨.”
 
나직한 목소리, 은은한 미소.
그리고 도형만이 볼 수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
 
“제가 그쪽 선물이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이라, 도형은 입을 벙끗거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표정으로 우태를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운전석에 탄 뒤였다.
 
“안 받으실 건가요. 이 선물, 되게 특별하고 비싼데. 정해성이라는 톱스타.”
 
그리고 푸핫, 크게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이 저를 위해 몰래 준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빨리 와서 안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도형은 더 기다리지 않고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해성의 품에 폭 안겼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향기와 익숙한 온기에 금세 안온함을 느꼈다.
 
“보고 싶었어.”
 
이마와 볼에 닿는 입술이 부드럽다.
 
“무사히 다녀와 줘서 고마워.”
 
속삭이듯 뱉는 말은 달콤했다.
도형은 행복하게 웃으며 해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응, 다녀왔어요. 해성이 형.”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해성이 운전석을 힐긋 바라보다가, 품에 안긴 도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빨갛게 얼어붙은 도형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우태가 듣지 못하도록, 도형의 귓가에 박혀 사라지지 않도록.
 
“…나 단단히 미쳐 있으니까, 얼른 집에 가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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