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불편하냐?”
우태의 물음에 도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그는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어느새 해성이 도형에게 기대어 있었다.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는데, 우태는 이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잠든 거 맞지?”
백미러에 비친 도형은 슬쩍 해성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정해성도 정해성이다. 이게… 아니, 사람이 이렇게 바뀐다고?”
“…….”
“넌 왜 아무 말도 없어. 설마, 너 설마 정해성 깰까 봐!”
우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도형이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모습에 우태가 혀를 내둘렀다.
“너도 너다. 너도 너야.”
김도형이고 정해성이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럼에도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이 저일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형만큼은 이해해야지.
창틀에 팔을 기댄 채 한숨을 푹 쉬던 우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돼서 그래.”
툭 던진 말 뒤로 역시나 정적이 흐른다. 슬쩍 백미러를 바라보니, 도형의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너,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된다고. 지금 정해성한테 미련 있는 거, 결국 못 버리고 있다가. 꼭꼭 끌어안고 있다가 나중에… 나중에 그거, 다시 바닥에 내던지고 쓰러질까 봐.”
“알아. 이해해. 형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무슨 마음인지도….”
“야, 아는 놈이-”
“여기까지만.”
이어지는 도형의 말에 우태가 다시 백미러를 바라본다.
어쩐지 씁쓸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괜찮아, 형.”
“그거 김도형 전매특허잖아. 괜찮다고 하는 거.”
“응. 그러니까 괜찮아.”
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더 속상하기도 하고,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했지만.
그래, 지금은 그냥 두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아무리 말려도 앞을 바라보고 걸을 땐 뒤도 돌아보지 않는 놈이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퉁명스러운 말에도 도형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그의 시선이 제 어깨에 기대 잠든 해성에게 향한다.
어떻게 해도 향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접히지 않는 마음 또한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접히지 않은 채로 가만히 두고 보다가, 조용히 마음의 구석으로 밀어내는 것도 방법일 테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간절히 바라며 스르륵 눈을 감는다.
***
한참 달리던 와중, 해성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제가 내내 기대고 자던 도형의 어깨를 주물러 주던 그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을 했다.
“지 매니저님. 휴게소 좀 갈 수 있습니까.”
“화장실 가고 싶어요?”
해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도형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잠에서 깨는 걸 무척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알던 해성은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얼굴에 찬물이 닿지 않는 이상 잠에서 제대로 깨지도 못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아마 가까스로 버티며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 것일 테고.
“불편하진 않았어요?”
“응.”
“그럴 리가 없는데. 형, 차에서 잘 못 자잖아요.”
“한번 해 보니까 할 만하더라.”
픽 웃는 해성의 모습에 도형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데 저만 몰랐던 걸까. 요즘 들어 웃음이 많아진 걸까.
요즘 들어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만든 사람은 딱 한 사람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할지라도, 저로서는 해성을 변화시키는 데 부족했던 모양이지.
묵직해지는 마음을 한숨으로 토해 내며 괜히 눈을 감았다. 아, 이제야 졸리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씁쓸했다.
그렇게 얼마 달리지 않아 휴게소에 도착했다.
해성과 도형은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하고 차를 나섰다.
“도형아.”
“네?”
“먼저 다녀와.”
갑작스러운 말에 도형이 놀라 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해성은 이미 빠르게 걸어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 틈으로 휙 사라지니, 잡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화장실 가고 싶다며.”
중얼거리던 도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야, 정해성은 어디 갔어.”
뒤따라오던 우태가 물었지만, 도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몰라. 먼저 다녀오라고 말하더니 갔어.”
“뭐 이런 제멋대로인 놈이….”
“얼른 가자. 나 화장실 가고 싶어.”
또 우태가 성질을 내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도형은 그를 잡아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그 앞에 해성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알감자를, 한 손에는 커피가 담긴 트레이를 든 채로.
“이거, 들고 있어.”
해성은 도형에게 알감자와 커피를 넘겨주고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기 전, 살짝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꼭, 기다려.”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다. 도형은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먼저 가. 내가 같이 갈게.”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뭐 있어.”
우태는 걱정스럽게 도형과 화장실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뭐,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알감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형이 픽 웃었다.
‘휴게소 알감자 먹고 싶어요.’
해성과 헤어지기 직전, 둘이 함께 있던 시간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던 도형의 눈에 들어온 건, TV에서 막 방영하던 어느 프로그램. 거기에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사 먹는 알감자 한 그릇이었다.
그곳이 특별히 맛있다는 내용의 취재였으나,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냥 쪄 먹으면 되잖아.’
‘휴게소에서 사 먹는 맛이 있으니까요.’
도형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해성이 떠올랐다.
설마, 기억하고 사 준 건 아니겠지 싶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먹고 싶었을 수도 있지. 감자는 해성도 좋아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벽에 기댄 도형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해성이었다.
그는 도형의 손에 든 커피만을 받아 든 채,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도형이 뒤를 따라가며 알감자와 해성을 번갈아 보았다.
“형, 이건-”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자리에 우뚝 선 해성이 뒤를 슬쩍 돌아 도형을 바라봤다.
“…좀, 지났지만. 예전에.”
어른들이 그랬다. 열 개를 잘해도 하나를 못하면 잘한 것들이 모두 잊히고.
열 개를 못해도, 하나를 잘하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고.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하며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
이제껏 해성을 향했던 미움이나 섭섭함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참 이상했다.
“안 먹어?”
“아니요, 먹어요. 먹어.”
도형은 괜히 울 것 같은 기분을 꾹 억누르며 알감자가 들어 있는 종이 그릇을 꼭 쥐었다.
해성은 어느새 속도를 낮춰 도형과 함께 걷고 있었다.
감자를 한 알 집어 먹으려던 도형이 해성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런데 안 잊고 있었네요.”
그 말에 도형을 잠시 내려다보던 해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을 바라본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흠 짧게 헛기침을 했다.
“…도착하니까 생각나더라고. 네가 했던 말이.”
머쓱하게 대답하는 해성에 가슴 한구석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결혼 전에도, 이후에도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지금에서야 느끼다니.
이제 모든 게 끝난 사이인데.
다시 붙일 수도 없이 깨진 사이일 텐데.
설렘을 간신히 다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형.”
그 말에 해성의 시선이 돌아온다. 뭐가 고맙냐고 묻는 듯한 그의 눈빛에 도형이 제 손에 있는 감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억해 주고, 사 준 거요.”
“…그게 뭐라고.”
“비싼 물건보다 이런 게 더 좋아요.”
애초에 해성에게 바란 것도 이런 거였으니까.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눈을 마주하고 하루를 공유하는 여유. ‘우리’라는 이름에 버금가는 추억들까지.
그리 많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고 여겼던 바람들이 모든 게 다 끝난 뒤에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어쩐지 씁쓸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차 안이었다. 우태는 해성이 건넨 커피 한 잔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야, 정해성 씨 드디어….”
“드디어?”
“그, 드디어… 잠이 깬 것 같네!”
우태의 너스레를 들으며 도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사람이 됐네 마네 하는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휴게소를 벗어나 성혁과 약속한 장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휴게소를 들렀으니 졸음 쉼터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했단다.
“얼마 안 걸려. 한… 20분?”
우태의 말에 해성이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갑시다.”
“네?”
“천천히 가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빨리 만나야 옷도 갈아입고, 촬영장에 도착도 하는데.”
“그 정도는 도 실장님이 맞춰 주십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최대한 느리게 도착합시다.”
처음이었다. 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던 사람이 제 입으로 느지막이 가자고 말하다니.
도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해성을 바라보다가, 알감자 한 알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 어느 때 먹던 감자보다도 달다. 이대로 영영 먹지 않고 남겨 두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도형아. 맛있냐? 형도 한 알만.”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말하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안 돼.”
해성이 도형을 붙잡았다.
“네?”
“너만 먹어.”
당황한 건 비단 도형만이 아니었다. 운전을 하던 우태도 놀라 백미러로 해성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거 한 알 먹는다고-”
“도형이 먹으라고 사 준 겁니다. 지 매니저님은 쉼터에 있는 간식으로 사 드리겠습니다.”
“지금 저 냄새 때문에 미칠 거 같은데? 나도 밥 안 먹었어요.”
“괜찮습니다.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느리게 가 달라면서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어쩌라는 거야? 울상을 짓던 우태가 백미러로 도형을 바라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도형의 얼굴을 가리는 해성의 커다란 손뿐이었다.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도형은 알감자 한 알을 입에 쏙 넣으며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치사해서 안 먹어. 안 먹어!”
토라진 듯 투덜거리는 우태의 목소리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 찰나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토록 바라던 일, 상황.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진 이 순간이 행복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시간이 조금만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도형의 바람이 쌩쌩 지나는 도로에 속절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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