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깨닫게 되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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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번 난감한 상황에 봉착해 고민을 하는 건 저뿐인 걸까.
도형은 양옆에 나란히 서서 각자 조잘거리는 유찬과 하경을 힐긋거렸다.
생각해 보면 저는 늘 가운데에 끼는 느낌이다. 유찬과 해성이 기 싸움을 할 때도 그랬고, 이번에는 유찬과 하경이다.
사람만 달라졌지 예민해지고 피곤한 건 매한가지다.
 
‘그냥 우태 형한테 연락할까.’
 
차라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래서 우태가 피곤해지면 꼭 연락 달라고 했던 거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뭘 사야 하나. 선배, 해성 선배님은 뭘 좋아해요?”
 
하경이 물을 때면 유찬은 코웃음을 쳤다.
 
“그걸 왜 도형이한테 묻는지 모르겠네. 전남편 이야기를 하는 게 상도덕에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도형 선배가 괜찮다고 한 건데. 왜 유찬 선배가 굳이 말을 얹는 거예요? 그리고 선배한테는 같이 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요.”
“저도 임하경 씨 보러 온 거 아닙니다. 도형이 보러 온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째서 제가 가운데 끼는 상황만 되면 이렇게 다들 유치해지는 건지.
차라리 그냥 집으로 도망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4층 신사복 코너를 한참 도는데, 때마침 넥타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남색 바탕에 고급스러운 문양이 그려져 있다. 대외적인 스케줄 때 하고 다니면 좋겠거니 싶었는데.
 
“저 넥타이 예쁘다. 그쵸.”
 
하경 역시 넥타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도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다 거기서 거기인가, 싶다.
 
“그러게요. 아… 저런 것도 좋아해요.”
“그래요? 하긴, 해성 선배님은 쿨톤이니까 저런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럼 저 넥타이 기준으로 추천받으면 되겠다.”
 
하경은 잔뜩 신이 나서 매장 안으로 들어갔고, 도형은 그 자리에 멈춰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언젠가의 제 모습도 저랬을까. 해성에게 선물을 사 주고 싶어서 백화점을 누비던 자신을 떠올리다가 픽 웃고 말았다.
 
“웃기냐.”
 
곁으로 다가온 유찬이 넌지시 묻자, 도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넌?”
“난 안 웃겨.”
“그럼 나도 안 웃긴 걸로 하지, 뭐.”
“나 지금 장난 아닌데.”
“응. 나도 장난 아니야. 네가 안 웃긴데 나만 웃기면 이상하잖아.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 길게 한숨을 터트리던 유찬이 매장을 등진 채 도형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저거, 임하경이 너 엿 먹이려는 거라니까?”
“인기 많은 톱스타께서 단어 선택이 너무한데. 엿 먹이는 거라니.”
“아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님 전남편 선물 고르러 가는 거니까, 저랑 같이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냐? 아, 그래. 하네. 저기 저 정신 나간 놈이.”
“유찬아.”
“지가 정해성이랑 잘해 보고 싶으면 너한테 손은 내밀지 말아야지. 그게 맞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도형은 차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참 고민해 보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막말로 네가 정해성이랑 연애만 한 거라면 이상할 일도 아니야.”
“…연애 맞지 않나.”
 
자기도 모르게 툭 던진 말이었다. 유찬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히며 도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인도 안 했어. 그 사람은 알파. 나는 오메가. 충분히 짝을 맺을 수 있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어쩐지 목 끝이 아릿해졌다. 간신히 숨을 들이마시며 달래 보려고 하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형이 계속 거부했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도형아. 그래도 이건-”
“공개 연애지. 결혼으로 위장한 공개 연애. 잘 생각해 보면 방패였을지도 모르고.”
 
괜한 말을 꺼냈구나 싶다.
이래서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건데.
긍정이든 부정이든, 도형이 해성을 꾸준히 생각하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깨끗이 지울 순 없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아야 다른 누군가 끼어들 틈이 생기는 거니까.
곱씹게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건만. 잘못 판단했다.
 
“…뭐, 공개 연애했던 사이라고 치면.”
 
도형은 크게 숨을 마시며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련해졌다는 듯한 미소로 유찬을 올려다보는데, 눈빛만큼은 그러지 못하는 게 보였다.
 
“이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 고작, 전 애인이었을 뿐이잖아.”
“…그게 말이냐?”
“그럼, 말이 아니면 뭐겠어?”
 
도형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쇼윈도 가까이 걸어가 디스플레이 된 제품들을 한참 동안 구경하는데, 매장에서 하경이 걸어 나왔다.
 
“고마워요. 선배 덕분에 괜찮은 거 산 것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다.”
“아, 그리고 이건… 선배 거. 어디 한번 봐요.”
 
하경은 자신이 들고 있던 두 개의 쇼핑백 중 하나를 뒤적였다. 그러곤 아이보리색 넥타이를 꺼내 도형의 목 아래에 대 주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던 하경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맞네.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 순간, 누군가 저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당황한 도형이 뒤를 휙 돌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래?”
 
유찬이 다가와 하경을 슬쩍 밀어내며 물었다.
 
“아니, 누가….”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그 말에 유찬이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기다려.”
 
유찬은 도형의 앞에 서 있는 하경을 한번 째려보고는, 시선을 느꼈다던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런 유찬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경과 도형이 눈을 마주했고.
 
“선배는 참… 쓸데없이 예민하네요.”
 
하경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무슨.”
“아니요, 그냥 그렇다고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이게 긍정적인 사인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유찬을 붙잡아야 한다. 괜한 이야기가 불거지기 전에, 그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게 맞겠다 싶어 핸드폰을 꺼냈을 때.
하경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곤, 다른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듯 붙잡았다.
 
“서로 돕고 살면 얼마나 좋아요. 도형 선배.”
 
순간, 온몸으로 우두두 소름이 돋았다. 당황해 그를 힘껏 밀어내고 뒷걸음질 치던 도형이 입술을 짓씹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밥을 먹고, 영화를 본 것까지는 좋았다.
모두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다. 하지만 바깥으로 나온 뒤에야 해성은 무언가 잘못 판단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형, 이거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데. 같이 볼래요?’
 
몇 년 전, 도형이 영화 티켓을 가져와 내민 적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제게 들어오는 일이 모두 로맨스였는데. 영화까지 그런 걸 봐야 하나 싶었다.
 
‘지 매니저랑 보러 가는 건 어때. 이번에 결혼한다며.’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더 필요한 내용일 것 같았다.
누군가와 운명처럼 만나, 불타는 사랑을 하다가 역경에 부딪히고. 결국 고비를 넘어 결혼에 성공하게 되는,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
그러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였기에 금세 박스 오피스에 올랐던 영화였다. 감동적이라는 평이 여러 번 들려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 도형의 표정이 어땠더라. 생각은 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무척 보고 싶어 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거기다가 영화관의 선택도 틀려먹었지.
 
‘여기, 사람이 별로 없대요. 나중에 형이랑 데이트하러 오면 좋겠다.’
 
아마 용기를 쥐어짜 내서 한 말일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보인 영화관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으니까.
그때, 이 길을 타자고 먼저 말한 것도 도형이었으니.
 
‘…그 말을 위해서였나.’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는 말.
다시 한번 자신을 책망하게 됐다. 도형이 몇 번이나 보내던 신호를 제가 무시했다.
함께하고 싶다는 신호, 추억을 쌓으며 유대감을 키워 가고 싶다는 신호. 그리고 무엇이든 함께하고 싶은 건 저뿐이라는 신호까지.
참 바보 같다. 모든 것들이 다 지나고 난 뒤에야 이렇게 깨닫고, 와닿는 것을 느낀다는 게.
더욱 혼란스러웠던 건, 단순히 도형에게 못한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째서 그 마음을… 왜, 그 눈빛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에서 비롯된 후회였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내밀었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잡았다면.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후회.
 
“미련한 짓 좀 그만해.”
 
혼자 허탈하게 웃던 해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고민한다. 후회에서 비롯되는 욕심을 드러낼 것인가. 숨길 것인가.
이대로 숨기자니 후회를 곱씹으며 살아갈 용기가 없었고.
드러내자니 도형에게 부담을 주는 것만 같아 그것도 싫었다.
한참 고민하던 해성이 선택한 건, 한참 묵혀 두었던 자신의 SNS 계정에 로그인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또, 네게 선택을 미루겠구나.”
 
정말 한심하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려서 도형을 흔들려고 하는 게.
저의 상태를 도형이 알아채고 난 뒤에, 뭐라도 제스처를 주길 바라는 것도.
이기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섣부르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해성은 점심에 들렀던 레스토랑부터 영화 티켓까지, 하나하나 SNS에 업로드를 했다. 원래 같았다면 성혁에게 검수부터 받아야 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맛있었다 변함없이
감동적이더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다. SNS에 사진을 업로드하며 덜어 내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싣는 일.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한 법. 이런 행동으로 자신의 후회나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되는 걸 느낀다.
 
“…도형아.”
 
작게 중얼거리던 해성이 운전석 헤드 부분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자, 지하 주차장의 소음이 귀를 찌르고 들어온다.
 
“후회한다고 하면, 뭐라고 할래.”
 
툭 던진 말에 돌아오는 건, 미미한 소음과 차 안에 맴도는 적막뿐.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말을 잇지 못하던 찰나, 키득거리며 웃는 도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런 도형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뇌리 속에 박혀 있던 도형이 또다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형은 고민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가도, 생각이 참 많아요.’
 
그땐 뭐라고 했더라. 잘못 본 거라며 냉담하게 받아쳤는데.
 
“맞아. 이상하게… 그렇더라. 네 말이 맞았어.”
 
‘내가 형을 얼마나 오래 지켜봤는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그래, 그랬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모르겠다 싶을 땐 마음 가는 대로 해 봐요.’
 
이어지는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해지는 도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는다.
 
‘그러다 보면 답이 보일 거예요. 행동하지 않으면 생각의 끝을 마주하지 못해요. 그게 어떤 결과든 간에.’
 
하지만 도형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스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도형아, 작게 중얼거리던 해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স্লেটTempat cerita menjadi hidup. Temukan sek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