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The An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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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나 준비한 두 사람은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무장했지만,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사인을 해 달라거나 사진을 찍어 달라고 달려드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었다.
 
“왜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기만 할까요.”
 
놀란 도형의 중얼거림에 해성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픽 웃으며 도형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아 준다.
 
“행복해 보여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끼어들 틈이 없는 거야.”
 
해성의 말에 도형은 과거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실 함께 장을 보러 나오는 날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어쩌다 함께 쇼핑을 하러 나가는 일이 생기면 그땐 사람들이 줄기차게 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돌이켜 보면, 그땐 해성과 딱 달라붙어 걸었던 적이 거의 없다.
반걸음, 혹은 두어 걸음 뒤에서 자신이 따라가기만 했지.
 
“우리 형, 진짜 못됐었다.”
“갑자기?”
“응. 옛날 생각하니까 그러네.”
“…혹시, 다시 상처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이 정도 되면 과거는 잊어라,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한데.
해성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도형은 고개를 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토라지고 삐지고 싶어도 그럴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럴 일은 없어요. 누가 상처받을 틈도 안 주거든.”
“그게 무슨 말이지.”
“쉴 틈 없이 사랑해 준다는 말이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고.”
“원래부터.”
 
혀를 샐쭉 내미는 도형의 모습에 해성은 다시 한번 웃었다.
카트를 밀며 이것저것 재료를 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해성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요리를 했다.
재료를 손질하는 것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도형은 손 하나 대지 못하게 한 탓이다.
 
“내가 좀 거들어도 되는데.”
“그럼 의미가 없잖아.”
“무슨 의미요?”
“…음.”
 
식탁에 파스타 두 접시와 와인 잔을 놓던 해성이 한참 고민했다.
그러곤 포크와 스푼, 와인을 가져와 도형의 맞은편에 앉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네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인데. 네가 도와주면, 그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온전히 하고 싶었거든.”
 
이 행복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도형은 정의 내려지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곱씹으며 눈이 휘도록 웃었다.
 
“얼른 먹어 봐. 맛이 어떤가.”
 
이어지는 채근에 잽싸게 포크를 집어 들었다.
스푼에 대고 면을 돌돌 말아 크게 한 입 밀어 넣는다. 도형이 좋아하는 크림 파스타였다.
한참 우물거리며 음미하던 도형이 해성을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너무 맛있어.”
“맛있어?”
“최고예요. 형은 뭐 못하는 게 없네. 진짜 너무너무 맛있어.”
“다행이다. 입맛에 맞아서.”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해성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와인을 열어 각자의 잔에 채우고, 살짝 부딪쳤다. 와인 잔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청아했다.
 
“김도형의 성공적인 복귀를 위하여.”
“정해성의 성공적인 변화를 축하하며.”
“참 나. 그런 것까지 축하하는 거야?”
“그럼. 나한테는 드라마 시청률보다 이게 더 놀라운 일인데요.”
“그거 영,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
“원래 사람이 변하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하잖아요. 비꼬는 거 아니에요.”
“알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향 진짜 좋다.”
“그러게. 괜찮네. 비슷한 라인으로 더 사 둬도 괜찮겠어.”
 
다시금 와인을 음미하며 파스타를 먹는 해성의 모습에 도형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우리 은퇴하고, 너무 할 거 없으면 파스타 집이나 해 볼까?”
“파스타 집?”
“형이 요리해요. 내가 서빙 볼게.”
“둘이 하는 가게야?”
“응. 그러니까 예약을 받는 거예요. 하루에 딱 한 테이블.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을 위한 레스토랑. 되게 희소성 있지 않아요?”
 
포크를 든 채 조잘거리며 이야기하는 도형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의 목소리도, 눈빛도, 웃음도. 무엇 하나 놓칠 게 없다.
 
“도형아, 혹시 내일 시간 돼?”
“내일이요? 음….”
 
도형은 핸드폰을 들어 우태가 보낸 스케줄을 확인했다.
드라마 방영 이후, 눈에 띄게 스케줄이 늘었지만 곧 히트 사이클이 가까워져 오는 덕분인지 일정이 한결 여유롭게 조율되어 있다.
 
“응. 내일은 비어요. 근데 왜요?”
“데이트 나가려고.”
“데이트?”
 
해성의 말에 눈이 동그래진다. 데이트.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단어다.
 
“좋아, 완전 좋아요! 어디로 갈 건데요? 아니, 뭐 할 거예요?”
 
잔뜩 신이 난 모습이 꼭 강아지 같다. 해성은 애써 웃음을 삼킨 채 도형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그건 내일 직접 봐야지,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나는 미리 말해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입을 삐죽거리는 도형의 모습을 보며 해성이 손끝으로 이마를 톡 밀었다.
 
“내일 보면 됩니다. 김도형 씨.”
“치사해.”
“그래서 싫어?”
“글쎄. 그래서 싫을까?”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도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면 좋을까?”
“그러면 후회할 텐데.”
“왜 후회해요?”
“그것도 두고 보면 알지.”
 
능글맞은 해성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더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나, 그때 보지 못한 모습을 지금 하나둘 꺼내 주는 게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으며, 식사를 끝마쳤다. 커다란 와인은 어느새 반 이상이 비어 있었고, 도형은 잔뜩 취기가 올라 눈을 게슴츠레 뜬 상태였다.
 
“쓰읍. 정해성.”
 
뒷정리를 끝마치고 온 해성이 엄한 표정을 짓는 도형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누우가 이렇게 늦게 오래, 엉?”
“도형이 취했구나.”
“쓰읍. 말 안 해! 누우가, 이렇게! 늦게! 오래!”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던 도형이 식탁을 탁탁 두드렸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주사를 부리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도형이 제게 이러는 건 밉지 않았다.
애써 웃음을 삼키며 그대로 쪼그려 앉아 도형과 눈을 마주했다.
 
“뒷정리하고 왔어. 설거지.”
“…또 혼자 두는 줄, 알았잖아.”
“부엌 바로 보이는데, 뭘.”
“몰라. 아무튼 또 혼자 두는 줄, 알았다구.”
 
찡얼거리던 도형의 눈이 촉촉해졌다.
이런 모습마저 귀엽고, 마음이 아프다. 제가 만들어 버린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미안함으로 묻어 두어야만 옳다. 현재에 더욱 충실해야만 행복이라는 집을 쌓을 수 있겠지.
 
“방에 가자, 가서 자자. 도형아.”
“안아 죠.”
 
툭 튀어나온 목소리에 해성이 자리에 굳는다.
첫 번째 이유는 도형의 이런 모습이 생소해서.
 
“으응, 안아 죠.”
 
두 번째는 양팔을 뻗어 애교까지 부리는 모습이 당황스러울 만큼 귀여워서.
마지막은 아마, 이런 도형의 생소한 모습마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거, 나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응, 안아 줄게.”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도형의 두 팔 아래에 제 팔을 넣어 번쩍 안아 든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등을 토닥이며 방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가볍다. 앞으로는 더 잘 먹여야지, 생각하며 도형을 침대에 눕힌다. 먼저 씻고 와서 도형을 씻길까, 먼저 씻기는 게 나을까 생각하던 그 찰나.
 
“혀엉.”
 
도형이 콧소리를 내며 해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제 쪽으로 잡아당기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으응, 형 좋아. 형, 좋아.”
“도형, 도형아. 잠깐.”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재울 생각은 없었다만, 적어도 짐승처럼 달려들고 싶진 않았다.
안달이 나서 도형을 못살게 군다던가, 잡아먹을 기세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도형은 그런 제 마음도 모른 채 연달아 스킨십을 한다. 잘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하나둘,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도형, 아.”
 
해성이 그의 이름을 다급히 부르자, 도형이 보란 듯 해성을 끌어당겨 몸을 뒤집었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었다. 해성의 위에 앉은 도형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형.”
 
또렷한 목소리였으나, 술에 취한 걸 알 수 있는 어투였다.
해성은 한숨을 크게 쉬며 그의 허벅지를 찬찬히 쓸어 올린다. 옷에 가려진 낭창한 허리를 한번 쓰다듬고 가슴으로 향하려던 손은 등에 머물렀다.
 
“씻어야지.”
“먹을래.”
“…뭘?”
“정해성.”
“뭐?”
“먹는다구. 정해성.”
 
김도형이 맞나 싶은 말이었다. 당황한 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도형의 두 손이 해성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다소 서투른 움직임이었으나, 해성을 조급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김도형, 짧은 부름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옷이 말려 올라가고, 찬 공기가 닿는 게 느껴졌다.
 
“…김도형, 너는. 진짜.”
 
치골 위에서 느껴지던 무게가 서서히 다리 쪽으로 향한다.
몸 위로 열꽃이 피는 것만 같았다. 흐드러지게 피던 열꽃은 어느새 하체로 향했고, 휘몰아치는 열감이 한곳에 집중됐을 때.
해성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을 뻗자 만져지는 건 도형의 부드러운 머리칼이다. 그대로 힘껏 그러쥔 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해성은 다시금 몸을 뒤집어 도형을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빨리.”
 
앞으로 술을 먹여야 하는 건지, 먹이지 않아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도형의 머리칼을 한번 쓸어 올리고는, 조금 전처럼 도형의 입안을 헤집었다.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붉게 달아오른 도형의 얼굴도, 술에 취해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도.
무엇보다,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그러쥔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사랑해.”
 
짧게 터지는 한마디에 가쁜 숨이 묻어 있다.
 
“사랑해, 도형아.”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 속에는 이제 곧 터트릴 그의 열기가 담겨 있었다.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해성은 더욱 가열 차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찔해지다가 목 끝이 묵직해진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었을까.
지난날, 아둔했던 자신을 다시 한번 질책하며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서서히 지는 노을이 불그스름한 빛을 여기저기에 퍼트린다.
그에 잠식하는 것처럼, 해성과 도형 또한 잔뜩 오르는 열에 취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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