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미련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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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고, 시련의 반복이라고 말했던가.
도형은 지금 이 순간, 그 말을 뼛속까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커플 포스터에 이어 개인 포스터를 찍은 것까지는 좋았다.
해성이 촬영할 땐 유찬이 기다렸다는 듯 저를 낚아채 가서 조금 전 커플 샷을 찍을 때처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지만 남은 건 단체 사진.
스튜디오 건물의 옥상에서 촬영이 이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작품의 제목처럼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효과를 입힐 거라는 설명 또한 흥미로웠고.
말 그대로 촬영에만 몰두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해성이 툭 던진 한마디에 상황이 묘하게 뒤바뀌어 버렸다.
 
“전작에서 대립 구도였던 유진과 예현이 이번 작품에서는 관계성이 달라지는데, 그 부분을 살리는 건 어떨까요. 아무래도 유진이 예현이에게 도움을 받는 장면도 있고, 유진 역시 예현을 통해 깨닫는 게 많은 시즌인 것 같은데요.”
 
사진작가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해성을 칭찬했다. 캐릭터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라는 말에 뒤늦게 도착한 나 감독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해성과 소연이 앞줄에 서고, 도형과 유찬이 뒷줄에 서기로 했던 구도가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도형과 유찬이 앞줄에 섰고, 소연과 해성이 사다리에 올라타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됐다.
소연의 뒤에 서야 했을 도형은 조금 전 한마디로 해성의 앞에 서게 됐다. 차이라고 해 봐야 고작 한 칸 정도였다. 별다른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서 있는 위치를 바꾸었을 뿐인데도 기분이 미묘했다.
다양한 감정이 몰아칠수록 피로는 배가 된다. 어서 빨리 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각자 생각한 네 사람의 관계성을 한번 보여 줍시다. 그게 한 앵글에 잡히면 좋을 것 같거든.”
 
네 사람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각자 생각한 네 사람의 관계성. 머리에 떠오르는 건 있었지만, 이게 과연 조화로운 그림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진작가가 요구한 이상, 거부할 수는 없다. 이미 나 감독마저도 오케이 사인을 내렸고, 만약 이 사진을 사용하기 어렵다면 다른 사진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도형의 시선이 해성을 지나 소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제 곁에 서 있는 유찬을 마주했을 때.
 
‘괜찮아.’
 
무음으로 속삭이는 다정한 한마디에 알 수 없는 확신이 생긴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긴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이 생각한 예현을 그대로 보여 주면 될 일이다. 저를 믿어야 배역도 믿는 것이 된다. 유찬을 한참 바라보던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 작가가 슬레이트를 높이 들어 올렸다. 각자의 역할을 그대로 녹이면 된다는 신호라는 걸, 네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던 슬레이트가 딱!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맞물린다. 그리고 네 사람은 저들이 해석한 대로 캐릭터의 포즈와 표정을 해석해 표현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한 상황이었다.
유찬과 도형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도형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였고, 유찬은 도형을 여전히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건 단연코 해성이었다. 한쪽 손을 소연과 맞잡은 채 눈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다른 손은 도형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다.
 
‘네가 유일한 해답이야.’
 
주인공들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해결될 때, 예현에게 건네는 이야기였다. 전작에서도 그랬고,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오는 대사.
결국 모든 일의 키워드는 예현이 쥐고 있다는 해석이 작품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했지. 도형 또한 원작자의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셔터가 연달아 눌렸을 때, 슬레이트가 한 번 더 딱!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포즈를 바꾸라는 신호였다.
유찬은 기다렸다는 듯 해성을 올려다보며 눈에 힘을 실었다.
극 중에서 온영은 예현을 끈질기게 찾아오는 유진을 견제한다. 1부에서 보였던 대립 구도가 어느새 형제애와 같은 애틋함으로 발전했다는 기획서를 읽은 기억이 났다.
유찬이 표현한 눈빛은 아마 해성을 향한 개인적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성은 도형의 몸을 반쯤 돌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도형은 여전히 유찬의 손을 붙잡은 채 소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도형을 마주하며 손을 뻗었다. 네가 해답이라는 그 대사에 걸맞은 포즈였다.
그렇게 여러 번 셔터 음이 들리고 난 뒤에야 모든 촬영은 끝이 났다.
 
“좋아! 좋았어! 역시 이 넷은 걱정이 없었다니까!”
 
호탕하게 웃는 사진작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도형은 크게 한숨을 뱉으며 소연에게 슬쩍 눈인사를 했다.
제 생각과 똑같이 움직여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제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촬영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했는데, 어깨를 붙잡은 해성이 손을 내려 두지 않았다.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만이 고정되어 있을 뿐. 손은 여전히 멈추어 있다.
 
“정해성 씨.”
 
그의 손목을 붙잡은 건 유찬이었다. 이윽고 해성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간다. 도형을 떠난 눈빛은 금세 차게 식었다.
 
“촬영 끝났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성이 도형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유찬의 손을 탁, 뿌리쳤다.
평소 정해성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 손짓이었다.
 
“가자, 도형아. 오늘 진짜 고생했어.”
 
유찬은 일부러 도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바짝 밀착하는 건, 뒤에서 저들을 바라보고 있을 해성을 견제하는 행동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도형 또한 덤덤하게 그를 따라갔다.
더는 해성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굳이 그를 의식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래야 저 또한 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성의 곁으로 소연이 다가왔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한참 지켜보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캐릭터 해석은 완벽하지만, 눈빛은 유진이 아니던데요. 정해성 씨.”
“…….”
 
소연을 돌아본 해성이 살짝 미간을 일그러트린다.
아까부터 사사건건 제게 무슨 참견을 이렇게 하는 건지.
귀찮은 마음에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소연이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무슨.”
 
그리고 당연하게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인 그녀가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입을 달싹였다.
 
“김도형 씨 잡고 싶으면, 그 콧대부터 스스로 꺾어야 할 거예요. 꼿꼿한 톱스타 정해성으로는 김도형 절대 못 잡지.”
 
순화해서 한 말이었지만, 해성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콧대부터 꺾으라는 건 단순히 정해성의 모습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
저는 도형을 잡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 알고 지내던 형 동생. 혹은 같은 업계의 선후배 정도로만 남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어렵다면 그저 자신의 사과라도 받아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 그게 전부였을 텐데. 눈앞의 여자는 대체 무얼 본 걸까.
흔들리는 해성의 눈빛에 소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스태프들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생하셨어요, 오늘 촬영장 분위기 너무 좋다.”
 
그녀의 달뜬 목소리에도 해성은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그저 짜증 어린 한숨을 힘껏 터트리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릴 뿐.
 
***
 
촬영이 끝난 뒤, 간이 회식이 이어졌다. 촬영을 하느라 고생한 모든 스태프들에게 고기를 먹여야 한다는 나 감독의 의지였다.
배우들을 위한 자리는 따로 마련됐지만, 소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여자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국, 테이블에 남은 건 해성과 도형, 그리고 유찬뿐이었다. 어색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 술잔을 부딪치며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그들의 주변을 채워 주고 있었다.
 
“술은 안 마시는 모양입니다.”
 
먼저 입을 연 건 유찬 쪽이었다. 도형의 술잔과 제 술잔을 채운 그가 해성을 힐긋 쳐다보았다.
 
“예, 이런 자리에서 술 안 마십니다.”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유찬이 미간을 좁혔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입안에 맴도는 말은 입 밖으로 터트리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해성이 저보다 선배인 건 확실했으니까.
 
“우리끼리 짠 하자.”
 
사진작가와 한 번, 감독과 한 번, 스태프들과 한 번. 그러니 이번이 딱 네 번째 건배였다. 도형은 옅게 웃으며 가득 찬 술잔을 유찬의 술잔에 부딪혔다.
사실 술을 더 마실 수 있는 속은 아니었다. 그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
무언가 결심한 듯 잔을 힘껏 그러쥐었을 때.
 
“어?”
 
해성이 도형의 술잔을 낚아채 갔다. 잔을 가득 채웠던 술이 손 위로 흘러넘친다. 깜짝 놀란 건 도형뿐만이 아니었다. 유찬 역시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해성 씨.”
 
도형의 부름에 해성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술 안 드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이 빠져서 묻는 유찬을 보며 픽 코웃음을 쳤다.
유찬은 티슈로 입가와 손을 정리하는 해성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도형의 술을 마신 걸까. 자신이 따라 줘서 그런 걸까.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면 안 되는데, 얼굴로 드러나는 불만은 숨길 수가 없다.
다시 도형과 제 잔을 채웠다. 쪼르륵, 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이번엔 방해하지 않겠지. 웃으며 잔을 부딪쳤을 때, 해성은 기다렸다는 듯 도형의 잔을 낚아챘다. 조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눈에 힘을 준 채 유찬을 노려보고 있다는 점. 술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결국, 지켜보던 유찬 또한 더 참지 못한 채 큰 소리를 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술 안 드신다면서요.”
 
술을 넘겨 비어 버린 잔을 제 앞에 둔 해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제 곁에 앉은 도형을 힐긋거렸다.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더니, 날짜를 확인하고는 짧게 혀를 찼다.
 
‘…왜 그러지?’
 
당황한 도형이 제 얼굴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열기가 느껴진다. 보기 싫을 정도로 빨갛게 됐나.
그리고 주변을 살피는 해성을 가만히 바라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만 먹여요.”
“정해성 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김도형 씨, 지금 술 안 받는 주기입니다.”
“…뭐라고요?”
 
당황함이 역력한 유찬의 표정에 해성이 고개를 저으며 도 실장에게 메시지를 적는다.
도형이 바로 집에 갈 수 있도록 우태에게 연락을 넣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히트 사이클.”
 
툭 던진 말에 도형이 놀란 듯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는 히트 사이클 알림이 어느새 화면에 떠 있었다.
 
“히트 사이클 앞두고 술 마시면 몸에서 안 받는 체질입니다. 적당히 먹이고 이만 집에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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