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 걸까.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지, 도형은 잠시간 생각했다.
눈을 떠 보니 해성은 돌아갔고, 유찬과 우태가 거실에 앉아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태야 베타라서 괜찮다지만, 유찬은 알파인데. 자신의 페로몬이 혹시라도 그에게 영향을 줄까 불안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자, 유찬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억제제 먹었어. 괜찮아, 도형아.”
그러니까 여기 앉아. 이어지는 조그만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으며 우태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유찬의 표정에서 서운함이 보였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억제제를 먹었다고 한들, 본능을 가뿐히 뛰어넘고 이겨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도형이 자리에 앉은 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고, 먼저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정해성이랑 별일 없었지.”
한참 골몰하던 우태가 먼저 입을 열자, 도형이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응. 아무 일 없었어.”
“하….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런 건데.”
“형,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잖아요.”
“내가 미안하다. 도형아.”
“아니야, 형. 정말 별일 없었다니까?”
“전화를 받았어야지, 잠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멍청한 놈, 나가 죽어, 지우태….”
우태의 자책이 이어질수록 도형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해성이 있다는 걸 늦게라도 알렸어야 했다. 그건 자신의 실책이다.
아무리 제 페로몬에 익숙해진 해성이라고 해도, 알파와 오메가였다. 그것도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와, 러트 가능성이 있는 알파.
“억제제가 안 들어? 병원 다시 가 볼까?”
우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도형이 고개를 저었다. 애써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야, 그건 아니고…. 어제 집에 들어와서 약을 먹으려 했는데, 잘 안 됐어. 어지럽고, 몸이….”
말을 잇던 중, 유찬의 존재를 깨닫고 입을 꾹 닫는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 몸이 달아서, 해성을 떠올리며 스스로 위로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구석구석을 헤집는 손길이 부쩍 그리워진 밤이었다고. 하필 몇 년 만에 만난지라 그 욕망을 해갈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말을.
‘…유찬이 앞에서는 절대 말 못 해.’
고개를 살살 젓는 도형에 유찬이 짧게 헛기침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물론, 도형이 해성을 떠올렸다는 사실은 모를 테지만.
우태 또한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더 묻지 않은 채 거친 탄식을 뱉었다.
“…도형아, 내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니,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혹시. 진짜 혹시, 정해성 부른 거야?”
“아니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억울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절대 아니야.”
도형의 단호한 말에 우태와 유찬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찾아왔어. 우리 집으로.”
“정해성이 왔다고?”
유찬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우태의 얼굴도 서서히 일그러지는 것 같아서, 도형은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고맙다고 문자 보냈어. 히트 사이클인 거 먼저 알고 일어나게 해 줬으니까. 그거 고맙다고.”
도형의 말에 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아니, 응당 그래야 할 일은 맞다. 이혼한 부부라는 걸 떠나서 같은 업계 선후배임은 분명하니까.
다만, 이 한숨 또한 타당했다. 매니저임에도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것뿐이었어. 이후에는….”
따로 말은 없었지만, 정해성이라면.
김도형과 결혼했던 정해성이 아닌, 옆집 다정한 형이었던 정해성이라면.
“내가 걱정돼서 찾아왔다고 하더라. 히트 사이클 어떻게 겪는지 뻔히 아는데, 약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것 같아서. 걱정됐대.”
그랬을 게 뻔했다. 어릴 적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해성의 휴식기와 자신의 히트 사이클이 겹치는 때면 언제나 집으로 찾아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약은 먹었어? 억제제 잘 들어? 병원 그대로 다녀도 괜찮아?
그때, 도형은 착각에 빠졌다. 해성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기에,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현실을 깨우쳤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습관이야. 그 형.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럼 약만 먹이고 가든가. 왜, 왜 굳이 남은 거냐고….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여전히 해성에게 부정적인 우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는 게 그렇게 어렵나? 꼭 여기에 있어야 해? 히트 사이클 온 거 뻔히 알면서.
우태의 속내가 훤히 드러나니, 도형이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얹었다.
“죽 만들어 줬어. 내가 아무것도 못 먹으니까.”
“…정해성 편드는 거 아니지?”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고마운 일로 끝내자는 거야. 괜히 열 올리고, 신경 써서 뭐 해.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덤덤하게 뱉으면서도 눈치는 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안일한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사과해야 할 일은 맞다. 해성의 연락을 받고 여기에 오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을까. 무수히 많은 생각에 갇혀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 배우에게 알파의 존재만큼 위험한 건 없을 테니까.
“너무 안일했어. 내가.”
잔뜩 주눅 든 도형의 말에 우태가 질 세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이 미안하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릴게. 전화도 꼭 받을 거고.”
소리를 최대치로 높이자. 아니, 스피커를 달아 둘까.
우스꽝스러운 내용이었지만, 말을 잇는 우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다.
“다음부터는 주기 때마다 형이 챙겨 줄 테지만, 너도 잘 챙겨. 또 이런 도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우태가 다시 숨을 삼켰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도형의 손등을 두어 번 두드리며 목을 긁는 탄식을 뱉었다.
“이런 도움, 받지 말자. 자존심 상하잖아.”
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해성이 저를 챙겨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거나. 그가 저를 걱정해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사실에 온갖 의문과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건 비밀로 해야지.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될 감정이었다.
적어도 저를 응원해 주고, 격려하며 지지해 주는 우태에게는.
“응, 알았어. 형.”
애써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돌려 유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종일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유찬이 신경 쓰여 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지 않음은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아무 일 없었으면 됐다.”
우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 뒤 유찬을 힐긋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 곁에 앉은 도형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불 정리, 해야 하지?”
“내가 할게.”
“됐다, 인마. 또 세월아 네월아. 그대로 둘 거 뻔하니까.”
“아니야. 내가 한대도.”
“새 이불 어디 있냐. 드레스 룸에 있나?”
우태는 도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휘적휘적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거실에 남은 건 유찬과 도형. 단 두 사람뿐이었다.
이상하지. 평소에는 그렇게나 편안하게 느껴졌던 유찬이 오늘따라 불편했다. 알파의 페로몬은 억제제로 억누르고 있을 텐데.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아 괜히 애꿎은 손만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뿐이다.
“유찬아. 화났어?”
해성과의 접점은 우태 다음으로 유찬이 가장 예민했다. 그건 <별을 담은 잔>에 캐스팅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다 지나간 이야기로 기사를 들먹일 때도, SNS나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올 때도 유찬이 제일 격하게 반응하고는 했다.
‘지들이 뭘 안다고 이렇게 써. 직접 보기라도 했대? 널 안대? 정해성이 어떻게 했는지,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있대?’
어느 순간엔 그 말들이 무척 고마웠고.
또 어느 순간에는 유찬의 말들에 과거를 곱씹기도 했다. 결론적으로는 그 말에 이따금 아프기도 했지만, 화를 내지 않는 저 대신 토해 내는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중에는, 그의 말들이 속 시원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때만큼은 유찬과 어색해질 일이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는 소용없는 말이지만.
“유찬아.”
“어, 화났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도형의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때.
“나한테, 너무 화가 났어.”
예상하지 못한 유찬의 대답에 놀란 도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랑 제일 친하다고 자부하면서 네 히트 사이클 주기도 몰랐어.”
“친구라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고 있지는 않으니까.”
“친구 아니야.”
마음이 따끔거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곧게 마주하는 유찬의 시선에 온몸이 꼿꼿하게 굳고 만다.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언제부터 이렇게 단호했지. 아니, 저를 이런 눈으로 쳐다본 게 언제부터였지.
항상 다정하고, 따뜻한, 이 세상에서 저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두 번째 타인으로서 자리 잡았던 유찬이었는데.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감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해성이 저를 이런 식으로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떠올리게끔 하는 눈빛이다.
“…유찬아, 그건.”
“대답 안 했어. 너. 그것도 알아.”
“….”
도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슬쩍 시선을 피했다.
스스럼없이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유찬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서, 정해성 견제하기에 급급했지 막상 널 챙길 생각은 안 했어.”
“이미 충분히 챙겨 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이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서 벌어진 문젠데, 왜 네가 자책을 해.”
“만약에… 만약, 정해성이 아니라 내가 달려왔더라면.”
도형은 유찬의 한마디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랬더라면, 유찬이 해성처럼 참을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우태가 우려하던 상황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안 될 일이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어떤 말을 찾아 내어 주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소파 위에 올려 둔 우태의 핸드폰이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윤세리 대표님]
“대표님?”
평소 같았다면 우태를 불러 핸드폰을 건넸을 테지만, 기분이 묘했다. 어쩐지 제가 먼저 받아야 할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찾아왔다.
“유찬아, 미안해. 잠깐만. 대표님 전화야.”
“그거 우태 형 핸드폰 아니야?”
“응. 맞아. 어차피 대표님인데, 뭘.”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던 도형이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흠, 짧게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네, 대표님. 저 도형이에요.”
[…우태랑 같이 있니?]
“네, 같이 있는데… 무슨 일이세요?”
대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순간 불쑥 밀려오는 불안감에 애꿎은 아랫입술만 꾹꾹 누르게 된다.
[하, 이거 정말….]
잠시 머뭇거리던 대표의 목소리가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뭐야, 누구 전화인데?”
이윽고 이불과 시트를 모두 걷어 방에서 나오던 우태가 놀란 듯 유찬과 도형을 번갈아 보았다.
“대표님이라고 하던데요.”
유찬의 대답에 우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도형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빼앗듯 낚아챈 뒤,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네, 대표님. 접니다. 무슨 일이세요?”
[지우태. 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도형이 제대로 케어하는 거 맞니?]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우태가 흠칫 놀라 허리를 곧게 세웠다.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대표가 호통치는 소리에는 영 적응이 어려운 법이다.
“그, 대표님…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주셔야….”
[김도형 내일 기사 뜰 거야.]
자포자기한 대표의 목소리에는 화를 꾹꾹 억누르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당황한 우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도형 또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기, 기사요? 무슨 기사요. 무슨 기사가 뜨는데요!”
[너는, 하…. 지우태!]
다시 한번, 대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화들짝 놀란 도형이 눈을 끔뻑거리며 재차 주먹을 힘껏 그러쥔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불쾌한 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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