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마지막 시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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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연이 제게 남긴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하라.
참 잔인한 이야기다. 제게 있어 가까운 사람이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뱉는 사이, 뒤쪽에서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찬과도 촬영이 있었지.
 
“유찬….”
 
당연히 그를 생각하고 돌아봤는데.
 
“그 이름이 왜 나오지?”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의 해성이 서 있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던 도형이 제 왼편을 툭툭 두드렸다.
 
“앉으세요. 선배님.”
“대답부터.”
“아니-”
“대답.”
 
사람이 바뀌고 나니 소심해졌다.
이상한 곳에서 집요해지고, 질투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은근슬쩍 질투심을 내비친다.
물론, 이런 모습이 싫은 건 아니었다. 늘 과하지 않은 방법과 선을 지켜서 저를 대했으니까.
싱글벙글 웃던 도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그 이름이 왜 나왔을까요.”
“…….”
 
예전에 이 표정을 봤다면 화가 났나, 지레 겁부터 먹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뚱해진 거다.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해성이 화가 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표정 변화의 폭이 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도형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걸.
면밀히 지켜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더 이상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뭐, 그래.”
 
삐졌다.
저를 쳐다보지 않는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형은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아니, 그렇잖아요. 오늘 촬영은 유찬이랑 소연 선배. 두 사람이랑 같이 하는 거고.”
“응.”
“형, 아니. 선배는 촬영이 없는 날이니까. 당연히 둘 중 한 사람인데, 소연 선배님은 조금 전에 리허설 갔단 말이에요.”
“응.”
 
참, 귀엽다.
삐졌으면서도 재깍 대답을 하는 건 귀여운 일이지.
도형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해성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화들짝 놀란 해성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김도형, 너.”
“형 생각은 계속 하고 있어요.”
 
놀란 해성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이건, 아마.
 
“부끄러워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시선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헛기침을 하는 걸 보면.
키득거리며 웃던 도형이 슬쩍 손을 놓았다.
 
“…여우 다 됐어.”
“선배 조련사라고 해 주세요.”
“여우.”
“이 정도는 해야 안달이 나지.”
“능글맞아졌고.”
“누구만 하려고.”
“한마디도 안 져.”
“원래 그랬다, 뭐.”
 
해성은 눈을 흘기며 도형을 바라보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다가 웃고, 다른 곳을 바라보다 또 웃었다.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더더욱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해성의 물음에 도형이 으음, 길게 고민하는 척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해성 선배님 생각?”
“아닌 거 알아. 사실대로 말해 줘.”
 
말투도 제법 순해졌다.
예전 같았다면 말해, 이야기해. 조금은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을 텐데.
요즘에는 부탁하는 말투로 제게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 또한, 저를 존중하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으음.”
 
소연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괜찮겠지 싶었다.
어쨌든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니까. 더불어 해성의 과거 이야기도.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떠올리며 읊는 도형의 목소리에 해성은 그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그래서, 자꾸 그 말이 생각나요.”
“소연 씨가 한 말?”
“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의심하라는 말.”
 
도형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해성이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사실, 근래에 일어난 일들.”
 
잠시 말을 아낀 해성이 맞잡은 손을 꽉 누른다.
 
“몇 가지는,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모를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성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으므로.
 
“지난번에 그래서…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너 귀국하고 난 뒤에.”
“응….”
“어떻게 생각해?”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만큼 잔인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딱 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해성에게만큼은 솔직할 수 있는 것.
 
“…가까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 사실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누굴, 먼저 의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렇지, 힘들지.”
 
금세 수긍하며 공감해 주는 해성의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당장 의심하라는 건 아니고. 조금… 주의 깊게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형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응. 알아요.”
 
해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도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금세 주변을 의식하고 손을 뗐다.
흠, 짧게 헛기침하며 의자에 기대앉는 해성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대본을 살피던 도형이 문득 떠오른 질문에 해성을 돌아봤다.
 
“그나저나, 왜 온 거예요? 오늘 쉬는 날이잖아.”
“구경하러.”
“무슨 구경?”
“연예인 구경.”
“…네?”
“연예인 구경하러 왔습니다. 김도형이라고, 라이징 스타가 될 분이 여기 계신다고 해서.”
 
짓궂게 장난치는 그를 바라보며, 도형은 다시금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태프 하나가 도형을 불렀다.
 
“너 리허설인 모양이다. 얼른 가 봐.”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끝날 때 모시고 가려고. 지 매니저님한테도 말해 놨어.”
“응. 잘하고 올게.”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금세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린 도형이 스태프가 부른 방향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해성이 옅게 한숨을 쉬며 턱을 매만졌다.
도형과 가장 가까운 사람.
저를 제외하면, 유찬과 우태. 그리고 지난번 인사를 나누던 스크립터뿐이다.
 
‘…스크립터가, 굳이.’
 
 
듣자 하니 도형과 동창이라고 하던데.
애초에 이번 일은 이득과 손실의 주체가 명확하다.
누군가는 이 일로 얻는 게 생길 것이고, 누군가는 가진 것마저 잃게 될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연출 팀과 배우진은 잃는 쪽에 가깝다.
이번 작품을 끝으로 업계를 떠난다면야 상관없겠지만.
 
‘…그런 소문이 난 사람을, 차기작까지 끌고 갈 감독이나 팀은 없을 테고.’
 
그럼, 누가?
순간, 머릿속으로 유찬과 우태가 떠올랐다.
일단 유찬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평판이 떨어져 도형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면.
 
‘최유찬은 도형이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유찬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제 그림자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거기 제 자리입니다.”
 
퉁명스럽고 불만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귀에 익숙한 음성.
 
“정해성 선배님.”
 
유찬이었다.
해성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도형의 자리에 앉았다.
 
“거긴 도형이 자리인데.”
“네.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리허설 간 것도 봤고.”
“…아, 예.”
 
유찬은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으로 제 자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괜히 의자를 툭툭 털고 앉았다. 적대적인 행동이란 걸 알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미안했지. 유찬의 마음을 몇 번이나 전해 듣고도 도형을 가로챈 것 같아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과 의심이 한데 겹친다.
한참 고민하던 해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데.”
“짧고 굵게 부탁드립니다. 곧 리허설 들어갈 것 같아서.”
“나, 도형이 사랑합니다.”
“…진짜 짧고 굵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고백에 유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아니, 일그러졌다고 해야 할까. 이건 뭐야, 싶은 표정으로 해성을 보던 그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나 어차피 도형이 포기했습니다. 이젠 진짜 친구예요.”
“포기 유무를 떠나서, 내 마음을 확실히 밝혀야 최유찬 씨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유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해성이 자신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대답했으니까.
 
“그래서, 둘이 어쩌기로 했습니까?”
“그건 내가 할 대답이 아닌 것 같고. 도형이에게 직접 들으세요.”
“와, 차인 사람한테 이러깁니까?”
“그게 도형이한테도 더 편할 것 같아서. 내가 말하고 나면, 도형이는 최유찬 씨한테 더 미안해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되묻는 해성의 말에 유찬은 질린다는 듯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뭐, 예. 알겠습니다.”
 
물어봐야만 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뿐이 아닌 건 알지만.
머리에 떠올랐을 때 넌지시 건네야 했으므로.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꺼내기 자연스러운 화제로 유찬에게 물었다.
 
“언제 포기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확인 사살 하십니까?”
“아니요. 궁금해서요.”
“…정해성 씨가 도형이 안고 뛰쳐나갔던 그날부터.”
 
포기의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 ‘가능성’ 또한 적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도형이 의심할 수 없다면, 저라도 그 끈을 잡고 있어야지.
 
“해외 로케에 나갔을 때. 도형이가 연기에 몰입을 못 하길래 내가 그랬거든요.”
 
참, 이런 마을 제 입으로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유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를 정해성 씨로 생각하라고.”
 
해성의 눈이 흔들렸다.
어떤 장면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과거를 고백하는 상황.
처음 본 사람이기에 더욱 쉽게 진심을 터 놓는 장면이었지.
그러나 예현은 그 속에서 기묘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저를 탓하지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 온영을 보면서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 역할을, 저를 떠올리며 했단다.
 
“그때 느꼈어요. 아, 나는… 스스로도 알고 있구나.”
 
뒤이어 유찬의 시선이 해성에게 향한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침묵이 제법 길어졌을 때, 유찬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해성 씨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 존재라는 거.”
“…….”
“뭐, 됐습니다. 이미 지난 일 말해서 뭐 합니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투덜거리던 유찬이 괜히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그리고 해성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비장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기회만 생기면 나는. 다시 김도형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연인은 언제든 헤어질 수 있지만, 친구는 헤어짐이 없죠. 그렇게 생각하면 인연의 끈은 내가 더 강해요.”
 
나름의 선전 포고다. 그러니 도형을 행복하게 해 주라는 뜻처럼 들렸다.
해성은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곧이곧대로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건 정해성답지 않지.
 
“연인이 아니라, 부부라면.”
“…….”
 
잠시 말을 잇지 않고 생각하던 유찬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꼭, 놀리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아. 그 부부의 끈을 놓쳤던 장본인이 눈앞에 있네.”
 
결국, 해성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 방 먹었다. 차라리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는 편이 더 멋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헛웃음만을 주고받았다.
머릿속의 인영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차고 넘칠 만큼 곱씹고, 끌어안기를 바라며.
결국, 끝에 다다르는 감정의 바다가 깊고 따뜻하기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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