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깨닫게 되는 (3)

0 0 0
                                    

“…정-”
 
해성의 이름을 부르려던 유찬이 입을 꾹 닫았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저와 도형의 존재 역시 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쪽을 힐긋거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잘못 보셨습니다.”
 
유찬은 도형을 붙잡은 해성의 손을 떼어 냈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세 장정이 서 있으니 통행이 꽤 불편할 만하지. 저들에게 이목이 모두 쏠려 있었다.
 
“무슨-”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평소 유찬의 목소리보다 낮다. 모자를 조금 더 눌러쓰며 주변을 힐끔거리는 그의 모습에 해성이 아, 짧게 탄식을 뱉었다.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건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나자 유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자, 민성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도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 어어….”
 
에스컬레이터 위에 올라서면서도 그의 시선은 뒤에 덩그러니 남은 해성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가뜩이나 해성의 생각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정말 우연히 해성을 만났다.
돌고 돌아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 하나가 도형의 머리를 어지럽게 헤집고 있었다.
유찬은 그런 도형을 힐끔거렸다. 답답한 마음에 절로 숨이 탁 터져 나온다.
스포츠 매장이 즐비한 5층에 도착하자마자 도형의 핸드폰이 잘게 진동을 일으켰다.
 
정해성
 
곤란하게 만들 뻔했네요. 미안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조심히 돌아가세요. 반가웠습니다. 
 
 
해성이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메시지가 불편하고 의구심만 들었을 텐데, SNS가 만들어 낸 헛된 기대감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미소가 만개하려 했다. 그러나 곁에 서 있는 유찬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저는 지금 유찬의 다정함에 기대기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건, 해성을 배제한 채 그를 잊은 미래가 아니었다.
적당히 덮어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였지.
가능성과 연기에 대한 부분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나, 해성과 관련된 건 아니었다.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으면서 유찬의 다정함에 끊임없이 기댈 수는 없다.
왜 이렇게 늦게 깨달아 버린 걸까.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니 대답해야 했다. 유찬의 고백에 대한 답을, 이제는 주어야 할 때가 왔다.
 
“유찬아.”
“어?”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해.”
 
갑작스러운 도형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다.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대로 옷을 사고 그냥 집에 가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래. 옥상 정원으로 갈까?”
 
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뱉는다.
바보 같다. 왜 이렇게 도형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응. 거기로 가자.”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옥상 정원으로 가는 길이 그리 먼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옥상 정원에 도착해 구석의 벤치에 앉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앉아 있던 유찬이 괜히 몸을 움츠렸다가 펴며 말했다.
 
“얼른 이야기해. 나 오면서 마음의 준비 단단히 했으니까.”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말해야만 했던 일인데.
 
“…미안해.”
 
도형의 한마디에 유찬이 소리 없이 묵직한 숨을 터트렸다.
 
“뭐가 미안한지 말해야 알지.”
“나, 너한테 의지했어.”
 
조금 더 그래도 돼. 유찬은 목 끝까지 터져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킨다.
그래, 김도형이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겠지.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모른 척 눈감아 버리는 게 되지 않는 사람이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어.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었는지도 몰라. 네가 주는 애정이나, 올곧은 마음이면 나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응.”
“그렇다고 과거에서 허덕이는 건 아니야. 분명, 옛날보다 나아졌고. 좋아진 건 확실해.”
 
도형은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볼을 스치는 이 차디찬 바람 한 줄기가 유찬에게 너무 깊숙이 스미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
위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아직, 해성이 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아.”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괜찮지 않아. 내가,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어.”
 
단호한 도형의 말에 유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한다.
분명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속이 말이 아니라는 건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도형의 다정함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단호해져야만 포기하리라 생각하는 것일 테지. 이 또한 도형의 장점이었다. 제가 이끌린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받았으면 해.”
“김도형.”
“나는, 네 마음을 받을 수 없어. 아니, 받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유찬아.”
 
이따금 도형이 저보다 더 어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거야.”
 
군더더기 없는 거절만큼 확실한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인 거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에 유찬은 도형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네가 너무 소중해. 그래서 자꾸 미루게 됐나 봐.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도 예현이처럼 벗어나기만 하면… 그러면, 당연히 그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저 또한 알고 있던 사실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이 언제든 닥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거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접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린 건 저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차마, 그 말을 전할 용기는 없다.
 
“그래도 고마워. 좋아한다는 말, 허투루 받아들인 적 없어. 고마워. 유찬아.”
 
도형의 말에도 유찬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면 이럴 때 멋있는 말로 갈무리를 하던데.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도형의 손을 힘껏 잡아 주고, 그 위를 툭툭 두드려 주는 것뿐.
서서히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 술렁임도 잦아들겠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역시, 포기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수다] 별담잔 목격썰 (사진유)
 
찬돟 개잘어울림
둘이 럽라 ㅇㅈ ㅆㅇㅈ
얼굴합으로 쌓인 서사 오조오천개
그래서 별담잔 언제볼수잇는대
찬돟 럽라 리얼까지 가보자고
 
댓글(320)
ㄹㅇ 찬 잘생겻다
돟 먼데… 이왜진잘생
저대로 열애설이나 터져버려
└222222
└└333333
└└└ㅈㄹㄴㄴ
└└└└ㅇ? 꼭터졋음 좋겟다 소취
확실히 정해성이 아깝네
└무맥락보소
└└222 갑자기 ㅈㅎㅅ이 왜?
└└└ㅇㅈ 셩이아깝지
└└└└ㅈㄹ 돟 실제로 보면 말도 못붙일것들이ㅋ
돟천사야하늘에서떨어졋니보자마자눈멀엇잔아돟제발빨리나와
 
액정 화면을 슥슥 내리던 우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뒤에서 대본을 보는 도형을 힐긋 돌아본다.
 
‘형, 나 유찬이한테 말했어.’
 
어젯밤, 갑자기 걸려 온 도형의 전화 한 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 나, 아직 해성이 형 제대로 못 지웠어.’
 
이렇게까지 솔직한 적은 없었다. 매번 괜찮아질 거라고, 이제 예전보단 낫다는 말로 저를 안심시키고는 했었는데.
이 정도로 제 마음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걸 보면.
 
‘…더는 괜한 말 얹지 않는 게 좋겠지.’
 
그게 답인 것 같았다.
 
“형.”
 
그때, 갑작스러운 도형의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을 들썩거리며 뒤를 돌아보자, 덩달아 놀란 도형의 눈이 보였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어, 어어? 아니. 뭐 다른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왜?”
“나, 메이크업 오라고 민 실장님 연락 왔어.”
“아, 그래? 어어. 얼른 가 봐. 얼른.”
“…형,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야, 형이 건강 빼면 시체야.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얼른 가!”
 
괜히 너스레를 떠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도형은 그런 우태를 힐끔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태가 짙은 탄식을 토해 냈다.
의자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액정을 확인하니, 세리의 이름이 떠 있다.
 
“예. 대표님.”
[우태야. 지금 도형이랑 같이 있니?]
“아니요. 메이크업 갔는데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또 불안해진다.
이런 기시감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켜서 저 멀리 걸어가는 도형의 뒷모습을 본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엔드패치에서 연락이 왔는데.]
“…엔드패치요? 거기서 왜요?”
 
역시,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를 않는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쳐 끝까지 물고 놓지 않는 곳으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당황한 우태가 서브 핸드폰을 들어 김도형 석 자를 검색한다.
 
“뭔데요. 왜 그러세요, 대표님. 불안하게.”
 
뜨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세리의 침묵이 우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형이 열애설. 본인들은 알고 있으니까, 먼저 터트리라고 하네.]
“예?”
 
당황스러웠다. 핸드폰을 쥔 양손이 빳빳하게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혹시 상대가 최유찬 배우니?]
“아니,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둘은 진짜 친구예요.”
 
이미 도형이 그렇게 정의를 내렸다고 하니, 지금 이 사건과는 무관할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것을 정리되었다고 한 건 해성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으니까.
 
[정해성은 절대 아닐 거고. 최유찬 배우도 아니면, 대체 누구야.]
 
혼자 탄식을 토해 내듯 말하는 세리의 목소리에 우태는 입을 벙끗거릴 수밖에 없었다.
엔드패치라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마저 사실처럼 보도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다면 요 며칠 촬영장에서 보인 해성과의 의미심장한 기류조차 열애설로 치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세리에게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입을 다무는 게 좋을까.
한참 고민하던 사이, 세리의 짙은 탄식이 이어졌다.
 
[사진까지 있으니까 발뺌하지 말라는데, 이번에는 더럽게 터뜨릴 거라고 협박까지 하더라. 그러니까 지 매니저. 도형이를 구워삶든, 뒤를 밟든. 어떻게든 알아봐. 열애설이 아니라면 절대 아니라는 증거라도 내밀어야 하니까. 내 말, 알았지?]
 
뭐라도 징조가 보여야 증거를 잡을 텐데.
우태는 막막한 마음으로 저 멀리 사라진 도형의 뒷모습을 좇았다. 예, 짧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속이 답답한 건 여전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어째서 시련은 끊이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꾸만 일이 터지는 걸까.
산을 얼마나 넘어야 안온하게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건지. 답답한 마음이 우태의 입 안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স্লেট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