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러니까, 우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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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먹으니 몸이 나른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건지. 괜히 해성의 말들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억제제 먹이고, 손으로 한 발 빼 주기는 했는데. 이건 아무 일인가?’
 
귓바퀴까지 뜨끈해지는 말이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 그 순간의 표정이나 눈빛마저 뇌리에 또렷하게 남는다.
 
‘네가 바라던 대로야.’
 
일순간, 격하게 터진 탄식이 다시금 도형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여운을 남기는 찰나,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 버렸다.
 
“그만.”
 
짧게 되뇌며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그만 생각해.”
 
위험 신호였다. 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저만 종일 그의 잔상을 붙잡고 지내게 된다.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씨근거리며 몸을 일으킨 도형이 매서운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왜… 왜.”
 
달싹거리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왜, 가장 약해질 때만.”
 
오래전에도 그랬다. 단막극과 연극판을 전전하며 어떻게든 도전을 이어 가는 제게, 해성은 따뜻한 햇살처럼 자신을 다독여 주었다.
해낼 수 있다고. 저에게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니, 포기하지만 말라고. 그 딴에는 단순히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일 테지만.
그 순간의 도형에게는 해성의 말이 곧 이정표였고, 동아줄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게끔 저를 붙들어 주는 유일한 숨통.
 
“왜, 항상….”
 
결국,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아 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 볼 위로 뜨끈한 물줄기가 죽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건 저뿐이다.
옴짝달싹하지 못해 주저앉고 마는 것도 저뿐이고.
결국, 그곳을 빠져나와 온 힘을 다해 빛으로 달음박질을 해야 하는 것 또한, 김도형. 저 한 사람뿐이다.
여린 어깨가 애처롭게 들썩거리다가,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가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지만, 도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정해성. 그 원망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이름을 입안에서 꼭꼭 씹어 삼킨 채 희석시키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
 
집을 둘러보기로 결정한 건 잘못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용했던 드레스 룸. 각자 대본을 보고 연습을 하겠노라 방까지 죽 훑어보고 오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세상은 모두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르게만 변하는 줄 알았더니.
변했음에도 그대로인 것도 있더라. 바로 여기, 저와 도형의 집이었던 곳처럼.
분명 쓰임새가 변했고, 가구가 변했고, 배치 또한 제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무르는 온기와 냄새만큼은 여전했다. 김도형. 그의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는 따뜻한 곳이다.
터덜터덜 걸어 나와 소파에 앉았다. 처음에는 등받이에 기대듯 앉아 있다가, 옆으로 픽 쓰러지고 만다.
 
“…소파도 그대로네.”
 
이제는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바뀐 것이라고 해 봤자, 도형의 서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책꽂이라든가. 그가 사용하는 침대와 몇 가지 가구.
그리고 둘이 ‘함께’ 사용하던 방의 쓰임새나, 해성이 홀로 사용하던 방의 쓰임새일 뿐이다.
그 외에는 해성이 채워 두고 간 그대로였다. 마치, 해성이 지냈던 흔적을 천천히 지우고 있는 것처럼. 혹은 아직 지울 용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지.
집을 돌아보는 내내 떠오르는 옛 추억에 가슴이 꽉 옥죄어 온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듯한 기분에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곱씹기를 반복했다.
 
“도형아.”
 
넌지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작 이렇게 불러볼 걸 그랬지.”
 
후회하고 있나? 스스로 되묻는 말에 구역질이 밀려온다.
 
“…자격은 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일으켜 시야를 뒤로 젖히자, 반짝거리는 대리석 천장이 보였다.
 
“후회 안 해.”
 
다잡아야만 한다.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줘야만, 물씬 밀려드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살갗에 닿는 온기에 갇혀 있다가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우태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마음먹은 순간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끝까지 망설일 것이 뻔했으므로.
 
지우태 매니저 (도형)
 
  도형이, 히트사이클 왔습니다. 억제제로 간신히 가라앉히기는 했는데, 내가 있으면 더 위험할 것 같아요. 지금 집에 바로 와주세요. 지 매니저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뒤, 다시금 한숨을 터트린다. 분명 옳은 일인데도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당연히 도형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지우태 매니저 (도형)
 
지금 가겠습니다 
 
 
해성은 우태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더 나아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휩쓸려 갈 게 뻔했다.
소파에 걸쳐 두었던 옷을 낚아채고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두어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되는데.
망설이는 마음은 아직 도형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딱 달라붙어 제 두 발목을 붙잡아 버린다.
 
“…인사는, 해야 하는데.”
 
우습지. 그냥 집을 떠난다고 해도 도형은 아쉬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걸음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건지.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망설이다가, 고민 끝에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얼굴만 보고 가자.”
 
그래, 그뿐이다.
배우 정해성과 김도형이 아닌, 잠시나마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지냈던 정해성으로서 김도형을 마주하고 싶었다.
참 비뚤어진 성정이다. 욕심이 나는 건 행동으로 옮겨야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으니.
헛웃음을 치며 걸음을 옮겼다. 도형의 방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김도형.”
 
넌지시 뱉는 이름이 왜 이토록 뜨겁게 느껴지는 걸까. 입술 안쪽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목으로 넘어가는 달뜬 감정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이런 감정조차 제게는 사치일 텐데.
한참 망설이다가, 어렵게 문을 두드린다. 똑. 똑. 일정한 세기로 두드리는 주먹의 어느 부근이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것만 같다.
 
“도형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혹시라도 잠이 든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폭 파묻힌 도형은 몸을 둥글게 만 채 잠들어 있었다.
 
“여전하네.”
 
툭 튀어나온 말이 낯설지만 익숙하다. 늘 보았던 장면이지만, 그게 언제인지 까마득해 머쓱해지고 만다.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사이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그 사이로 꽉 감은 눈과 기다란 속눈썹이 보이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언젠가는, 도형이 가져다주는 이 미묘한 안정감을 무척 사랑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듯, 뺨을 스치는 바람에 잠시 숨을 돌리듯.
 
‘사랑’이라는 감정이 분명 존재했던 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지난 일을 상기하던 해성이 픽 웃어 버리고 만다.
유찬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김도형이 어떻게 지냈는데.’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고.”
 
‘김도형이 어떻게 여기까지 버텨 냈는데.’
 
“네가 어떻게 버텨 냈는지, 어떻게 버텨 낼 건지. 나는 아무 관심조차 없었고.”
 
‘당신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은 없죠.’
 
“…그러니 나는, 자격이 없지. 아무래도.”
 
씁쓸한 말을 입에 담으며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직 몸에 열이 남은 걸 보면, 히트 사이클이 제대로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짧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자신이 도형의 존재에 묶여 버릴 것 같았다.
알량한 위선으로 도형을 힘들게 할 순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방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해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반쯤 닫혔을 때.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린다.
 
“잘 자.”
 
마지막 인사를 전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크게 한숨을 토해 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서 집에 돌아가 저 또한 편히 잠들고 싶었다. 새벽 내내 페로몬에 시달려 제대로 잠들 수 없었으니까.
뻑뻑한 눈을 꾹꾹 누르며 현관으로 향했을 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태가 벌써 온 건가 싶었던 그때.
 
“도형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우태가 아닌 유찬이었다.
 
“…정해성 씨?”
 
못마땅한 눈빛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아니, 그보다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어떻게….”
“지 매니저님은 어쩌고 최유찬 씨가 왔습니까? 그리고, 비밀번호는 어떻게….”
“우태 형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친구 걱정돼서 왔고, 친구라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는 정해성 씨는 여기에 왜 있는데요?”
“나는….”
“우태 형도 곧 올 거니까, 이제 돌아가세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유찬이 해성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지도 않았던 그때. 머리로 스치는 건 단 하나.
 
‘최유찬도 알파인데.’
 
행동은 생각의 끝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잽싸게 뒤돌아 유찬에게 다가간 해성이 그의 손목을 힘껏 낚아챘다.
 
“뭡니까?”
“조용히 하세요. 도형이 자고 있습니다.”
“놓고 말하죠. 우리. 이렇게 닿아 있을 사이는 아닌데.”
 
유찬이 유독 적대적으로 나오는 건, 비단 자신의 존재가 이 집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형의 페로몬에 반응을 하기는 한 모양이지. 해성의 페로몬은 이따금 다른 알파들을 예민하게 만들고는 했다. 예전에도 몇 번 싸움에 휘말릴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 유찬이 숨기지 못하는 적대적인 감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
 
“히트 사이클 왔어요. 여기서, 당신이 저 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히트 사이클. 결국 왔구나. 일순간, 도형과 정해성이 함께 있었을 지난 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게 무척 불쾌해서, 해성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정해성 씨는 되고, 나는 안 됩니까?”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유찬의 모습에 해성은 코웃음을 쳤다. 결국, 참으려 했던 감정을 토해 내고 말았다.
 
“나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10년이 넘도록 도형이 페로몬 옆에서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괜찮은 겁니다.”
 
저만큼은 도형에게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알량한 자신감이자 자만.
물론, 이런 문제를 떠난다면 유해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테지만.
 
“…하, 무해한 사람이라.”
 
헛웃음을 터뜨린 유찬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해성을 노려보았다.
히트 사이클이라는 걸 들었음에도 구태여 들어가려는 저도 이기적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과거의 일을 들먹거리는 정해성도 만만치 않게 이기적이다.
그게 유찬의 감정을 자극했다.
 
“아무 일 없었다고 자신합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해성이 잠시 몸을 움찔거린다.
아무 일이라. 차라리 있었다면, 지금 이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갈피를 잡을 수 있었을까.
단순히 페로몬 때문인지, 저도 깨닫지 못했던 도형을 향한 미련인지.
모두가 제게 미련이 남았다고 하는데, 저만이 모르고 있었다면 이건.
 
‘도 실장이 말한 대로, 내가 도형이 히트 사이클에 반응한 것이 될 테고.’
 
가만히 생각하던 해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자신은 못 하겠는데.”
“…이봐요.”
“괜한 구설수 없도록 자중합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알파로서의 본능을 잘 참아 냈다는 말을 에둘러 전한 뒤, 해성은 다급히 도형의 집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커다란 소리가 나기 무섭게 두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폐부 깊숙한 곳까지 청량한 바깥 공기를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도형의 냄새를 지워야만 했다. 제 눈에 보일 정도로 뚝뚝 떨어지던 감정들 또한, 갈무리해야만 한다.
 
“정신 차려.”
 
스스로를 다그치던 해성이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정해성.”
 
이건 모두 페로몬 탓이요, 갑작스럽게 밀려온 추억의 탓이라고. 해성은 그렇게 치부하며 한참이나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김도형. 도형아. 몇 번이나 되새겨지는 이름을 입안에 담는 순간에도, 그의 거친 한숨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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