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숨이 막히기도 한다.
지금 도형이 그랬다. 사무실에 들어와 눈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았는데, 뒤따라오던 해성이 당연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아마 습관이겠지 싶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여자 주인공 옆에 앉아야 하지 않을까. 누가 봐도 의아한 행동을 한 건 해성 쪽인데, 안절부절못해 눈치를 보는 건 도형 쪽이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어서 나 감독에게 미팅을 시작하자며 텔레파시를 보내기만 몇 번.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끝나고 나서야 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들 구면일 테지만, 인사하자고. 여기는 여자 주인공 혜아 역을 맡은 전소연 씨.”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해성 씨, 도형 씨. 두 사람은 하나도 안 변했다.”
다리를 꼬아 앉은 채 웃던 그녀가 무릎 위에 놓인 대본집을 토독, 두드렸다. 당당한 시선과 표정이 인상적인 소연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다.
도형은 그런 그녀가 어떻게 보면 가장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연기하는 배역만 봐도,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않나.
페로몬 때문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거나, 히트와 러트가 찾아와 철저히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딘가 모르게 뒤틀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도형에게 소연의 존재는 이상적이었다. 연기파 배우, 어디서나 당당한 성격에 흘러넘치는 자기애. 거기다가 그 어떤 페로몬에도 굴하지 않는 형질까지.
물론, 더 마음에 들었던 게 있다면.
“해성 씨는 왜 굳이, 도형 씨 옆자리에 앉아요? 안 그래도 불편할 텐데. 아, 해성 씨 말고. 도형 씨가.”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 부분까지 콕 집어 말로 내뱉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전소연 씨 옆에 앉을 필요는 없죠. 불편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요.”
“나를 신경 쓸 게 아니라, 정해성 씨 옛 배우자인 김도형 씨를 더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나만 그렇게 생각해요?”
응? 다시 한번 되물으며 스태프들을 죽 훑던 소연이 나 감독을 마주했다. 어색하게 웃던 나 감독이 흠, 헛기침하며 대본을 꾹 쥐었다.
“하하, 해성 씨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던 모양이지.”
“헤어진 마당에 반갑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감독님 진짜 이상하게 말하신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연이 헛웃음을 치며 도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형 씨.”
“네?”
“내 옆으로 와요. 보는 내가 다 숨이 막혀서 그래.”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는 소연의 말에 당황한 도형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렇게 자리를 옮기라고?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격이었다. 해성도 업계에서 인지도와 영향이 큰 사람이기는 했지만, 소연도 그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최근 고정으로 출연하는 토크쇼가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OTT 플랫폼에서 가장 욕심내는 배우로 선정된 이후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뚫고 치솟는 중이었다.
만약, <별을 담는 잔>의 지휘자가 나 감독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재출연 의사를 비치지 않았을 거라는 인터뷰도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쪽을 선택하든, 저쪽을 선택하든 도형만 난감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쩔 줄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자 그를 보던 해성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옮겨 앉아요. 여기서 분위기 더 이상해지는 건 나도 싫으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도형 씨 옆에 앉지 말았어야죠.”
다시 한번, 사무실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도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연의 옆에 앉아 어색하게 웃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는 무슨. 당연한 건데 누가 본인 생각만 한 거지, 뭐.”
콧방귀를 뀌는 그녀의 모습에 도형이 해성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몸에 밴 습관이라는 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신경 쓰이는 건 비단 해성만이 아니었다. 소연의 눈치까지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두 배인 셈이다.
★
사람은 벼처럼 익을 줄 알아야 하는데. 고개를 숙일 줄 알고, 말을 아낄 줄 알아야 어른 아니야?
해성의 첫 발언이 방송에 나간 직후, 소연이 올린 SNS였다.
팬들은 그녀의 멘션이 해성을 저격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평소 김도형이라는 배우를 무척이나 눈여겨보고 있다는 그녀의 잦은 발언 때문이었다.
이후, 소연은 SNS를 통해 해성을 에둘러 비난하는 글을 자주 게시했다. 소속사에서는 몇 번이나 제재를 한 것 같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하나둘 소연의 말에 힘을 보태는 배우들이 늘어 갔다. 그럼에도 토크쇼에 나와 대놓고 도형을 옹호했던 사람은 소연이 유일했다.
그러니 지금 해성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해하는 것이지, 현재 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 또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지만.
“그럼 다음은, 남자 주인공 유진 역을 맡은 정해성 씨.”
“반갑습니다. 두 번째 작품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짧고 굵은 인사였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말에 도형은 재차 놀랐지만, 소연만큼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나도 안 반갑네요.’라는 그녀의 말을 들은 게 오직 저뿐이기를, 제발 그 누구도 듣지 못했기를. 왜 자신이 이토록 어쩔 줄 몰라 하는 건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해성 씨 덕 좀 보겠어. 2년 만에 복귀작이니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도형 씨 덕도 보는 거죠. 똑같이 2년 만에 복귀작이니까. 아차, 누구 때문에 그랬었지. 참?”
전생에 원수라도 진 걸까. 그게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건가. 좀처럼 풀릴 줄 모르는 분위기에 도형의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 나갔다.
물론, 저들의 이혼 사유가 되었던 ‘그 사건’에서 동료 연예인들의 반응 또한 반반으로 갈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를 응원하고, 지지하던 동료들이 알음알음 SNS를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소연도 그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다. 힘내라, 무너지지 마라. 버텨라. 몇 번이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 주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던 소꿉친구 예현의 역할. 김도형 씨.”
“마찬가지로, 전작에서 그대로 호흡을 맞추던 분들이라 촬영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도형 씨한테 아주 기대가 큰 사람이에요. 내 마음, 알지?”
나 감독의 말에 도형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짧게 대답하는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저를 빤히 바라보는 해성과 눈을 마주한다.
미묘한 눈빛이었다. 자연스럽게 피해야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불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감독님, 이번에 도형 씨도 합을 맞추는 파트너가 있더라구요? 극중 이름도 조금 중성적인 것 같고. 누구예요? 원작에는 없던데?”
“원작 작가님이랑 각색을 조금 했어요. 아무래도 주인공 위주로만 흘러가면 너무 잔잔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상의해서 넣은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제 파트너는 오지 않는 건가요?”
“그… 내가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쪽에서 이미 제안을 받은 모양이더라고.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좀 알아볼까 싶었는데, 어제저녁에 급히 연락이 왔지 뭐야. 출연 가능하다고. 오늘 그쪽이랑 마무리하고 온다 했는데… 아직인가.”
문 너머를 바라보며 흐음, 길게 한숨을 쉬던 나 감독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짓하는 그의 모습에 세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어?”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도형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 최 배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죠. 아, 감독님이 너무 서운해하셔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나 감독이 걸음까지 옮겨 얼싸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유찬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해성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아차 싶어 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예현이 역할을 맡은 김도형 씨와 새로운 러브 라인을 그리게 될 서온영 역의 최유찬입니다. 힘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씩씩하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리저리 빈자리를 보다 해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넉살 좋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던 유찬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정말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습니다. 선배님. 최유찬입니다.”
그리고 해성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간다.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제게 불쑥 내민 손을 한번, 그의 얼굴을 한번 마주하던 해성이 몸을 슬쩍 돌려 유찬의 손을 맞잡았다.
“예, 반갑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예.”
영 떨떠름한 인사가 끝이 나고, 나 감독은 유찬이 이번 작업에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 말해 주었다. 동시간대 다른 드라마를 박차고, <별을 담은 잔>을 선택했다는 스토리였다.
“에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정 감독님도 주인공으로 저랑 다른 배우 사이에서 고민하고 계셨고. 사실 저보다는 그분이 더 이미지에 맞는 것도 있었고요. 아직 출연 확정 기사도 뜨지 않았으니까, 존경하는 나 감독님이랑 일하라는 계시구나 싶었죠. 정 감독님도 나 감독님 작품이니 군말 없이 보내 주신 거고요.”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유찬의 신뢰나 평판에 충분히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어쩌면 다른 속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소연과 해성뿐이었다.
소연은 해성과 유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파 둘에 오메가가 하나라. 생각을 이어 가며 웃던 그녀가 나 감독이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
미팅이 끝나고, 배우들은 나 감독의 배웅을 받으며 복도로 나왔다. 도형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유찬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어떻게 된 거야. 어제 한 말이 이거였어?”
“어, 서프라이즈. 완전 았지? 많이 놀랐어?”
“그래, 많이 놀랐어.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그럼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던 유찬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형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이상하지. 도형이 제게 안겨 운 것만 해도 수없이 많은데, 왜 오늘따라 그의 몸집이 이리도 작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까. 자신이 키가 큰 것도 맞지만, 도형이 생각보다 더 여리여리해 보였다.
마주한 눈이 예쁘다. 대체 무슨 향수를 뿌린 건지,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도 남달랐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그, 그러니까. 나는.”
유찬이 말을 더듬으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 찰나.
누군가 유찬의 손을 낚아채 도형에게서 거칠게 떼어 놓았다. 당황한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해성이 서 있었다.
“뭡니까?”
순식간에 변한 표정과 말투였다. 그런 유찬과 당황한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는 도형을 천천히 돌아보던 해성이 손을 놓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기자들에게 먹잇감을 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정해성 씨.”
“쓸데없이 붙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김도형 씨 관련 이슈, 여기서 더 늘릴 생각입니까?”
“그 이슈, 누가 먼저 시작한 건지 모르는 겁니까? 알고 말하는 거 맞죠?”
유찬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눈에 힘을 준 채 이야기하던 그가 무어라 한마디를 얹으려던 그때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도형의 말에 놀란 해성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당황함이 역력한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찬도 마찬가지였다.
“제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든, 유찬이와 뭘 하든. 정해성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적당히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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