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경은 선물을 골라 주어 고맙다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덩그러니 둘만 남은 가운데. 카페에 앉은 유찬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리컵을 톡, 톡 두드렸다.
“…이상한데.”
유찬의 말에 도형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하경의 행동은 확실히 오묘했다.
물론, 마지막에 남긴 말은 전하지 않았다. 아직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니, 괜히 여기저기 말을 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당분간은 그 사람 조심해.”
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다면 뭐가 어떻냐는 말을 하며 대충 넘겼겠지만. 그런 제가 생각해도 하경은 확실히 이상했다.
얼음이 반쯤 녹은 커피를 빨대로 휘휘 젓던 도형이 핸드폰을 꺼냈다.
“우태 형 부르게? 내가 데려다줄게.”
“너는, 매니저 형이랑 안 왔어?”
“응. 내 차 끌고 왔는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던 유찬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흔들었다.
“너랑 같이 가려고.”
“참 나. 웃겨, 진짜.”
이런 걸 보면 능글맞다고 해야 할지. 코웃음을 치던 도형이 핸드폰 잠금을 해제했다.
“우태 형한테 이야기만 할게. 말은 해야지.”
“그럼 우리 쇼핑 조금만 더 할까? 나 사고 싶은 거 있었는데, 아까 임하경 씨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유찬은 투정을 부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몸짓에 도형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건 맞다. 유찬의 팬들이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 또한 이 모습에 흔들릴 수 있을까. 정말 더는 해성을 신경 쓰지 않고, 그의 마음이 어딜 향하는지 골몰조차 하지 않은 채.
해성이 아닌 사람을 마음에 담고 궁금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씁쓸한 마음으로 우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우드
형 임하경 씨는 갔고
유찬이랑 조금 더 놀다가 들어갈게
데려다준대
그리고 핸드폰을 닫으려던 찰나. 무슨 바람인지 SNS가 궁금해졌다.
혹시 하경이 또 이상한 걸 올리진 않았을지, 누가 무얼 업데이트했는지. 평소 같았다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문제인데, 오늘따라 꼭 열어 봐야 한다는 강한 예감이 머리를 휘감았다.
“뭐 해?”
“아, 그냥… 뭐 올라왔나 보려고.”
어색하게 웃던 도형이 SNS를 실행시켰다. 그리고 조금씩 아래로 내린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랜만에 업데이트한 해성의 SNS 게시 글이었다.
<별을 담은 잔>을 시작하며 다시 팔로우를 했다. 아무리 헤어졌어도 같이 일을 하는 입장이고, 멋있게 헤어진 사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업로드된 사진을 본 순간 그대로 굳고 말았다.
“뭐 있어?”
그런 도형이 이상했는지, 유찬이 너스레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
맛있었다 변함없이
감동적이더라
사진과 함께 게시된 내용을 한참 들여다보던 도형이 그대로 핸드폰 액정을 꺼 버렸다. 다급하게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고개를 들었다.
“갈까?”
생각 같아서는 그게 뭔지, 왜 그리 동요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래. 가자.”
유찬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자꾸만 해성에 관한 것들을 제가 캐묻는다면, 그러지 않아도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갈무리할 수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 뒤 백화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캐주얼 매장을 돌기로 하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지만.
‘…그 레스토랑, 나랑 갔던 곳이야.’
도형의 머리에는 이미 해성의 SNS 속 사진 외에는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화….’
언젠가 해성과 꼭 보고 싶은 영화였다. 개봉을 앞두고 시사회 초대를 받아 그에게 함께 가자고 했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지. 애초에 시사회라는 걸 말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흔쾌히 수락했을 테지만. 그런 이유가 아닌, 김도형이기에 함께 보러 가기를 바랐다.
재개봉을 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걸 해성이 볼 줄은 몰랐다. 자의로 영화관에 들어가 그 영화를 봤다는 건….
‘아냐, 괜한 기대 갖지 마. 그냥 우연이야.’
절대 아니라고 여긴 도형이 고개를 빠르고 세차게 저었다.
그래. 이건 정말 우연일 뿐이다. 애초에 해성은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행동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그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굳이, 거길 갈 이유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도형이 픽 웃음을 터뜨린 그 순간. 손을 잡아 오는 기척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야! 또 내려가면 어떡해.”
조심스레 손을 잡아끄는 유찬이 보였다. 제가 더 놀라 앞을 바라보자, 그곳엔 또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있던 건지.
“어… 고마워. 유찬아.”
“참 나. 미아보호소 갈 뻔했네.”
“전화를 하면 되지, 무슨 미아보호소.”
“하는 짓은 딱 그렇잖아.”
“최유찬. 많이 컸다.”
“난 너보다 원래 컸어.”
티격태격하며 장난을 치기 시작하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해성의 SNS 속 이야기는 떠나지 않았다.
변함없이 맛있었다는 말도, 감동적이라는 말도.
모두 저를 향한 건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
자주 가던 카페까지 들르고 나니 어쩐지 시간이 애매하게 떠 버렸다.
해성은 핸드폰 속 시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백화점을 향해 차를 돌렸다.
이맘때쯤엔 도형과 옷을 사러 다니고는 했다.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면 이런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건 해성만의 관심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다면 누군가와 사람이 많은 곳을 오지 않는단 나름의 표현.
물론, 제대로 전달이 될지 생각하지 않은 게 실수였지.
발레파킹을 맡길 수 있었지만, 오늘은 조용히 둘러보고 가고 싶었다. VIP 전용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3층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어? 해성 선배님.”
영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하경이었다.
당황한 듯, 반갑다는 듯 환하게 피는 그의 얼굴에 해성이 미간을 좁혔다.
“…….”
“아, 맞다. 여기 백화점이지. 참.”
깜빡했네.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온 하경이 뒷짐을 진 채 해성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 발끈할 해성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치려던 그때.
“선배님 생일 덕분에 도형 선배를 움직일 수 있었어요. 뭐, 이것도 선배님 덕이라면 덕이니까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낯익은 목소리에 몸이 우뚝 멈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데, 하경이 놀랍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와, 표정 장난 아니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글쎄요. 자세한 건 조만간 알게 되지 않을까요.”
하경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마치, 해성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눈에 훤히 보이는 모습에 해성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도형 선배랑 만났어요. 여기서.”
“…….”
그렇다는 건, 지금 도형도 이 백화점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왜 둘이 만났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을 뿐.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까요?”
싱긋 웃으며 다가오는 하경의 모습에 해성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해성에게 다가와 바짝 붙더니, 까치발을 세워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해성은 자신의 한쪽 가슴팍을 짚은 손을 영 달갑지 않게 내려다봤다. 뿌리치려던 그 찰나.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그를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도형 선배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나랑, 선배님 사이.”
“…무슨 말입니까?”
하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까치발을 내렸다. 그의 가슴팍에 두 손을 얹고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선배님 생일 선물 챙겨 주고 싶다고, 같이 골라 달라고 여기 데려온 건데 표정이 영… 별로더라고요. 우울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복잡해 보이는 것 같달까.”
“요점이 뭡니까.”
“그렇다고요. 아, 그리고 유찬 선배도 도형 선배한테 마음 있는 것 같던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눈치를 챈 걸까.
가장 피곤하고 위험한 타입이다. 정보를 손에 틀어쥐고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하는 마음이 훤히 드러나니까.
“둘이 지금 같이 있어요. 얼른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
“그럼.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선배님도, 도형 선배도. 잊지 않을게요.”
하경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윙크를 했다.
그에게서 멀어져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잡아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하경이 남긴 한마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둘이 지금 같이 있어요.’
지금 여기서 도형의 앞에 나타난다면,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불편해하든가,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겠지. 아니. 그저 선배라고 생각해 깍듯하게 인사만 하고 넘어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머리는 복잡했으나, 몸은 이미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탄 상태였다. 어딜 갔을까. 일단 2층부터 돌아보는 게 좋겠거니 싶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 도형이를 마주칠 확률은… 낮지.”
애초에 이 많은 사람 중 도형을 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경이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2층이었다. 해성은 다소 긴장되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백화점 복도를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이럴 땐 당당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한 바퀴를 돈 것 같은데 도형은 없었다. 돌아간 걸까. 아니면 다른 층?
전자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후자가 분명하다고 믿었다.
“에스컬레이터.”
혼자 짧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긴 순간.
“아니, 나는 그냥 트레이닝복만 살래.”
“야. 아무리 집에서만 있어도 너는-”
“쉿. 모른 척 좀 하자. 지금은 그냥 평범하게 즐기고 싶다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든 순간, 도형이 눈에 들어왔다.
마스크를 끼고, 모자와 후드까지 뒤집어썼는데도 단번에 도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도형.”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던 도형이 고개를 돌려 해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지다 입술이 잘게 떨린다. 당혹감이 서려 있는 표정이 분명했으나, 그의 시선은 해성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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