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은 우태도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어?”
놀란 수준이 아니라, 당황할 정도로.
순간, 자리에 멈칫 섰던 도형도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 티 나잖아, 바보. 전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킨 채로.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성혁과 해성이 있는 부근에 도착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소 우태가 이렇게 인사하면 해성은 고개만 끄덕이곤 했다. 아니면 고생했다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거나.
“지 매니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젯밤엔 좋은 시간 보내셨다던데, 다음에도 종종 부탁드릴게요.”
그러나 오늘은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까지 덧붙었다.
얼어붙은 우태와 달리, 도형은 웃으며 해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차에 가려져 촬영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해성 또한 도형과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지.
“고생했어.”
도형의 손을 덥석 붙잡아 주었다. 긴 손가락은 손등을 지나 손목까지 닿았고, 그 위를 느른하게 지분거린다.
“오늘 좋던데.”
“연기가요?”
“뭐. 그것도.”
해성의 대답에 우태와 성혁이 화들짝 놀라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언가를 상의하는 척, 두 사람의 앞을 막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어제 우리 몰래 뭘 먹은 것 같아. 종일 싱글벙글 난리더라니까.”
“도형이도요. 아무래도 뭐 잘못 먹은 것 같은데요.”
하아, 길게 한숨을 터트리던 해성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두 사람을 힐긋거린다.
“다 들립니다.”
그렇게 한마디를 툭 뱉어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긴다.
이런 해성의 모습이 처음인 건 도형도 마찬가지라,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집으로 가?”
이어지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광고 촬영 있어서.”
“잘됐네. 뭔데?”
“우유요.”
“…너, 우유 못 마시지 않았나?”
고작 저에 대한 수많은 것들 중 하나를 알고 있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레는 건지 모르겠다.
“응. 락토 프리로 준비해 준다고 하셨으니까.”
“…괜찮겠어?”
다정한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면.
그래, 김도형 정신 차리려면 멀었지.
“괜찮아요. 혹시 몰라서 약도 가져가거든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걱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해성이 도형의 손을 더 힘껏 붙잡았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장을 떠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점점 주차장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해성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놓는 듯하다가, 다시 힘껏 잡아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오늘.”
속삭이는 말에 깜짝 놀란 도형이 슬쩍 눈을 굴려 해성을 봤다.
“집으로 갈게.”
낮은 목소리는 도형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우태와 성혁이 들으면 난리가 날 만한 이야기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건, 반칙이지.
등줄기가 쭈뼛거릴 정도로 아릿한 자극이었다. 자꾸만 어젯밤을 떠올리게끔 하는, 그런 열감이 온몸을 감쌌다.
“조심히 들어갑시다. 오늘 고생했어요.”
해성은 여느 때처럼 단조로운 인사를 남기는 척하며 손을 뗐다.
그리고 도형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갑시다. 도 실장님.”
성혁은 우태와 인사를 나누고, 도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잘됐어. 둘이.”
특별할 것 없는 말인데도, 목 언저리가 뜨끈하게 올라왔다.
잘됐다는 말,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이렇게까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숨을 꾹 눌러 참은 도형이 웃으며 뒤를 돌았다. 우태는 여전히 해성의 벤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진짜 내가 알던 정해성이 맞나 싶은데.”
소리 내어 웃던 도형이 우태의 어깨에 제 팔을 두르고, 얼굴을 기댔다.
“나도 그래.”
“그래. 너도 그런데, 나는 오죽하겠냐.”
킥킥거리던 도형이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폐부에 가득 차오르는 청량한 공기를 다시 입으로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있잖아 형.”
“엉. 왜.”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고 하잖아. 그게 최정상을 찍는 일이든, 저 아래로 굴러떨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할 일이든.”
우태가 슬쩍 고개를 돌려 도형을 바라본다. 그의 머리통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실었다.
“나한테는 요 몇 년 간의 일이 그런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
이런 말을 할 것 같긴 했는데.
막상 실제로 들으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뜨끈하게 차오르다가, 이내 도형을 향한 대견함으로 바뀐다.
흠, 짧게 헛기침하던 우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힘든 시기와 고비를 감히 재단할 수는 없으니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까, 그간 누리지 못했던 행복이 나에게 찾아오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야.”
그렇다고 해도. 한마디를 던지려다가 이내 입을 닫는다.
“그래도 나 자신을 잃지 않을 거야. 저번처럼 반복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도형이 스스로 깨달은 것 같았으니까.
참, 웃긴 놈. 사고 한 번 안 치던 놈이 사고를 치더니, 이제는 대견한 말로 저를 울컥거리게 만들 줄도 안다.
“김도형 많이 컸네.”
그러니 괜히 투덜거리게 되는 거지.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한참 바라보던 우태가 도형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감상은 됐고, 얼른 가자. 그래야 푹 쉬고 내일 촬영 가지.”
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라탔다.
참, 멀리 돌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이번 지방 촬영이 뜻깊게 느껴졌다.
정해성. 이름을 되뇌며 핸드폰 액정을 켜서 자판을 두드렸다.
메시지 전송 버튼 위를 한참 방황하다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
정해성
이따 봐요 해성이 형
***
단순히 서로의 마음을 깨달았을 뿐이고, 손을 맞잡았을 뿐인데.
도형에게는 요 며칠이 지난 그 어떤 날보다 더 행복했다.
해성은 시시때때로 도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떨어져 있을 때나, 각자의 스케줄을 보낼 때, 집에 돌아간 그 순간까지.
지금처럼 함께 촬영을 하는 날, 누군가 먼저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해성
대기실?
도형이 세트장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성에게 부리나케 연락이 왔다.
도착한 메시지에 도형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정해성
네
지금 준비 끝내고 들어왔어요
금방 갈게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행복한 건 사실이었다. 이런 관심을 절대 받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니까.
다만 걱정이 되는 건 하나. 분에 넘치는 행복 뒤엔 언제나 커다란 불행이 닥쳐온다는 점.
꽤 오랫동안 반복한, 경험에 의해 학습된 과정이었다.
“아니야.”
그러나 생각은 언제나 사람을 좀먹는 법이다.
도형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고 한들 행복이 더 크다면 괜찮을 것이다.
행복을 만끽하면 된다.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정해성
오늘은 준비가 길어
돌아오는 메시지에 다시 한번 입술을 꾹 누른 채 웃는다.
답장을 쓰려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해성의 모습을 떠올린다.
새카만 흑발, 사뭇 다가가기 어려운 날카로운 인상. 높은 콧대와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입술.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묵직한 오드 우드 향.
“형 냄새, 좋은데….”
가만히 눈을 감는 그 순간.
기억 너머에 있던 해성의 오드 우드 향이 콧속으로 물씬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런 착각이 일었다.
그의 널찍한 품과 단단한 두 팔. 맞닿았다가 떨어지며 온기를 남기는 부드러운 입술까지.
지난 순간을 현실로 끌어오기 무섭게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온몸에 열감이 잔뜩 올랐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이 감각.
‘설마.’
우태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가 꽤 타이트해, 앉아서는 핸드폰을 꺼낼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히트 사이클이 온 몸은 도형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은 핸드폰을 그대로 놓쳤고.
“우태, 우태 형.”
도형 또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히트 사이클 주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 요 근래의 스케줄은 도형을 위해 맞춰져 있었다.
다음 주 스케줄이 비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조금, 조금만. 조금만 더.”
도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주웠다.
무언가를 적기 위해 애써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때.
“도형아, 준비 다 끝났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고, 유찬의 모습이 보였다.
도형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몸을 힘껏 감싸 안은 두 팔이 뻣뻣하게 굳는다.
“도형, 아.”
당황한 유찬이 한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의 페로몬이란, 생각보다 더 엄청난 자극이었다.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끝을 잘근잘근 씹어 봐도, 페로몬은 계속해서 유찬을 유혹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모습이.
저를 유혹하는 듯, 끊임없이 발산되는 페로몬이.
당장 울리고 싶어지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가.
위험했다. 알파로서의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문고리를 힘껏 움켜쥔 유찬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잠, 잠깐만. 미안해.”
쾅! 문을 세게 닫은 유찬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잘근 씹었다.
“일단, 일단….”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도형의 페로몬이 콧속으로 스며든 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잠식한 기분이 들어서.
한참 들숨과 날숨으로 폐부에 깨끗한 공기를 밀어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사람 불러와야 해.”
이제야 결론이 났다.
지금 이 상황은 제가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를 데려와 도형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끔 해야만 했다.
촬영장에 있는 알파가 저 혼자만은 아니었으니까.
유찬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형의 대기실 앞을 떠났다.
***
도댕댕
도형아
잠들었어?
해성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봤다.
“정해성 씨. 얼굴 좀 들어 줄래요?”
“…이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해성 씨. 눈 마무리해야지.”
“왜 안 보지.”
평소 같으면 재깍 답장을 할 텐데.
벌써 몇 분째 답장이 없었다.
추가 촬영이 잡힌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해성 씨.”
잔뜩 가라앉은 민 실장의 부름에 해성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밖에 리허설하고 있어요?”
민 실장은 해성을 힐끔 보더니, 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뒤이어 해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화장을 마무리하고 도형에게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민 실장은 군말 없이 앞을 보는 해성의 눈 화장을 마무리했다.
“끝났습니까?”
“응. 끝났는데-”
민 실장의 말이 더 이어질 것 같았지만, 해성은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꼭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빠르게 분장실을 벗어났다.
핸드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러면 기껏 세팅해 둔 헤어나 메이크업이 망가질 수도 있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조급한 발걸음으로 도형의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던 해성이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최유찬?”
![](https://img.wattpad.com/cover/336401197-288-k49691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