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자각의 소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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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유예현 씨가 자주 오는 카페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나와 내 연인, 그리고 유예현 씨. 셋이 자주 오는 카페입니다.”
 
가소롭다는 듯 받아치는 유진의 모습에 온영은 코웃음을 친다.
셋이 자주 오는 카페. 그 한마디에서 느껴야 하는 것은 소외감뿐일 텐데.
 
“그래서요. 셋이 자주 오는 카페이니 나는 발걸음도 해선 안 된다, 뭐 그런 건가?”
 
유찬이 연기하는 온영에게서 느껴지는 건 자격지심이었다.
 
“컷! 유찬 씨, 감정이 너무 실렸어. 적당히 비꼬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잖아.”
 
덕분에 NG만 벌써 네 번째.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해성이 지루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반대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나를 뛰어넘을 후배라….”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을 테지만, 유찬에게는 명확하게 꽂힐 이야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던 유찬이 해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하지만 받아칠 말이 없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자리에 털썩 앉고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나 감독의 신호가 들어오고, 두 사람이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여기 유예현 씨가 자주 오는 카페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나와 내 연인, 그리고 유예현 씨. 셋이 자주 오는 카페입니다.”
“그래서, 셋이 자주 오는 카페이니 나는 발걸음도 해선 안 된다… 뭐 그런, 유치한 이야기는 아니겠죠?”
 
이번에는 쉽게 넘겼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온영의 모습에 유진은 잠시 당황한 듯 할 말을 잃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해성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제 앞에 앉은 온영. 아니, 그를 연기하는 유찬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와 도형. 그리고 유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저는 도형에게 그저 좋은 형, 선배로만 남아야 할 테니까. 온영의 마음과 똑같이 도형에게 다가가는 유찬을 막아설 권리조차 없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게요. 유치한 이야기인데… 나는, 당신이 예현 씨에게 접근하는 게 달갑지 않습니다.”
“왜요, 셋이서 영원히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요. 어쭙잖은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걸 보고 소꿉장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이 유예현에게 뭔데.”
 
온영의 대사에 할 말을 잃고 만다. 이건 유진으로서도, 해성으로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당신의 그 마음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압니까?”
 
어쩌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대사.
그리고 가장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사.
 
“같잖은 독점욕.”
 
현실에 대입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현실과 겹쳐져 가슴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들은 적이 있거든요. 예현 씨에게. 물론, 술에 취해서 한 이야기이니 그쪽은 기억도 못 할 테지만.”
“이야기?”
“10년을 넘게 짝사랑한 여자가 있었지만, 결국 그 여자의 행복을 빌어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그 여자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굉장히 멋있고, 잘난 사람이라 본인이 어떻게 할 새도 없었다고.”
 
이 또한 도형과 비슷할까.
항상 제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너무 잘난 사람이 순식간에 남편이 되어서 현실 같지 않다고. 꼭 누군가 쓴 각본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현의 마음이 곧 도형의 마음이었던가.
괜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이윽고 그를 위아래로 훑는 온영의 시선이 이어진다. 대본에 적힌 지문이란 걸 알면서도, 그 시선이 유찬의 것으로만 보인다.
그게 무척 달갑지 않았다.
 
“만나 보니 별거 없네.”
 
하!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졌다. 꼬아 앉은 다리를 풀고, 무릎 위로 두 팔을 올렸다.
대본에는 없는 지문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그대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일.
나 감독도 잠시 당황한 듯싶었지만, 해성의 연기를 끊어 내지는 않았다. 그 또한 유진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당신이 뭘 알아.”
 
그리고 이어지는 해성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실렸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무슨 자신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객관적인 평가.”
“보통은 그걸 참견이라고 합니다. 더 정확한 한국말로는 오지랖.”
 
대본대로라면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더 할 말 없으니 접근하지 마라, 는 말로 끝내야만 했는데.
 
“되지도 않는 마음으로 찔러보지 맙시다. 상처를 주는 건, 나 하나로 족해.”
 
대본에 없는 대사를 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 감독은 만족한 듯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배우가 애드리브로 진행하는 대사가 더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오히려 해성의 대사가 유진의 마음과 더욱 가까이 맞닿아 있어서, 자신이 끊어 낼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유진이 카페를 나서려는 순간, 온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사람의 사이로 흐르는 적막 사이로 들리는 건, 온영의 목소리.
 
“상처를 줬다면, 더 참견하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 말이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해성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다행이다. 카메라가 제 손까진 잡고 있지 않을 테니.
 
“당신 때문에 충분히 힘들었을 유예현 씨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만이, 당신에게 허락된 마지노선이고.”
 
유진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카페를 나서야 했으나.
 
“그러니 당신도 어쭙잖은 마음이라면 접근하지 말아야지. 내 말, 못 알아듣나?”
 
다음 회차에 나와야 할 대사를 뱉고 말았다.
누군가 본다면 유진에 너무 몰입한 정해성이 될 테고.
나 감독이 볼 땐 개인적인 감정이 실린 정해성으로 보일 테다.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유찬과 도형. 그리고 해성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일 테니까.
 
“컷! 두 사람,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찍을까. 마지막 건 못 쓰는 장면인 거, 알고 있지?”
 
결국, 나 감독은 두 사람의 연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감정적인 흐름으로만 본다면 대사가 앞당겨진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뒤로 붙을 장면을 생각한다면 너무 갑작스럽게 치닫게 된 감정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카페 사용 시간 딱 2시간 남았으니까, 30분만 머리 식힙시다. 아니, 해성 씨랑 유찬 씨. 드라마 촬영 한두 번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왜 이러지?”
 
웃으며 묻고 있었지만, 나 감독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해성과 유찬은 나란히 앉아 대본을 맞춰 봐야만 했다. 더 이상 나 감독의 인내심을 시험할 필요는 없었다.
 
“왜 그렇게 감정이 실리셨어요?”
 
대본을 한참 살피던 유찬이 해성에게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던진 물음이었다.
 
“…분명 나 감독님은 나와 최유찬 씨, 두 사람을 모두 말한 걸로 아는데.”
“네, 아는데요. 나야 그렇다 쳐도 선배님은… 좀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합니까.”
“저는, 도형이가 자꾸 예현이에게 대입되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나거든요. 하필, 예현이를 아끼는 유진 역할이 당신이라서.”
“…….”
“그런데 선배님은요?”
 
되묻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저는 어째서 이렇게 감정이 실리는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였으나, 타인이 본다면 유찬처럼 말할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연기하는가.
 
“명확히 해야 선배님이 더 방해하지 않을 것 같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좀처럼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해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유찬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선배님께서도 저처럼 현실과 배역을 혼동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니, 대입시킨다고 해야 맞는 말인가.”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을 말합시다.”
“저, 같잖은 마음으로 도형이한테 추근거리는 거 아닙니다.”
 
왜 이렇게 머리가 흔들리는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키며 유찬을 가만히 주시했다.
 
“김도형 좋아합니다.”
 
아니, 거기까지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속으로만 되뇐다.
 
“고백도 했고.”
 
그 말에 대본을 힘껏 그러쥐었다.
종이 뭉치가 단번에 구겨지는 소리가 귀에 울렸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대답만 기다리는 상황이에요.”
“…대답.”
“네. 아직 시기가 이른 것 같아서요. 물론, 대답 비슷한 건 들었습니다.”
 
자기가 조금 더 바로 서고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크게 결이 다른 이야기는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여유 있게 미소까지 지었다.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줄 알았죠. 내가 도형이를 유독 더 많이 챙기고, 생각하고,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모두. 친구여서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해성은 고개를 돌려 잔뜩 구겨진 대본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손에 힘을 실었다가, 서서히 풀며 빳빳해질 수 있도록 조물거렸다.
 
“언제부터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들으면 후회하실 텐데.”
“후회라….”
 
어째서 자신이 후회할 거라고 단언하는 걸까.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해성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찬이 보란 듯 입을 열었다. 여유 만만한 목소리가 명확히 꽂힐 수 있도록 또박또박 대답했다.
 
“선배님이랑 헤어진 직후.”
 
서서히 저를 향하는 시선에도 유찬은 여유를 잊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무너지는 도형이를 잡아 주고, 끌어 올려 주고, 붙들어 주면서 느꼈어요. 내가, 김도형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마음.”
“…….”
“물론, 더 정확히 각성하게 된 건 제작 발표회 때겠지만.”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유찬의 모습에 해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니 자신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거구나.
애초에 도형을 놓친 것도 저였고, 제대로 잡아 주지 못한 채 주변을 빙빙 돌며 배우의 마음가짐을 운운한 것도 저였으므로.
 
“고백 타이밍도 선배님이 만들어 주셨으니까… 이건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내가 만들었다는 건, 무슨-”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포스터 찍는 날, 선배님이 도형이에게 그랬죠. 미련하다고.”
 
쿵.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유찬은 그런 간극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잽싸게 말을 이어 갔다.
 
“그 말 덕분에 도형이에게 빈틈이 생겼어요. 선배님을 향한 미련이든, 티끌만큼 남은 애정이든 상관없이. 전부 끌어모아서 버릴 수 있도록 선배님이 도와주셨거든요.”
 
탁! 소리 나게 대본을 덮은 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절대 있을 수도, 용납하지도 않던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해성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말하고 나니 더 확실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도형이에게 고백했어요. 잘되고 나면, 한턱 크게 쏘겠습니다. 정해성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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