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자각의 소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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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현 씨?”
 
떨리는 목소리에 예현의 눈 또한 흔들린다.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놀라움과 당황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반가움만이 서린 미소였다.
 
“서온영 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영의 얼굴에도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끝으로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하, 짧게 한숨을 뱉던 그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봤다.
카메라에는 비치지만 예현에게는 보이지 않을 환한 웃음이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온영은 예현을 향해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비로소 가까워졌음에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진짜 인연인가 본데. 어떻게 생각해요?”
 
그 말에 당황한 예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에 능글맞게 미소를 터뜨린 온영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모니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나 감독이 무전기를 향해 입을 벙끗거렸다.
 
“컷! 두 사람 연기 아주 좋았어!”
 
그 한마디에 도형과 유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조금 전까지 예현과 온영에 몰입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뭐야, 김도형 연기 엄청 늘었잖아.”
“그럼, 얼마나 연습했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능청스러운 도형의 모습에 유찬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제가 알던 원래의 도형으로. 그토록 낯익고, 김도형다웠던 그때의 모습으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마음에 묻어 두기로 했다.
이따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인 것 같았다.
도형이 왜 돌아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 뻔했다.
리딩을 위한 합숙. 그 이후로 조금씩 달라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그 자리에 해성이 없었다면 저 때문인가, 하는 희망 회로를 돌려볼 수 있겠으나.
 
‘…정해성의 영향도 있겠지.’
 
희망 회로가 아닌, 희망 고문이 될 게 뻔했다.
그러니 그냥 좋게 생각하는 것이다. 김도형이 드디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의 궤도를 천천히 달리게 된 것뿐이라고.
웃으며 뒤를 돌아봤을 때. 나 감독의 옆에서 저들을 빤히 바라보는 해성과 눈이 마주쳤다.
도형과 유찬, 두 사람을 살피던 그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감독과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듯싶더니, 이내 뒤돌아 차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왜 온 거야?”
 
불만이 어린 유찬의 목소리와 다르게, 도형은 무심코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 도형아!”
 
뒤에서 들리는 유찬의 부름에도 개의치 않은 채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멀어지려는 해성의 팔 부근을 힘껏 그러쥔다.
 
“선배님.”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 자리에 우뚝 멈춰 선 해성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누군가 본다면 화가 났나, 생각할 표정이었지만. 도형은 알고 있었다. 지금 해성은 그저 놀란 것뿐이라는 사실을.
 
“…뭡니까?”
“고맙습니다.”
 
이어지는 감사 인사가 해성의 손바닥을 간질거리게 만든다.
이 기분은 뭘까. 도형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말도 아닐뿐더러, 어색한 말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 인사에 손바닥이 간질거리고, 괜히 기침이 날 것 같은 걸까.
 
“응원하러 와 주신 거잖아요.”
“…김도형 씨를 응원하러 온 건 아닙니다.”
 
아니, 거짓말이면서.
필요할 때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이지.
잠시 말을 잇지 않던 해성이 숨을 크게 한번 내쉬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무어라고 말하려던 그때, 도형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뱉었다. 희미하게 머금은 미소에 해성이 당황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를 응원하러 왔다고는 말 안 했는데, 그냥 응원하러 와 준 게 고맙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을 잠시 복기하던 해성이 무심결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잊고 있었다. 늘 의기소침해 있고, 제 눈치를 보던 도형이 사실은 장난을 잘 치고, 무척 밝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건데, 제 눈에는 왜 이리도 색다르게 보이는 걸까.
 
“열심히 해요. 같이 촬영하는 날, 기대하고 있을 테니.”
“네. 기대하고 계세요. 옛날의 김도형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런 도형의 모습이 참 좋았다는 사실.
비록 드러내지 못했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그를 상처 주고 말았지만.
원래의 김도형에게서 한참이나 벗어난 채로 살아가게 만든 것 또한 저였으나.
그래, 이런 도형의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느끼던 찰나도 존재했다.
해성은 슬며시 웃으며 습관처럼 도형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손바닥을 스치고 난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해지고 싶다고, 했으니까.”
 
다급히 한 변명이라는 게 이 모양이다.
당황한 건 도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맞네요. 선배, 옆집에 살 때도 가끔 이랬잖아요. 고등학생 때.”
 
그때와 같은 마음일까? 자문하는 마음은 숨기기로 한다.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세요. 다음 촬영 때 봬요.”
“그럽시다. 고생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해성은 돌아섰고, 도형은 그런 해성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던 그 손길이 꽤 오래 남아, 도형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며칠 뒤, 도형은 오랜만에 자신의 사진을 SNS에 업로드했다.
촬영을 기다리며 찍었던 유찬과의 셀카였다.
 

오늘도 열심히
 
태그 하나 없는 게시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어마어마했다.
직전의 스캔들 때문인지, 쏟아지는 가설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모습 덕분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도형의 게시 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댓글을 남겼다.
 
“…잘 나왔네.”
 
해성 또한, 촬영 중 쉬는 시간을 이용해 도형의 게시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누군가 곁에 앉는 느낌이 들었다.
 
“제발 그런 건 혼자 있을 때 좀 보면 안 될까요?”
 
오늘 해성과 함께 합을 맞추는 소연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 원한다면야.”
“정해성 씨가 자꾸 김도형 씨한테 관심을 가지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들잖아요. 하이에나 새끼들도 아니고.”
 
투덜거리던 소연이 다리를 꼬아 앉았다. 팔걸이에 두 팔을 걸친 채 저 멀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해성을 마주했다.
 
“하이에나를 왜 신경 씁니까. 다른 먹잇감이 있으면, 그쪽으로 갈 텐데.”
 
여전히 덤덤하게 대답하는 해성의 모습에 소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껏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늘 솔직한 편인데.”
“김도형 씨한테, 미련 있죠?”
 
조금 전 말과 침묵은 너무 상반되는 모습인데.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생각하던 해성이 허리를 곧게 편 채 고개를 저었다.
 
“친해지고 싶은 겁니다.”
“그럼 김도형 씨가 연애를 시작해도 응원해 줄 수 있다, 뭐 그런 거예요?”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도형이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말하고, 제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듬뿍 쏟고. 미소를 지으며 그 품에 안긴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안 된다,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은 아니었으나,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아니면, 김도형은 그럴 리 없다…는 마음인가.”
 
이어지는 소연의 말이 꽤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렸으나, 해성은 받아칠 수 없었다.
그 말이 정확했으니까.
적어도 도형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는 도형은 생각해 본 적도, 염두에 둔 적도 없다.
왜 그랬을까. 어째서 도형에게 사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저뿐이리라 확신했던 건가.
속이 뒤틀리기 시작하니, 현상의 원인인 소연의 질문에 화가 났다.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받아치자, 소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밌으니까.”
“재밌습니까?”
“그럼요. 정해성 씨가 김도형 씨 이야기만 나오면 즉답을 못 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리고 제일 재미있는 게 뭔 줄 알아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소연이 해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뜻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해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김도형 씨가 당신 덕분에 뭔가를 이뤘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을걸요.”
“…….”
“결국, 김도형 씨가 곁에 있었기에 당신이 안정됐었다는 사실이요. 지금도 봐, 김도형 씨가 훨훨 날아가려고 하니까 안달이 났잖아. 안 그래?”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말로 받아치려고 하는데, 소연이 핸드폰 화면을 해성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환하게 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는 건, 어느 커뮤니티 게시 글의 캡처본이었다.
 
관계자피셜 정해성 구질구질함
 
첫 촬영에 커피차+밥차
김돟 머리 쓰다듬음
상대배역이랑 촬영하는 내내 ㄹㅇ 개째려봤다함
ㅈㄴ구질구질
 
 
댓글은 보이지 않았으나, 게시 글의 내용만 봐도 충분히 목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커피 차에 밥차. 거기다 머리까지 쓰다듬으셨대. 이게 지금 일파만파 퍼져 나가고 있어요. 봤어요?”
“못 봤습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요점만 정확히 하시죠.”
 
해성의 핀잔에 소연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의 눈앞에서 핸드폰을 치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마음 같아서는 김도형 씨한테서 떨어져! 하고 싶지. 팬으로서, 동료로서는 그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구심으로 소연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도 의리가 있지 않겠어요? 연인 연기도 나름 두 번째인데.”
 
흐음, 길게 숨을 뱉으며 생각하던 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성을 돌아본다. 싱긋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노선 정확하게 정하라는 이야기예요. 되지도 않는 행동으로 갈피를 못 잡으면 어떡해?”
“내가 언제 갈피를-”
“그날, 도형 씨랑 유찬 씨 촬영 보고 와서 더 이러는 거 아니었어요? NG만 벌써 여섯 번. 감독님 개인 면담만 20분.”
 
아무래도 소연은 저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한 번도 사적인 고민에 휩싸여 NG를 낸 적이 없었는데. 그녀의 말이 맞다. 활짝 웃는 도형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유찬의 배역이 제게 주어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까.
할 말을 잃어버린 해성을 보며 소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무릎을 깍지 낀 손으로 붙잡는다.
 
“대체 뭘 원하는 건지, 이제 자기 자신을 좀 돌아보죠. 정해성 씨?”
 
웃음 섞인 한마디에 해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원하는 것. 가만히 읊조리던 그의 입술에서 들리지 않는 한숨이 옅게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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