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미련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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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의 말에 당황한 건 유찬뿐만이 아니었다.
도형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사실, 그가 알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 페로몬에 유독 영향을 많이 받는 해성이었기에, 러트가 함께 올 것을 대비해 도형의 히트 사이클 주기 앞뒤로 스케줄을 비워 두고는 했으니까.
그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울 뿐이다.
 
“도형아, 진짜야?”
 
놀란 듯 되묻는 유찬의 모습에 도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술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말하지 그랬어. 큰일 날 뻔했다. 우태 형은? 형 어디 있지?”
“곧 올 겁니다. 제 매니저한테 연락 넣어 둔 참이니까. 저기, 문 쪽에 있는 테이블에 있어요. 매니저들.”
 
손을 쓸 새도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해치우는 해성의 모습에 유찬이 미간을 좁혔다.
괜히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는, 도형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감독님한테는 내가 슬쩍 말 전해 두고 올게. 기다려.”
“응, 고마워.”
“고맙기는.”
 
씩 웃던 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다 붙잡혀 두어 잔 술을 받는 그의 모습에 도형이 해성을 천천히 돌아봤다.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까. 뭐부터 말해야 하는 걸까. 복잡해지는 머리를 간신히 다잡으며 생각에 생각을 잇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야.”
 
그가 툭 던진 말에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잊어야 하는 습관도 있는 법이니까요.”
“러트 시기와 비슷해서 잊지 않았을 뿐이지. 괜한 생각은 안 해도 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해 주세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도형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포커페이스. 제게 주어진 수식어가 이럴 땐 퍽 고마웠다.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까, 물어보지 못한 거예요.”
“네 파트너 오기 전에 물어봐.”
“그날 밤에, 왜 저한테 전화했어요?”
 
괜히 속이 답답해져서 술잔을 채우다가, 툭 던지는 도형의 한마디에 손이 우뚝 멈춘다. 술잔이 채워진 건 고작 절반뿐이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 질문이 제게 전해질 줄은 몰랐다. 도형이 제게 되물었던 적이 손에 꼽았으니까. 보통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나 말에 그저 수긍할 뿐이었지.
실수였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오히려 그 편이 도형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돌았다. 사과를 할 상황이 아니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이 도형의 상처를 덧대는 것뿐이라면.
있는 그대로 내어 주는 편이 좋겠지.
 
“…그냥.”
“그냥이요?”
“…아플 때, 생각나던 익숙한 번호라서.”
 
도형의 눈이 흔들린다.
아플 때 생각나는 사람이 저라는 말도, 그래서 누른 번호가 제 것이라는 이야기도.
가슴이 뜯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이제 와서 이러면 무얼 하냐고 물으려다가도 입에 힘을 실은 채 꾹 닫았다.
아니, 다 끝난 마당에 사람 마음을 뒤흔들다 못해 갈가리 찢어 놓으면 어쩌자는 건데.
이제까지 노력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해성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던 김도형이.
그의 기억 속에 확실히 각인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적어도 문득 떠오르는 사람 중 하나이고 싶었던 것도 맞다.
사랑이 아니어도 좋으니,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 저는 괜찮았다.
하지만 헤어지고 난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가혹하다.
아플 때 생각나는 사람이라는 말과 그 때문에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겹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쪼르륵, 술잔의 남은 절반을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형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뒤쪽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도형아, 가자.”
 
우태였다. 걱정 어린 눈빛과 표정이 그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술 많이 먹었어?”
 
우태의 물음에 도형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아닌 게 아닌데. 우태는 벌겋게 열이 오른 도형의 얼굴을 보다가, 유찬과 해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 둘 중 하나겠지. 어쩌면 두 사람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예민해졌다. 도형의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얼른 가자. 감독님한테 인사는 드렸고?”
“아, 지금 가야 돼. 다녀올게.”
 
이윽고 도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성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문 채 말 없이 감독을 향해 걸어갔다.
우태는 그런 도형을 바라보다가 해성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는 술도 잘 안 마신다더니, 술잔을 채워 넘기고, 다시 채워 넘기는 것만 세 번을 봤다.
해성이 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언제였더라,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를 집에 초대했던 날. 우태는 해성과 대작을 했다. 그때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주절주절거렸던 자신을 기억한다.
도형이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아껴 달라고. 그저 세상 그 누구보다 애틋하게만 여겨 달라고.
물론, 그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지.
 
“지 매니저님.”
 
해성의 목소리에 우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쳐다보고 있던 걸 알았나? 머리통에도 눈이 있어?
 
“도형이, 약은 제대로 먹습니까?”
“약? 무슨 약.”
“억제제요.”
“지난번에 다시 받아 왔으니까, 챙겼을 거야. 틈틈이 물어보면서 확인하고 있고.”
 
제대로 체크하지 않으면 금세 잊거나 깜빡하는 사람이 김도형이었다.
옆에서 챙겨 줄 사람도 없으니, 저라도 잘 챙겨야만 했다.
지금도 딱 그 시기인 것 같으니, 집에 가면 푹 쉬라고 잔소리라도 해야지. 혼자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형이가 그렇게 허술한 놈은 아니야.”
“…허술할 텐데.”
 
중얼거리는 그의 말이 정확히 꽂히기는 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유찬과 도형이 함께 돌아왔다.
유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아,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꽤 많은 술을 받아먹은 듯 했다.
 
“형,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형이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응, 유찬이 너 많이 마시지 마. 우리 다음 주부터 대본 리딩이야.”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저를 걱정해 주는 게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 일이었나 싶다.
유찬은 손을 뻗어 도형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힘껏 헝클었다.
하지 마, 괜히 볼멘소리를 내며 밀어내는 도형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만 가 보겠다는 인사와 함께 도형과 우태가 식당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해성이 고개를 들었다.
짧게 한숨을 뱉으며 시선을 거두었을 때, 저를 가만히 노려보는 유찬과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하세요.”
 
참 이상하지. 도형이 함께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온도 차이가 극명하다는 사실이.
흐음, 길게 한숨을 뱉던 유찬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 앉고는 팔짱을 꼈다. 해성이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 끝난 사이고, 그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다면. 자신이 도형과 어떤 모습을 보이든,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든 신경 쓰지 않는 게 맞지 않나.
아니면, 연애와 결혼의 차이가 그런 걸까.
한참 생각하던 유찬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해성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도형이를 생각하는 마음. 정해성 씨가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알아들었겠지. 마음 같아선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난감해질 이야기는 맞으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게 되어 있다.
 
“…그렇군요.”
 
하지만 생각보다 해성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술잔을 다시 한번 꺾어 목으로 넘기고는, 한참동안 유찬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정해성 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겠죠. 물론, 이제까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정해성 씨도 미련이 남았을까,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또, 소연과 비슷한 말을 하는 그 저의가 궁금했다. 분명 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술잔을 꽉 쥔 채로 숨을 삼키던 그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저 또한 술이 받지 않는 날인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 몇 잔에 저답지 않은 말을 툭 뱉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미련이 남았다면, 최유찬 씨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 말은 보기 좋게 유찬을 자극했다.
하, 크게 코웃음을 터뜨린 유찬은 몸을 앞당겨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걸쳐 두었다. 그러곤 새로운 술병을 열어 해성의 잔을 채우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면, 도형이가 나한테 미련이 남았다거나.”
 
해성의 말에 유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정곡을 찔린 탓이다.
도형이 완벽하게 해성을 잊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형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건 미련으로 남을 때도 있고, 후회로 남아 가슴을 벅벅 긁을 때도 있다.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이 될 수도 있고, 머리를 떠나지 않는 조그마한 방으로 남을지도 모르지.
얼마나 희석된 기억이냐에 대한 차이다. 도형이 어떤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지, 어떤 과정에 접어들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던 것도, 자신이 괜히 들쑤시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인데.
막상 해성이 물어보니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형의 상태를 자신이 재단해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까.
 
“애증도 미련입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언젠가 도형이 무심코 뱉었던 그 말이라면 해성에게 전하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단언했다.
잔에 담긴 술을 목으로 쭉 넘기는 순간까지, 유찬의 시선은 해성에게 꽂혀 떠나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하는 눈빛에 살기가 형형하게 묻어 있었다.
 
“설령 그마저도 미련이라 한들, 정해성 씨가 입에 담을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
“김도형이 어떻게 지냈는데.”
 
이를 아득 갈았다. 샵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라 괜히 속이 뜨끈해졌다.
 
“김도형이 어떻게 여기까지 버텨 냈는데.”
“…….”
“당신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은 없죠.”
 
낮게 가라앉은 유찬의 목소리에 해성은 픽 웃으며 시선을 굴릴 뿐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되물으려던 입에 힘을 실었다.
도형이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래, 그렇다면 저런 주제넘은 말이라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겠다. 그럼 이제 저는 영영 죄책감만을 안고 살아가면 되는 걸까. 도형을 향한 뒤늦은 호기심은 고이 접은 채, 유찬에게 모두 떠넘기면 되는 건가.
결국, 복잡한 머릿속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술잔을 채웠다.
소연과 유찬이 말하는 그 미련이라는 단어가 좀처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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