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행복의 또 다른 이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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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행복한 밤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해성과 전화 연결이 되어 있었으니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의 메시지가 대화 창에 남아 있었다.
 
정해성
 
  자는 거 확인하고 끊었는데, 안 깨길 바라며
  오늘 촬영도 힘내
  얼른 보고싶다. 김도형
 
 
간지럽다.
잠에서 덜 깬 눈을 무겁게 끔뻑거리는데도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정해성이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데 제게 보여 주지 않았던 건지.
그게 아니면, 저를 위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건지.
한참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하다.”
 
전기장판을 한번 스윽 매만진 도형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침대를 정리했다.
이따 보자, 중얼거리며 전기장판의 전원도 꺼 버렸다.
일부러 자신이 챙기겠다고 말한 촬영 의상을 들고, 우태와 만나 조식을 먹으러 가는 순간까지도 도형은 행복했다.
 
“아주 좋아 죽네.”
 
이죽거리는 우태를 보면서도 히죽거리며 웃을 정도로.
그래, 촬영에 돌입하기 전까지 도형은 모든 것을 잘 마친 뒤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자 다짐했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컷! 두 사람, 여기까지 와서 왜 그러는 거야.”
 
벌써 NG만 몇 번인지.
그것도 계속 똑같은 부분에서 나 감독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렇게 어려운 장면도 아니었다.
그저 설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채, 씁쓸한 마음을 삼키는 장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해 보겠습니다.”
“10분만, 10분만 쉬었다가 해 봅시다.”
 
나 감독도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해 보겠다는 도형의 말에 대답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우태가 다가와 도형의 몸에 두툼한 전기담요를 덮어 주었다.
 
“조금 앉아 있자.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고.”
 
담담한 목소리에 목 끝이 더 아릿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도형이 뒤를 돌아보려던 그 순간.
유찬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도형아.”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뒤이어 스태프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아마 지난번 인터넷을 화려하게 장식한 기사들 때문일 테지.
아차, 싶었는지 유찬이 도형의 손을 놓았다.
 
“잠깐, 이야기 좀.”
 
구석진 자리를 손끝으로 가리키는 유찬에 도형이 우태를 돌아보았다.
괜찮냐는 뜻이었다.
 
“다녀와. 괜찮아.”
 
우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형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고 한들, 저들만 떳떳하면 될 일이었다.
도형은 유찬을 따라 촬영장 구석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촬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참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도형이 유찬을 마주했다.
 
“무슨 이야기인데?”
“네가 힘들어하는 이유, 알아.”
 
가슴이 덜컹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망설이며 말을 아끼던 도형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유찬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생각보다 더 담담한 말투였다.
 
“…예현이와 온영이에게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
 
딱딱히 굳은 손끝에 힘을 실었다.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혜아를 향한 마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꼭 해성에 대한 마음 같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건, 온영이 아닌 유찬으로만 보였다.
고로, 자신이 유찬에게 해성을 향한 진심을 털어 두는 것만 같아 자꾸만 주춤거리게 됐다.
 
“맞아.”
 
그래, 꼭 유찬을 거절할 때의 자신과 겹쳐 보여서.
 
“…네 말이, 맞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형의 모습에 유찬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모두 느끼고 있고, 제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음에도 직접 들으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해 봐야지.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해야지.”
“…그렇지, 해야 하는 일이지.”
 
어쨌든 이곳에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찍어야 할 장면은 이번 신만이 아니었으니까.
유찬은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애써 웃었다.
 
“제일 정확한 방법이 있는데, 한번 해 볼래?”
“…정확한 방법?”
 
조심스럽게 방법을 묻는 듯한 도형의 시선에 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나를.”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메어서, 이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수많은 이유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정해성이라고 생각해.”
 
도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유찬이 제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저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수긍하는 게 맞는 걸까.
한참 생각하던 그의 어깨 위로 유찬의 손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괜찮아. 도형아.”
 
괜찮지 않을 텐데.
 
“나를 정해성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쉽지 않을까.”
 
그건,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인데.
 
“우리, 잘 끝내야지. 보란 듯이.”
 
안 그래? 다시 한번 되물으며 웃는 유찬의 모습에 도형은 목 안으로 삼킨 말을 뱉지 못했다.
이게 맞는 건지,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건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감상들만을 줄줄이 되뇔 뿐이었다.
 
***
 
참 우스운 일이다.
그토록 감정을 다잡아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유찬의 말대로 하니 확실하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해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 내던 그 밤을 떠올렸다.
천둥이 치던 날의 꿈을 꾸고 해성과 온전히 마주한 그 밤.
온 마음을 쏟아 냈으나 결국 꼭꼭 씹어 두었던 말들만 토해 냈던 그 찰나의 감정들.
예현도 마찬가지다. 끄집어내 털어놓을 순 없지만, 곱씹어 삼키자니 모두 곪아 터져 버린 감정들.
그 찰나의 저에 빗대어 연기에 녹이니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컷! 봐, 하면 되잖아! 하면!”
 
결국, 나 감독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오케이 사인을 받아 냈다.
다음 촬영지로 이동하자는 말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도형은 유찬에게 다가갔다.
 
“봐, 그렇게 하면 된다고 했지?”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목이 꽉 메는 것 같다.
 
“…응, 이렇게 하니까 되네.”
 
어색하게 웃는 도형의 모습에 유찬은 입을 벙끗거렸다.
말해야만 했다. 이곳에 모든 것들을 털어 내고, 묻고 가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다.
혼자 시작해 저만치 앞서 나간 감정들을 제자리로 끌어오기만 하면 될 테니.
그러나, 시작은 이렇게 해야만 했다.
다짐처럼 혹은 고해성사처럼.
유찬은 도형을 이끌어 스태프들을 피해 조금씩 자리를 옮겨 조금 전, 구석진 자리에 다시 우뚝 섰다.
 
“도형아.”
 
나직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하지. 온갖 감정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던 유찬의 눈동자가 조금은 차게 가라앉은 기분이다.
아니, 차갑다기 보다는 안정되었다고 해야 할까.
 
“나, 너 많이 좋아해.”
 
그의 첫마디에 입술을 떼어 내려다가,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 같아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제… ‘좋아했어.’가 되어 보려고.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이 모든 행동의 원인이 도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형을 위해 갈무리를 짓는 게 아니다.
그를 좋아하던 순간의 최유찬을 반짝반짝 빛나는 상태에서 보내 주어야 할 테니.
더불어 도형을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자신을 탓하지 않도록.
또,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누군가를 새로이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닫지 않도록.
수많은 이유를 상기하던 유찬이 어슴푸레 미소를 지었다.
 
“정리할 거라는 이야기야. 당장 안 좋아한다고는 말 못 해.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 너도 알잖아.”
“응. 알지.”
“그냥, 내가 너 많이 좋아했다는 것만 알아 달라고. 그거면 될 거 같아. 너무 징징거리던 최유찬이 아니라, 김도형 너 많이 생각해 주던 최유찬으로 남겨 주라. 좋은 친구는 당연한데, 언젠가 네 곁에 서고 싶어 했던 멋진 사람. 그것도 같이….”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유찬의 모습에 도형이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너른 등을 팡팡 두드린다. 머리칼을 마구 헤집다가, 다시금 등 위를 토닥여 주었다.
 
“너는 충분히 좋은 친구야. 멋진 사람이고.”
 
이어지는 도형의 말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대답이었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메이크업이야 다시 하면 되지만, 이 순간까지 도형에게 이런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아 네 손을 잡지 못한 거지. 네가 부족해서 손을 잡지 않은 게 아니야. 그리고 넌, 최유찬 너는….”
 
언제나 생각하던 한 가지.
만약, 자신이 해성을 만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내게 연인으로서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유찬의 애정은 비좁은 제게 쏟아지기엔 너무나 크고, 따뜻하다.
그에게 똑같이 돌려줄 수 있을까. 아니, 저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유찬에겐 있어도 제겐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네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해.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니까.”
“그래, 그럼 됐고.”
 
도형은 몸을 뗐다. 울먹거리는 유찬의 모습에 저도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그조차 환하게 웃으며 숨겨 버렸다.
 
“고마워. 그래도 나랑 친구로 남겠다고 말해 줘서.”
“너, 나 아니면 친구 없잖아.”
 
장난스럽게 말하는 유찬의 말에 도형이 눈을 흘겼다.
이럴 거야? 눈에 쓰여 있는 핀잔에 유찬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두고 봐.”
 
이어지는 한마디에 도형이 웃으며 자신의 팔짱을 꼈다.
 
“뭘 두고 보면 되는데?”
“나, 정해성보다 더 멋진 남자 될 거야. 아, 최유찬 잡아야 했는데. 싶을 정도로 멋진 남자.”
 
당당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도형을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정말 응원하는 눈빛 같아서.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이 아무리 해도 넘지 못할 벽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네 눈엔, 정해성보다 아니겠지만.”
 
그래. 도형에게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을 그 존재. 정해성.
막상 이렇게 털어 두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뱉은 말대로, 차근차근 정리를 하다 보면 언젠가 홀가분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리고 도형의 등을 세게 팡팡! 두드렸다.
 
“아무튼. 촬영 잘 끝내자!”
 
힘 있는 한마디에 도형 역시 밝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잘 끝내자. 짤막한 대답과 함께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길게 흘려보낸다.
유찬이 홀가분해지기를, 저 때문에 더는 앓지 않기를.
이제 두 사람 모두 비로소 행복해졌다는 결말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차디찬 바람과 뒤엉켜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정해성
 
김도형 
이거 보면 전화해 
 
 
해성의 메시지가 액정에 찍혔지만, 도형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동해야 한다는 스태프의 말에 다급히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도형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깜빡거렸다.
 
정해성
 
네 사진,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어 
소속사에서 대응하겠지만 
일단... 
일단, 전화해.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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