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꿈을 꿨다.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좋은 꿈이라는 건 확신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반짝반짝 조각난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하는 걸 보다가,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깜짝 놀라 핸드폰을 확인하니 전화는 30분 전에 끊어졌고.
배터리는 바닥이 드러나 깜빡거리고 있었다. 다급히 충전기를 꽂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창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긴장될 건 또 뭐야. 있으나, 없으나 나랑….”
아니,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다급히 창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돌아갔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
아래에는 여전히 해성의 차가 있었다.
창문은 올라간 채였지만.
“왜 안 가고 저기에 있는 거야.”
속상했다. 여기에서 밤을 지새운 건가, 차에서 잤나? 수많은 생각이 겹치며 두 다리가 움직였다.
잽싸게 카디건을 들어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가 집 앞에 있으면 어쩌지, 싶은 생각은 이미 날아간 뒤였다.
벌컥 문을 열고 해성의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운전석 창문을 콩콩 두드렸다.
짙게 선팅이 된 창 너머로 그의 실루엣이 보인다. 창에 기대 잠들었던 건지, 부스스하게 일어난 그가 도형을 가만히 주시했다.
잠기운이 섞인 듯 흐린 눈으로 도형을 바라보며 상황을 인지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깜짝 놀란 그가 뒷좌석에 있던 모자를 눌러쓰며 마스크를 낀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너, 이러고 있으면-”
“왜 안 갔어요?”
해성이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제가 잠들기를 기다려 줬고,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무모한 제 선택에 놀라 차에서 내려 묻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네가….”
하지만 지금 해성은 제가 모르는 모습이었다.
도형의 말에 당황하고,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
도형은 주먹을 꽉 그러쥔 채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집에 안 갔어요. 오늘 지방 촬영이잖아요.”
“알아.”
“아는데 왜-”
“걱정돼서.”
툭 뱉는 한마디에 이토록 가슴이 요동칠 일인가.
이제껏 제가 받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고작 이런 걸로 감동을 받거나,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건데.
하지만 이 사실이 그저 좋기만 하다면.
저를 위해 집 앞까지 쫓아오고, 기다려 준 게 고맙다고 한다면.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하경의 존재였다. 그를 좋아하던 게 아니었나. 어젯밤엔 그저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해성의 호의를 받아들였다지만.
그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 연민이든 동정이든 죄책감이든. 제게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무렵, 그제야 해성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형, 옷이.”
늘 댄디한 스타일을 유지하고는 했었다.
니트, 셔츠, 슬랙스, 면바지. 댄디 룩 컨셉의 화보가 많은 것도 그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 때문이었는데.
오늘은 그의 체형을 가리는 박시한 후드 티에 청바지, 처음 보는 흰 운동화까지 신었다.
거기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진짜 어디 가도 정해성이라고 생각 안 하겠네.”
그 누구도 해성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 오려고 좀… 다르게 입었는데.”
“어디서 난 건데요?”
“경수한테 빌렸어.”
매니저에게 빌려서까지 여기에 왔다는 사실에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을 숨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다 문득 이곳이 집 앞 골목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해성의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도형아.”
“일단 들어가요.”
“잠깐만-”
“잠깐만이고 뭐고, 빨리요.”
도형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해성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집에 들어가면 일이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아니, 도형조차 제가 아닌 것 같다고 했으니 괜찮으려나.
하지만 정해성만 아니면 된다는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 같은데. 내가 저 집을 들어갈 자격은 있는 걸까.
수많은 생각을 곱씹는 사이, 해성은 어느새 도형과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쾅! 문이 닫히기 무섭게 도형이 해성을 무섭게 돌아봤다.
“일하러 가는 사람이 잠 한숨 못 자면 어떡해요.”
“차에서 잤어.”
“그게 배우가 할 말이에요?”
이런 도형의 모습도 처음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해성이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요? 일단… 우태 형 오기까지 두어 시간 남았으니까, 조금이라도 눈 붙여요.”
“눈 붙이려면 차로 가야 하는데.”
“아니요. 여기서요. 손님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면 되잖아요. 설마, 한숨도 안 자고 가려고 했어요? 잠깐이라도 자고 움직여요.”
제게 잔소리를 하는 도형의 모습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이처럼 사랑스럽게 들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제가 이제껏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쩌지.”
이어지는 해성의 말에 도형이 카디건을 벗으며 그를 마주했다.
“뭐가요? 왜, 뭐 문제 있어요?”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건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속을 달래 보지만, 묘한 기분은 떨쳐 내지 못했다.
도형을 마주하던 해성이 마스크를 벗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가기 싫으면.”
이처럼 애틋하게 느껴질 거라면.
“너랑….”
이토록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같이 움직이고 싶으면, 어쩌지. 도형아.”
네게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갔을까.
해성의 쓴웃음에 도형 또한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오묘했다. 집 안에 흐르는 정적이 조금 더 이어질 무렵, 도형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 일단 얼른 가서 자요.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걸요. 지금은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아, 손님방은 저쪽. 서재 옆이에요.”
당황해 이런저런 말을 하며 자리를 피하는 도형의 뒷모습에 해성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
손님방이 어디인지 안다는 말은 하지 말자. 지난번, 도형의 히트 사이클 때 집에 와서 둘러봤다는 말도 할 필요가 없지.
해성은 모자를 벗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손님방 앞에 멈춰 선 채, 거실 한가운데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도형을 바라보았다.
“깨워 줄 거지?”
언젠가를 상기하게 하는 말이다.
그땐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깨워 달라는 말을 남겼지만.
“네. 그럴게요.”
도형도 저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을 테고.
과거에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오니 지난날이 자꾸만 겹쳐 보이는 모양이다.
씁쓸한 마음을 삼킨 채, 손님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천천히 손님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탁한 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님방 신세라.”
받아들여야 하는 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다.
바싹 마르는 입안을 혀로 축이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 위로 털썩 눕기 무섭게 도형의 냄새가 났다.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햇살의 냄새. 거기에 뒤엉킨 복숭아 향의 달달함. 그리고 포근한 집 냄새까지.
“…돌아왔다.”
자기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지만, 놀랄 새도 없었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기 때문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시 뒤척거리던 그가 이불을 품으로 가득 끌어당겼다.
도형아.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부드러운 이불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
소파에 앉은 도형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해성이 집 앞에서 기다렸고, 저는 그를 데려왔다.
해성은 손님방에서 자고 있고, 저는 거실에서 그런 그를 깨워 줘야겠노라 마음먹고 있다.
이 상황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거나,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정해성이라 그런 거겠지.”
그래,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답을 내렸어도 머리가 복잡한 건 어쩔 수 없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머리를 헝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흔들려서도 안 되고, 휘둘려서도 안 된다.
혼자 그런 다짐을 이어 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부재중 전화에 메시지까지 보낸 유찬에게 연락을 하고, 우태에게 말을 해 놔야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걸음이 우뚝 멈췄다.
“…혼나겠지?”
그냥 혼나는 게 아니라 잔소리 폭격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행동에 후회가 없다면, 도리어 지금 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된다면.
“뭐, 어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대상이 해성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우스웠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유찬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최햇살
응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무 일 없었어
우리 하경 씨랑 백화점 갔을 때. 그 말을 하려다가 지워 버렸다.
유찬에게 친구 이상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전한 이상, 지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맞다.
예전처럼 친한 친구로서 남기 위해서는, 그에게도 감정을 식힐 여유를 줘야겠지.
미안한 마음을 입에 넣어 곱씹다가, 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가 가고,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일어났어?]
놀란 목소리에 괜히 입술을 삐죽거린다.
“형,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늦게 일어나는 줄 알겠어.”
[아니, 야. 어제는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형 조금 걸릴 것 같은데. 회사 들렀다가 가야 돼서.]
“괜찮아. 그게 아니고, 말할 게 있어서.”
[어어, 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참 망설이고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 집에-”
[뭐, 누가 들어왔어? 들어오려고 해?]
우태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니 제가 더 가슴이 쿵 떨어졌다. 하마터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뻔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건 절대 아니고.”
[깜짝이야. 그럼 뭔데?]
“그러니까, 지금….”
고민하다가 방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자고 가라 한 건 저인데,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아니, 미리 말을 하면 지금 쫓아올 수도 있으니 괜한 말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오면 알게 될 일인데.
자리에 털썩 앉아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면 알아.”
[야, 형 궁금하면 못 잔다.]
“어차피 잘 시간도 아니잖아. 조심히 운전해서 다녀오고, 이따 봐. 형.”
[하여튼 말은 잘하지.]
“그리고 올 때 회사 옆 빵집에서 소금빵 좀 사다 주라. 나 거기 소금빵 좋아해.”
[소금빵? 몇 개. 세 개면 되나?]
“다섯 개.”
[많이도 먹네. 그래, 알았어. 이따 보자.]
“응. 이따 봐, 형.”
역시. 말을 돌릴 땐 먹는 게 최고다.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태가 도착한 뒤의 상황이 제법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아휴, 다시 한번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가. 의구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