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은 마른침을 삼키며 우태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우태는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며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형, 괜찮아. 이야기해도 돼.”
제가 상처받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제가 또 상처받고 구석으로 숨어버릴까 봐.
하지만 지금의 도형은 예전과 다르다. 늘 도망치며 자신을 숨기기 위해 급급했던 모습은 버린 지 오래였다.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섰으니, 앞으로는 어지간한 일로 숨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니까.
“나는.”
우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도형을 마주했다.
“나는, 찬성이다.”
그리고 활짝 웃는 모습에 도형은 당황했다. 뭐? 되묻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유찬이라면 찬성이라고.”
“…찬성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 나는-”
“친구라서 안 돼?”
또, 할 말을 잃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정확하게 꼬집는 그의 물음에 도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이유가 되는 되는 건데?”
“아무래도….”
“뭐, 정해성이랑 연애할 때부터… 아니, 그게 연애냐? 하여튼 결혼 초기부터 봐 왔던 애라 안 돼?”
“그것도 있지만.”
“아니면, 네 가장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지켜본 사람이라서?”
도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또다시 바닥을 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그의 모습에 우태는 크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도형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 그 손을 힘껏 붙들었다.
“형이 딱 한 번만, 꼰대 발언 좀 해도 되겠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도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사람이 늘 좋은 모습만 보여 줄 순 없어. 그건 너도 잘 알지?”
“응, 알아.”
“그렇다는 건, 사람이 항상 좋으리라는 법도 없다는 뜻이야. 바닥 찍고 내려갈 때도 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올라올 때도 있겠지. 지금 나처럼, 혹은 너처럼.”
꼭 쥔 손을 감싸는 따듯함이 느껴진다. 도형은 손등으로 닿는 온기에 아랫입술을 힘껏 짓눌러야만 했다.
우태의 말과 손길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차올랐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할 것 같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에 도형이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태를 가만히 마주한다.
“…형 같은 사람?”
예상했으나,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인 건 우태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도형을 툭 치고, 코 아래를 슥슥 문질렀다.
“자식이, 비행기 태우고 있어.”
그 모습에 도형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태의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는다.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를테면.
“유찬이 같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게 가장 좋지.”
생각하지 않으려던 이름이 우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흠칫 놀란 도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태를 마주했다.
“유찬이 같은 사람이, 네게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도형아.”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우태가 도형의 손을 힘껏 감싸 주었다. 그러곤 한참 고민하는 듯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알아. 유찬이 좋은 친구지. 의리 있고, 생각 깊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재치 있고, 재미있고. 거기다 너랑 같은 직종이니까 서로 공감대도 형성될 테고. 똑같이 시작했지만, 차이가 있으니 네게 자극제가 되어 줄지도 모르지.”
우태가 하나하나 짚어 주는 이야기는 모두 틀린 말이 없었다.
그에 대해서 읊는 내내 머릿속으로 유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인생에 있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의 유형이 아닐까 싶었다.
마치 태양 같은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면서 따뜻한 빛을 안겨 준다. 이따금 구름이 가득 몰려오더라도, 그 너머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고.
그저 척박하기만 했던 메마른 마음에 폭풍이 몰아칠 때도, 자신을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던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우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유찬의 존재가 부족하다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그렇기에 결국, 그를 연인으로 곁에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형…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친구로 두면 좋지. 하지만, 인생의 반려자라면 더 좋지 않겠냐.”
반려자. 제게 두 번은 없을 것 같은 말이다. 멍하니 우태를 바라보는데,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유찬이가 널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도형이 너도 조금은 마음을 열어 봐.”
알고 있다.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건 저였으면서, 정작 마음의 귀퉁이조차 내어 주지 않았으니까.
“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해. 왜 머뭇거리게 되는지도.”
“응….”
“하지만 도형아, 어차피 곁에 둬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사랑이어도 괜찮지 않겠냐?”
사랑. 우태의 입에서 나온 직접적인 단어에 도형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내가 그런 걸 해도 되는 걸까, 형.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하는 걸까.
어쩌면 인연이 없는 단어를 억지로 잡아끈 탓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닐까.
수많은 이야기가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도형은 아무 대답도 내어 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우태를 바라보며 입을 벙끗거리기만 할 뿐.
“이제 너도 사랑받아야지.”
하지만 이어지는 한마디에 왈칵, 눈물이 차오르고 만다.
“그럴 자격이 충분한데.”
꼭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대답이 도형의 가슴을 힘껏 움켜쥐고 뒤흔든다.
“김도형 전성기는, 연기자로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결국, 더 말을 잇거나 생각의 꼬리를 물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힘껏 짓씹으며 울음을 참아 냈다.
“이제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따뜻하게 안아 주는 두 팔의 온기에 몸을 맡긴 채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찬의 고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볼 것.
도형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숙제였다.
***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끝끝내 유찬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물론, 도형 역시 먼저 연락을 하는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혹여, 자신의 연락으로 유찬이 더 난감해질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메시지를 보냈다. 무척이나 긴 시간을 고민한 결과였다.
최햇살
진짜 시작이네
잘해 보자
내일 만나 유찬아
답장을 받진 못했으나 도형은 그에 서운함을 곱씹지 않았다. 제게 서운함을 느낄 자격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걱정은 됐다. 혹시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겪은 유찬이 진절머리가 난 건 아닐까. 더는 저와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니, 그게 아니라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라 공적인 연락 외에는 모두 받지 못하는 걸까.
물론, 이 모든 고민은 도형이 홀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유찬에게 피해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걱정이 한데 얽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대본 리딩을 겸한 제작진 MT 날이 다가왔다.
“야, 대본 리딩은 또 얼마만이냐. 그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우태가 환하게 웃으며 도형에게 물었다. 그는 백미러로 도형을 힐끔 보더니 흠흠! 크게 헛기침을 했다.
“오늘 그 뭐냐. 유찬이도 온다던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도형이 화들짝 놀라 우태를 돌아봤다.
“나 유찬이 생각 안 했어.”
“누가 뭐래? 그냥 유찬이 온다고 한 건데?”
도형은 우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놀린 게 분명하다.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이야 우태라면 눈치챘겠지. 언제 연락이 될지. 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받은 건 아닌지 매일 매일 걱정했으니까.
다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우태가 말한 ‘친구 이상’의 감정이라든가. ‘인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는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
괜히 한숨을 쉰다. 제 안에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충돌하는 것 같아 속이 답답했다.
그런 도형의 모습을 본 우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되게 특이하다. 이번에도 대본 리딩을 산속에서 하네.”
“MT 개념이라고 하잖아. 나 감독님이 이런 거 좋아해서 그러지 뭐.”
하긴. 한마디를 덧붙이며 싱글벙글 웃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푸르른 녹음을 눈에 담았다.
직전 작품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나들이 가듯 삼삼오오 모이고, 그곳에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본을 리딩했다.
‘형, 같이 나오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쵸.’
잔뜩 신이 나서 말하는 저를 보며 해성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더듬어 보았지만 특별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게.’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만 떠오를 뿐.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해성의 차를 타고 단둘이 움직였음에도 그는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때의 김도형은 그 순간이 마냥 좋기만 했다. 일 때문에 가는 거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해성과 단둘이 차에 올라타 있다는 사실이,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에 해성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해성의 행동은 별다르지 않았다. 밥을 먹고, 대본 리딩을 하고, 쉬는 시간을 가지며 친목을 다지기도 했지만. 도형은 언제나 해성이 아닌 우태와 함께였다.
가끔은 배우끼리 붙어 대본을 살피고, 대화를 나누고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형이랑은 그런 적이 없네.’
집에서 보이던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 유진과 예현의 접점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해성과의 개인 리딩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지.
때문에, 도형의 개인 리딩은 대부분 소연과 함께였다. 관계성으로 봤을 때 그게 맞겠거니 싶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 도형 씨랑 나랑 괜히 소문나겠다. 하도 붙어 있어서.’
우스갯소리가 분명했지만, 웃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맞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활자를 눈에 담는 게 전부였다.
어떤 대사를 치며 행동하고, 무슨 감정을 드러내야 할지 머릿속에 욱여넣기 바빴다.
이따금 해성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건 질투나 섭섭한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저 도형 혼자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배우 대 배우로 나를 보고 있었어.’
해성의 눈빛은 딱딱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고.
‘오늘은 소연 선배님이 리딩을 많이 도와줬어요.’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툭 던진 말에도 해성은 시큰둥했다.
‘잘됐네. 둘이 겹치는 장면이 많으니까.’
시선은 여전히 대본을 향한 채였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던 도형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 멀리 3일간 묵게 될 숙소가 보였다. 5층짜리 새하얀 건물이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볼 때마다 참 곧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뒤로 마련된 정원에는 언제나 새하얀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몇 개씩이나 되는 의자에 앉아 대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었다.
언젠가의 기억을 곱씹던 도형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
이어지는 부름에 우태가 백미러로 도형을 힐끔거렸다.
“어, 왜?”
“잘해 볼게.”
뒤이어 나온 도형의 말은 다짐이나 다름없는 한마디였다. 마치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굳게 다짐하며 중얼거린다.
“그래, 잘해 보자.”
우태 또한, 도형의 다짐을 지지해 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도형은 환하게 웃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잘해 보자. 다시 한번 속으로 되새기던 그 찰나.
핸드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리고 화면을 본 순간, 도형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해성
3일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얼굴 맞대고 하기에는 어려운 사이니까. 잘해 봅시다. 김도형 씨.
하나는 해성의 메시지였고.
최햇살
도형아 오고 있어?
나는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그런가 심심하다
언제 도착해?
아!
연락 못해서 미안
나... 사실 러트가 겹쳐서
걱정 많이 했지?
또 하나는 유찬의 메시지였다.
이게 뭐지, 혼자 중얼거리던 도형이 잽싸게 핸드폰 액정을 끄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상황.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도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