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이 끝나고 며칠 뒤, <별을 담은 잔>의 제작 발표회 일정이 결정됐다. 주연 배우들과 감독이 한데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언론사들의 관심은 제법 뜨거웠다.
흥행을 거둔 전작에 이어서 5년 만에 연작으로 돌아온 나태석 감독과 정해성, 전소연, 김도형, 최유찬.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도형과 해성. 모든 인터뷰가 그들에게 향하리라는 건 출연진 모두가 예상한 일이었다.
각자의 대기실에 있던 배우들이 나 감독의 호출로 그의 대기실에 모인 상태였다.
발표회에 들어가기 전, 미리 인터뷰 대비를 하자는 그의 뜻이었다.
예상 질문지를 한참 바라보던 나 감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해성과 도형을 번갈아 보았다. 넌지시 건넨 한마디가 제법 진지하다.
“두 사람에게 질문이 몰릴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이미 예상한 일이니까. 김도형 씨도 마찬가지겠죠?”
해성의 물음에 도형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의 대답에 해성의 시선이 돌아온다. 며칠 전의 일은 입에 담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니, 그걸 말해서 뭐 해. 제게도 도형에게도 하등 도움이 안 될 게 뻔한데.
“최대한 드라마 쪽으로 질문을 돌릴 수 있도록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중요하겠네요.”
“기자들이 괜히 기자들일까, 저 사람들 잔뼈 엄청 굵을 거예요.”
유찬의 말에 한숨을 푹 쉬던 소연이 예상 질문지를 휙휙 넘겼다. 어쩌면 여기에 적힌 질문의 절반도 대답하지 못할 수 있다.
해성과 도형에게 질문이 돌아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을 그저 가십거리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도형 씨.”
소연의 부름에 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이 조금 긴장되어 보였다.
“정신 바짝 차려요. 정해성 씨는 쉽게 건드리지 못해.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 쌓아 온 것들이 다르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도형 씨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공백기 전의 일도 있었고….”
그리고 해성에게 돌아가는 건 싸늘하게 식은 소연의 눈빛이었다. 그에 나 감독이 흠, 짧게 헛기침했다.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워낙 연기파 배우들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저들이 맡은 배역의 감정선은 잊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촬영장의 분위기라는 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겠노라 다짐하며 다시금 질문지를 휙휙 넘겼다.
“도형아.”
그때, 유찬의 목소리가 닿는다. 도형이 그와 눈을 마주하기 무섭게 길게 접히며 웃는 눈매가 보였다.
“걱정하지 마. 최대한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울게.”
“…고마워.”
도형 또한 해사하게 웃어 주었다. 이럴 때 자신의 편이 있다는 건 이토록 든든한 일이었구나. 새삼스럽게 이 드라마에 참여해 준 유찬이 고마웠다.
잘해 보자, 마음을 먹었던 그때. 해성이 다리를 꼬아 앉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유찬을 바라보며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뭘 도울 생각입니까?”
다시 한번, 대기실의 분위기가 서늘해진다. 네 사람의 시선이 해성에게 닿았지만, 그는 아랑곳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최유찬 씨가 말을 얹으면 기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들의 가십이 우리가 아닌, 김도형 씨와 최유찬 씨에게 향하게 될 거고요.”
“…흠, 그런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지.”
나 감독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하자, 해성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두 분이 무슨 사이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묻지 않는다 해도, 최유찬 씨가 김도형 씨를 감싸고돌았다는 부분을 기사에 실을 수도 있겠죠.”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도형 씨가 이겨 내야 할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담담하고 냉정한 그의 말에도 유찬은 아무런 말도 얹을 수 없었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었으니까.
이겨 내야 할 사람은 도형이었다.
이제까지 견뎌 온 시간보다 더 힘들 줄을 알면서도 뛰어들었다. 홀로서기를 보여 주어야 이다음에 들이닥칠 파도 또한 유연하게 맞닥뜨릴 수 있으리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도형이 입을 열었다. 질문지를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희미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도 남은 네 사람은 웃을 수 없었다.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관심이 도형에게만 쏠리는 게 어지간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한숨을 푹 쉬며 질문지를 내려다보는 도형의 모습을 힐긋 쳐다보던 해성이 입술을 꽉 물었다.
나 때문에,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에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
시작은 순조로웠다. 기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드라마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공동 질문이 끝나자 한 사람씩 차례대로 개인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성의 차례가 되었을 때, 나로일보의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함께 촬영하는 김도형 씨와는 결혼 직전에도 나 감독님의 드라마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파경 직후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을까요? 두 분의 불화설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한 적이 있기에, 염려하는 분들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도형은 테이블 아래에서 마이크를 힘껏 쥐었고, 해성은 느른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한참 생각하던 그가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논지에서 벗어난 질문이기는 하지만.”
낮고 굵은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진다. 일명 동굴 목소리라고 불리는 그의 음성이 시작되자마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혼과 파경은 김도형과 정해성,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일이었고… 나 감독님과 함께 하는 작업은 배우로서의 일이죠. 배우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역할이든, 서로가 어떤 사이든 간에 말입니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녹음기를 무대 위로 가까이 들이미는 사람. 각기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해성은 귀찮다는 듯 이마를 살살 긁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왜,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가 거론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논지에서 벗어난 질문은 지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3년 전에 모두 끝난 이야기니까요.”
그 한마디에 기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질문은 그가 바라던 대로 드라마와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다시 소연과 합을 맞추는 것에 대한 소감, 나 감독의 연락을 받았을 때의 기분. 그리고 드라마와 원작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과 생각.
그렇게 해성의 차례가 끝났을 무렵, 기자들의 시선이 도형에게 꽂혔다.
일순간, 등이 꼿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경직되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마이크를 힘껏 쥔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드라마에 관련된 질문들이 이어졌다.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예현의 역할이 부각되는 점에 대한 소감과 생각. 원작과 드라마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유찬과의 러브 라인이 부담스럽지 않은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까지.
해성의 덕인가 싶었던 그때. 나로일보의 기자가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정해성 씨와 마찬가지로 꽤 오랜 휴식기를 가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도 김도형 씨의 연기력에 관한 문제가 대두됐던 적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숨을 고르게 내뱉던 도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입가에 가까이 가져왔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 숱하게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정도면 될까요? 아무래도 그땐…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게 너무 많았고, 아직 부족했던 탓에 개인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나누지 못한 게 가장 컸던 것 같아서요. 그 시간을 거쳤으니, 전보다 더 단단해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제 그럴 일이 없다는 말일까요?”
“네, 이 부분은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습니다.”
“당시 정해성 씨가 언급한 부분은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연기를 하는데 지장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만, 이번 드라마 촬영에는 철저히 공적으로 임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또 다른 기자의 질문이었다. 다시금 찾아오는 과거의 기억에 도형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다. 대답을 해야 하는 건 아는데, 머리에서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보다 못한 해성과 유찬이 마이크를 쥐려던 그때.
“네.”
도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나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는 이유는, 딱 하나. 연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카메라 앞에서 주어진 역할에 매진하고 싶어요. 제 연기력과 그에서 따라오는 몰입도에 관한 건 시청자 분들이 판단해 주시지 않을까요? 이번 작품을 통해, 이전과 달라진 김도형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자님도 같이 지켜봐 주세요.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에요.”
예전과 다르지 않은 도형의 모습에 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유쾌하고 활발한,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도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도형은 여전히 마이크를 힘껏 쥔 채 웃었다.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더 길게 말아 올렸다.
수없이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캐릭터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 직업군을 몇 번이나 만나 보고 인터뷰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눕는 순간까지 대본을 닳도록 보고, 또 보았던 자신의 노력은 그 결과를 가져다주리라 확신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모습에 기자들은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대부분이 드라마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마침내 유찬의 차례에 다다랐을 때, 기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별을 담은 잔>은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세상의 이야기인데요, 여기에서 김도형 씨와 러브 라인을 형성하는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짧게 고민하던 유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꼭 성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제가 이 말을 하는 게 설득력은 없겠지만,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가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성별이나 형질 같은 것들이 사랑의 기준처럼 다뤄지지는 않으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에 담는 데 별다르게 생각해야 할 게 또 있을까요? 그 마음으로 연기에 임할 생각입니다.”
“최근 김도형 씨와 최유찬 씨의 만남이 잦다는 말이 많은데요. 이 또한, 드라마를 위함일까요?”
그에 해성의 시선이 유찬에게 돌아왔다. 올 게 왔지?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유찬은 흔들리지 않았다. 생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니요. 원래도 김도형 씨와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습니다. 친한 친구를 자주 만나는 것뿐이지, 드라마와 관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출연을 결심하기 전부터 자주 만나고 있었어요. 그만큼 친한 사이입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었던 그때, 기자 하나가 툭 던진 말에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두 분 사이에 유의미한 감정은 단 하나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두 분이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