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산을 넘고 나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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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성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것들, 저의 세계를 모두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미련할 정도로… 제가 갉아먹은 시간만큼 채워 줄 생각입니다. 그게 얼마가 걸리든, 얼마나 힘들든. 제가 뿌린 씨앗이니, 거두는 것도 저여야 한다는 점.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삽시간에 녹화장 안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당황한 진행자 역시, 자세를 바로 한 채 해성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오래전, 제가 생각 없이 뱉은 말로 김도형 씨 날개를 꺾었다는 점. 인정합니다. 너무 오만했죠, 제가. 정해성 그 석 자가 뭐라고.”
“석 자가 좀 대단하기는 해요.”
 
괜히 한마디를 얹는 진행자의 재치에 해성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털어놓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그 점에 대해 무척 반성하고 있습니다. 후회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예.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방적인 마음은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고, 두드린 끝에 얻어 낸 도형이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 친구가 받은 상처는 아마 씻어 내도 남아 있을 테고, 흉이 남아 지워지지 않을 테니… 그 또한 제가 감내하려고 합니다.”
 
해성이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고, 진행자는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시 해성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럼 여기서 물어봅시다. 김도형 씨가 왜 좋았는지. 어떤 점에서 끌렸는지.”
“…여기서요?”
“예.”
“전부?”
“전부.”
“괜찮을까요?”
“괜찮고말고요.”
 
이미 시청률은 따 놓은 당상이니, 더 많은 것들을 캐내겠다는 심정이겠지.
이걸 노렸다. 이 또한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다.
해성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점이 매력 그 자체가 아닐까요. 연기에 소질이 있어요. 지금보다 더 갈고닦으면 아마, 저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아, 연기로.”
“네. 그리고 참, 사람이… 착해요.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고. 그때 제가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 매번 상처를 준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할 정도로.”
“본인이 못된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네요?”
“그럼요. 그러지 않으면 김도형 씨 앞에서 떳떳할 수가 없죠.”
“이야… 이거,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분들마저도 오그라들게 만드는 이야기인걸요?”
 
진행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고, 해성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후, 도형을 향한 극찬은 계속됐다.
편집이 되어 나가지 않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괜찮았다.
연이어 있을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테니까.
아주 조금, 해성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
 
[수다] 진실의 책상 봤음?ㅋㅋㅋㅋㅋㅋ
 
ㅈㅎㅅ 미친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국민앞에서 주접을 떨더랔ㅋㅋㅋㅋㅋ
개얼척없는데 웃기고귀여움ㅋㅋㅋㅋㅋㅋ
 
댓글 (239)
우리엄마 그거보고 욕하다가 어이없다고 웃음ㅋ
└222 우리엄빠도 ㅋ 근데 솔찌 멋잇더라
└└지잘못인정하는 점에서 ㅇㅈ
상장폐지됐던 내주식 다시떡상중 ㅠㅠ
ㅈㅎㅅㅁㅊㄴ 222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서특필하지 외~
난 좀 웃겼음ㅋ… 이제와서 후회라…
돟맘으로 난 지켜볼거다 ㅡㅡ 또 우리 돟 울리는지 안울리는지
└222 지켜볼거다 ㅡㅡ
└└333 개짱나는데 솔직히 잘어울려서 할말 없음
└└└눈에서 꿀떨어지던데 ㄱㄷㅎ 이야기 할때마다
됏고 지 실수 인정하는 것부터 쌉인정이지… 난 절대 그렇게 못함
└ㅇㅇ 이거맞다 정해성정도되는데 지실수 인정한다? ㅇㅇ ㅇㅈ
└└좀만더 후회해줬음 좋겟는데ㅡㅡ…
 
***
 
ㅋㅋ 그럼 그 배우 뭐냐 이용당하셧다매?
엔드패치가 쇼한거냐 그 배우가 쇼한거냐?
막상 배우 쪽에선 말 안 나옴 ㅋ 망상 오지네
재연배우라더니 뇌내망상 재연한거아님?ㅋㅋ
엔드패치가 이상한거지 이건ㅋ 엔드패치가 엔드패치함
 
해성이 토크 쇼에서 폭탄을 터트린 이후, 언론사는 각기 다른 기사를 보도했다.
해성과 도형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기사, 나 감독의 다큐 티저가 공개되며 여론이 돌아서고 있다는 기사, 스케줄 논란에 잇따른 형질별 고난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댓글의 흐름과 방향 또한 판이하게 달라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어. 히트러트 x나 힘든 거 누가 모르냐?
돈 먹었나봄ㅋ
노이즈마케팅 햇겟지 ㅋ 배우가 ㅋ
 
댓글에는 형체 없는 칼이 난무했고, 칼끝은 엔드패치와 하경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던 하경이 한숨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무릎 위로 핸드폰을 엎어 둔 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이거 어쩔 겁니까?”
 
픽 웃던 옹 기자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린다.
바깥에서 만나자니, 세간의 시선이 신경 쓰여 아무 데서나 만날 수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장소는 하경의 자차뿐이었다.
 
“뭘 어쩔 거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 크게 한 방 터트릴 수 있다면서요.”
 
옹 기자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제껏 제게 사진을 받아 가며 기삿거리를 주워 먹던 남자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확실하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누굽니까?”
“아니, 나는-”
“김도형이든 정해성이든, 하나 엮어서 제대로 터트릴 수 있게 해 주겠다. 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더니. 이겁니까? 지금 이거 다른 곳에서 터지는 거 보라고, 뭐 나 갖고 논 거예요?”
 
옹 기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하경의 머리 또한 복잡해졌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도형과의 열애설은 쓸모없게 됐다. 옹 기자와 마주 앉아 녹음했던 이야기들은 지금 내 봤자 웃음거리로 소비될 것이 뻔했다.
아니, 댓글 속 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재연 배우이니 뇌내 망상을 재연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연기는 할 수 있을까.
뒤이어 찾아오는 생각에 도형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당신 인생을 좀 더 소중히 생각해요. 머리 굴리려다가, 어렵게 쌓아 온 거 모두 잃는 수가 있어요.’
 
그때 말한 게 이런 거였나.
손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안쪽으로 그러쥐며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 좀 냉랭하긴 했는데… 점점 눈빛이 변하던데요? 아, 그리고 같이 지방 촬영 갔을 때. 같이 방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봤냐고요? 아, 그게 조명 쪽 스태프인데….’
‘좀 이상하기는 했어요. 누가 봐도 김도형 배우는 피하려는 것 같았고, 정해성 배우는 붙으려는 것 같았으니까. 최유찬 배우는 일부러 자극하는 것 같은? 뭐 그런 느낌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석이 되지?’
‘도형 씨랑 유찬 씨가 둘이 딱 붙어 있었어요. 친구니까 그렇겠죠. 장난도 많이 쳐서, 우리 메이크업 팀이 얼마나 많이 웃었는데요. 근데요, 그럴 때마다 정해성 씨 질투가 장난이 아닌 거야, 글쎄. 딱 봐도 방향성이 보였는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난 걸까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아마.
 
나 N 레지던스에 배달 갔는데 거기서 정해성이랑 김도형 봄. 기사 뜨기도 몇 달 전에 같이 들어가는 거 봤는데 이건 어케 설명할거? ㅋㅋ
김도형 집 근처에서 조깅하는데, 정해성이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날 나 봤음. 어쩐지 익숙한 사람이 창문 내리고 김도형 집만 쳐다보더라. 스토컨줄 알았는데 정해성일 줄이야 ㅋ
 
도형과 해성이 함께 있는 모습과, 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목격담이었다.
하경과의 목격담이나 일화는 무엇 하나 나오지 않으니, 모든 화살은 하경의 뇌 내 망상이었다는 결론으로 향했다.
더불어 나 감독이 하경을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모두 하경과 엔드패치에 등을 돌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엔드패치 또한 임하경이란 카드를 버렸음을 알리는 듯한 입장문을 게재했다.
 
김도형·정해성·최유찬 배우의 첫 스캔들 때부터 <별을 담은 잔> 대기실 사건, 해외 로케 촬영 당시의 사진까지 모두 A 배우의 제보를 통해 입수한 사진임을 밝힙니다.
엔드패치는 드라마 관계자인 A 배우의 제보만을 믿고,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하며 많은 분들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이에 엔드패치 일동은 고개 숙여 사과드리며, 투명한 언론 윤리를 위해 앞으로도 힘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하경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홀로 남아 버린 방 안에서, 그 누구도 제게 손을 뻗지 않았다.
일순간, 도형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엇도 남지 않을 거라는 말.
그 말 그대로였다. 무엇도 남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별을 담은 잔> 제작사 측에서 하경의 분량을 편집하지는 않을 거라며 통보를 해 왔다. 다만 이 모든 건, 하경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일 뿐이라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인 이유는 뭔지, 대체 어떤 이유로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지.
하경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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