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자각의 소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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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도형은 하경이 SNS에 올린 사진들을 훑었다. 정말 많이도 찍었다.
촬영 도중 쉬는 시간에 하나, 도형과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또 하나, 저녁을 먹으면서 하나. 그렇게 찍은 사진이 총 여덟 장.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점점 늘어나는 댓글과 좋아요 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저와 찍은 사진을 올렸을 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하경이 올린 사진은 어쩐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이상하지.”
 
중얼거리는 도형의 목소리에 우태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 바라봤다.
한참 고민하던 우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촬영장에서부터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오늘 임하경 씨랑 사진 많이 찍더라.”
“…그러게.”
“좀, 이상하지 않아?”
 
깜짝 놀란 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아니, 그렇잖아. 갑자기… 너한테 친한 척하는 것도 그렇고. 임하경 씨, 재연 전문으로 하다가 드라마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응. 그랬었지.”
“인지도라고 해 봤자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고, 어쨌든 드라마에서도 크게 주목받는 역할은 아니니까. 중반에 빠지지 않나?”
“그럴 거야. 중반부터 배경이 바뀌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일단 얼굴을 알리고 보겠다는 것 같아서.”
 
듣고 보니 우태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물론, 그런 마음을 존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저 또한 그랬으니까. 연극 판에서 단막극만 전전하던 때, 해성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었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다면 지금보다 덜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실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언젠가 도태된다.
떨어져 나가고, 휩쓸려 버릴 것이다.
그래서 악착같이 연기에 집중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받고, 그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역할이라도 붙잡았다.
그러니 저의 과거와 하경의 현재는 조금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거리를 둬야 맞겠지.”
 
멀어지겠노라 마음먹는 이유가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닐 테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핸드폰을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 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맞다, 나 감독님한테 들었지?”
“뭐를?”
“스크립터 새로 온다던데.”
“유정 씨는?”
“몸이 좀 안 좋대. 버텨 보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 다음 촬영 때부터 유정 씨한테 일 배울 거래.”
“그렇구나. 유정 씨한테 선물이라도 해야겠네.”
 
담담한 도형의 말에 우태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정 많은 놈. 혼자 중얼거리다가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도형의 시선은 다시금 창밖을 향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다가 슬그머니 눈을 감았을 때.
무릎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을 일으켰다.
 
‘귀찮아.’
 
누군지 확인이라도 해야 했는데,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눈도 무거워지는 탓에 핸드폰을 들 힘도, 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끊어졌던 진동이 다시 시작됐다. 진동이 무릎뼈까지 울리는 찰나를 참지 못해 도형은 핸드폰을 뒤집었다.
 
[최햇살]
 
유찬의 전화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명 하나는 기깔 나게 지었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니까.
 
“네, 김도형입니다.”
[촬영 잘 끝났어?]
“어. 잘 끝냈어. 근데, 너 내 매니저야?”
“뭐? 김도형 매니저가 지우태 말고 또 있어?”
 
놀란 우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도형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기운이 죽 빠져 있었는데, 웃을 기운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 그것보다는 제게도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긴 거겠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이 여유가 무척 소중했다.
 
[형한테 전해 줘. 내가 그 자리 뺏을 거라고.]
“쓸데없는 소리 한다. 너는, 스케줄 잘 끝냈어?”
 
오늘 유찬은 잡지 인터뷰를 했다. 아침부터 뷰가 좋은 카페에서 인터뷰를 한다고 자랑을 해 준 덕에 알게 된 일정이었다.
 
[엉아를 뭘로 보고. 당연하지.]
“뷰는 좋았어?”
[아, 맞다. 너 빨리 메시지 확인해. 너 보고 나면 SNS에 올리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보지도 않고. 일부러 촬영 끝나는 시간에 보냈더니!]
“어? 그런 걸 보냈었어?”
 
너스레를 떨며 말했지만, 사실 유찬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저 하경의 SNS를 확인하면서 기운이 쪽 빨린 탓에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뿐.
미안한 마음으로 잠시 기다려 보라 말을 남긴 뒤, 메시지 창을 켰다.
 
“와… 예쁘다.”
 
유찬이 보낸 건, 드넓게 펼쳐진 푸른 호수의 모습이었다.
산장을 카페로 개조했다더니, 확실히 사진에서 보이는 풍경이 남달랐다.
울긋불긋한 가을의 청취를 머금은 사진을 한참 보다가 도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최유찬 사진 실력이 나날이 늘어.”
 
다시 핸드폰을 한쪽 귀에 가져다 댄다.
곧이어 흠, 흠. 짧은 헛기침이 들렸다.
 
[비밀인데, 그거 내가 찍은 거 아니야.]
“응, 알고 있어. 놀린 거야.”
[너, 이씨. 엉아한테 그럴래?]
“엉아는 무슨. 그래서 용건은 촬영 잘했는지 궁금했던 것뿐이야?”
[아니, 보고 싶어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만큼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건 없다.
조용히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도형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곧게 세웠다.
 
“…또 장난친다.”
[장난 아닌데.]
 
왜, 이런 말들만 제 귀에 날카롭게 꽂히는 걸까.
평소였다면 들리지 않을 소리들이 하나둘 귀를 파고들었다.
유찬이 내뱉는 숨소리, 그가 타고 있는 차에서 들리는 소음. 그리고 작게 웃는 소리까지.
 
[진짜야.]
 
그 목소리에서 절절히 전해지는 진심마저도 도형의 마음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하나.
차라리 이 다정함에 기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 마음에 흔들릴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덜 복잡했으려나.
어떻게든 유찬에게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찬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밀려오기 무섭게 고개를 빠르게 젓는다.
 
“알았어. 얼른 들어가서 쉬어.”
[도형이 너는?]
 
끈질기다. 도형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일부러 대화를 갈무리하려고 했더니, 기회를 놓치지 않지.
 
[…맞다, 나 보고 싶을 그런 사이는 아니지. 우리.]
“…보고 싶어.”
 
도형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렇게라도 하면 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면 더 이상 고민에 휩싸일 일도 없을 테니까.
해성과 하경의 관계를 곱씹으며 기분이 저 바닥으로 내리꽂힌다거나.
하경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해성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갑갑함에 시달린다거나.
 
“친구로서.”
 
하지만 역시,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
웃음과 함께 이어진 도형의 목소리에 유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정도면 됐어.]
“…피곤하다. 나 좀 잘래. 내일 촬영이지?”
[응. 내일 우리 만나는 날이야.]
“온영이가 예현이를 만나는 날이겠지.”
[당신, 너무 차가워요.]
“쓸데없는 소리 하네. 또. 조심히 들어가. 들어가서 푹 쉬고.”
[응, 고생했어. 도형아.]
“유찬이 너도. 고생했어.”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다리 위로 안착한 손에 힘을 꾹 쥐었다가 놓으며 창가에 얼굴을 기댔다.
창문 위에 서려 있던 냉기가 볼을 감싸 쥔다.
 
“형.”
 
도형은 조용히 우태를 불렀다. 백미러로 도형을 힐끔거리던 우태는 대답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진짜… 나쁜 놈이야.”
 
유찬의 다정에 기대어, 그 다정을 이용해 호시탐탐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나쁜 놈.
차마 뒤따라오는 말을 뱉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차라리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 없던 일이기를.
해성을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한 뒤 이혼하고, 다시 촬영장에서 만난 일이 모두 거짓말이기를.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을 되뇌며 점차 잠에 빠져들었다.
 
***
 
도형과 전화를 끊은 유찬이 하경의 SNS 속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곤 귀에 꽂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케이스 안에 넣은 뒤,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하경이 도형과 이렇게 친했나? 아니,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많네. 사진이.”
 
아무리 같은 날 촬영을 하는 게 기분이 좋고, 친해지고 싶어도 이 정도의 사진을 찍나? 보통?
떠나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은 오래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힌 유찬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우태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빠르게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뒤졌다. 그리고 우태가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봤다.
 
‘정해성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
 
이건 진실이 아닐 것이다. 분명, 도형의 착각일 텐데.
이번엔 하경의 SNS로 들어가서 사진을 다시 뒤적인다. 액정 위로 보이는 건, 메이크업을 받고 나 감독과 대본을 살피는 도형과 해성의 뒷모습.
순간, 유찬의 머릿속에 절대 벌어져선 안 될 시나리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만약 하경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라면?
처음에는 분명 해성이었을 것이다. 가십거리로 이용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니까.
그가 가진 명성만으로도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건 충분하다. 노이즈 마케팅이긴 했으나, 도형의 이름을 다시 올리는 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다.
물론 임하경이 정해성을 이용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도형이 그 과정을 지켜봤다면….
 
‘충분히 설명이 돼.’
 
그리고 제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 다음 타깃은 도형이 분명했다.
저와 맞물리는 장면은 거의 없고, 도형과 해성, 그리고 소연과 함께 찍는 장면이 더 많은 배역이었으니까.
 
“…아, 진짜. 일이 꼬이려니까 별.”
 
중얼거리던 유찬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힌다. 콩! 헤드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타격감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쉽지 않다, 최유찬.”
 
더는 도형에게 누군가의 꼬리표나, 스캔들이 뒤따르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럼에도 우스운 건 딱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도형을 향한 제 마음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아해.”
 
언젠가 다시 한번,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읊조리는. 제법 작은 목소리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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