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의 도발에도 유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음번에는 제대로 보여 드리면 되겠네요. 그 섹슈얼한 감정.”
그저 지켜보란 말을 남긴 채 돌아섰을 뿐.
하지만 도형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얹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한들, 상황이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악화된다면 악화되겠지.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이 찾아왔다. 촬영이 없는, 간만에 만끽하는 휴식이었다.
하지만 도형은 하루의 시작을 달갑게 맞이하지 못했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집에 있지.”
우태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도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안 나가.”
“그런 말이 뭔데?”
“…친구가 없다는 말.”
우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도형이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는 건 알고 있다.
그 ‘어느 시점’이라는 건, 해성과 결혼을 한 뒤부터였고.
“혹시라도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면 바로 연락해.”
“응. 그럴게.”
“너 지금 히트 사이클 주기 찾아오고 있어. 알지?”
“알아. 걱정하지 마.”
“그래, 어차피 임하경 씨는 베타라서 걱정할 필요 없는 거 알아. 아는데….”
자신이 걱정이 되는 건 하경이 아닌, 그 백화점에 있는 다른 알파들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우태는 군말 없이 도형을 차에 태운 뒤 백화점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응. 알았어.”
“집에 오고 싶어도 전화하고.”
“형. 과보호야.”
“그리고 미리 미안하다. 도형아. 다 널 위한 거야.”
이어지는 우태의 말에 차에서 내린 도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미안해?”
이럴 때면 늘 불안해지던데.
더 묻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 시간에 가까워진 뒤였다.
“아무튼, 이따 이야기해! 다녀올게.”
도형은 우태에게 손을 크게 흔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 뒤, 마스크를 올려 썼다. 엄청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로 유명해져 있으니까.
누군가 알아본다면 그보다 피곤한 일은 없다.
괜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누군가 도형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놀란 도형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 유찬….”
이름을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아니, 여기서 그대로 말하면 안 되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의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너 보러 왔지.”
“나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야.”
“알아. 그래서 온 거니까.”
도형이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설마, 우태가 ‘미리 미안하다’는 일이 이건가?
“가만히 생각을 해 봤는데, 정해성이 말한 그 섹슈얼한 텐션이라는 거 말이야.”
유찬은 능청맞게 웃으며 그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러곤 제 주머니에 손을 쏙 집어넣더니 눈을 길게 접어 웃었다.
“실생활에서부터 먼저 우러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야, 이거 빼. 이러다 찍히기라도 하면!”
“그럼 훨씬 좋지.”
생긋 미소를 짓는 유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성이 유찬의 버튼을 제대로 누른 것만 같았다.
“우리 역할에 더 몰입할 수 있잖아. 안 그래, 도형아?”
***
도성혁
오늘은 집에서 쉬냐?
핸드폰에 뜬 성혁의 메시지를 본 해성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도성혁
혼자 노는 날
간단하게 보내고 나니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이런 메시지에 길길이 날뛰고는 했는데.
연차가 쌓이고, 어느 정도 노하우를 익히고 난 뒤에는 성혁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해성에게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란, 말 그대로 ‘혼자’ 있는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도형과 결혼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걱정은 좀 해 주지.”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툭 던진 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러곤 소파에 털썩 앉아 어젯밤 미리 정해 둔 코스를 죽 훑었다.
파스타가 맛있는 ‘로젤로’를 가서 점심을 먹고, 재개봉한 영화를 본다. 저녁에는 너무 달지 않은 딸기 케이크로 유명한 ‘예그리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중간에 괜찮은 곳이 있다면 산책을 하고, 잠시 앉아 해를 쬐는 것도 괜찮겠지.
얼굴이 알려진 입장에서 여기저기 다니는 건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해성은 당당했다.
누군가 저에게 알은척을 해 올 때면 담백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호들갑을 떨거나 피하려고 하면 입장이 난처해질 때가 더 많았다.
물론 혼자 있는 해성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다.
“귀찮아.”
그러면서도 머리는 곧잘 말리고, 손질했다.
옷장을 열어 한참동안 그 안을 살폈다. 적지 않은 양인데도 이럴 땐 무얼 입고 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오랜만에 입어 볼까.”
언제, 어떻게 제 옷장에 들어왔는지 모를 남색 캐시미어 니트였다.
감촉도, 색상도 모두 제가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언제 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옷을 집어 들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키니한 핏의 청바지와 계절감에 맞는 카디건을 걸친 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건 해성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블루투스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정적 속에 이동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음악을 듣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오늘은 별 뜻 없이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고, 흥얼거리며 시간을 흘리는 일.
“무슨 노래를 넣어 뒀더라….”
연결된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하자,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언제 들었는지 기억을 되새기며 한참 멍하니 노래를 감상하다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한적한 오후의 도로였다.
모두 출근해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새삼 이럴 때면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언젠가는 그런 자신이 동떨어진 사람 같았다.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이라고 여겼던 적도 있다.
‘형은 형일 뿐인데.’
순간, 도형이 뱉은 한마디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연기하는 정해성. 그것뿐이에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그 모습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오히려 더 멋있는 거 아니에요? ‘다른 세상’을 몇 번이나 오가면서도 형은 언제나 정해성으로서 우뚝 서 있잖아요.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 나는 그게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숨이 덜컥 막혔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 말을, 표정을, 순간을 잊고 살았던가.
눈앞으로 보행자 신호가 보인다. 다급히 페달을 밟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형! 안전 운전.’
조수석에서 잔소리를 하던 도형의 목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려서. 해성은 자기도 모르게 옆을 휙 돌아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참 바보 같다. 도형을 태운 적이 그리 많지도 않으면서, 이런 순간에 그를 떠올리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랫소리를 더 크게 키운 뒤, 다시 도로를 달렸다.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 찰나. 해성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 형 리스트에 담아 놨어요. 듣다 보면 내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처음으로 도형이 귀엽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이런 걸로 사람을 기억할 수 있기나 하겠냐고 말하려다가 말았던 그때.
“난… 뭐라고 대답했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대답 대신 노래를 틀었다.
개인적으로 차를 끌고 다닐 때도 플레이 리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100여 개가 넘는 곡이 들어 있었기에 더 질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나씩 돌아오는 기억들이 꼭, 저를 질타하는 것만 같다. 해성은 어처구니없이 웃으며 핸들을 힘껏 그러쥐었다.
“…그만해. 등신 같은 게.”
이제 와서 추억하고 회상해 봤자 달라질 게 뭐 있다고.
해성은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에 차오르는 추억들을 떨쳐 냈다.
간신히 도로를 달려 도착한 로젤로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했는데요.”
“아, 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센스가 좋은 사람이었다. 굳이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햇볕이 가장 잘 들지만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귀퉁이에 위치한 자리였지만 옆에 트인 통창 너머로 서울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자리라니.
‘여기 완전 명당이에요. 그쵸?’
들리는 목소리는 역시, 도형의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신이 나서 메뉴를 보는 것 또한, 도형이었다.
“…너랑 왔었나?”
자기도 모르게 툭 뱉은 한마디에 도형은 심통이 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이건 제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그려 낸 모습이다.
도형은 제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으니까.
‘내 생일에 예약했었잖아요. 내가.’
“…나는 또, 너를 따라왔었구나.”
‘언제는 안 그랬나. 뭐, 그래도 괜찮아요. 같이 왔으니까.’
이건 도형이 했던 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같이 왔으니까. 그러면서 오늘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라고 말했지.
그때 저는 무어라 말했던가. 물 잔을 그러쥔 손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참… 나도, 참.”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듯 매만지다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도형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별을 한 뒤에도, 다시 혼자였던 삶으로 돌아왔을 뿐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갇혀 있던 건, 나였잖아.”
도형은 이미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다가, 자신이 나가려 하지 않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그러니 그는 다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지.
결국 모든 게 제 오만이었다.
어디도 나가지 않고 속하지 않기 위해 안으로 틀어박힌 건 정해성, 자신 쪽이었다.
“…그러니, 혼자 뭘 하든.”
네가 보이는 거겠지.
말로 뱉고 나니 가슴이 따끔거렸다. 한참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가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또 한 번 속이 쓰렸다.
‘형은 새우 좋아하니까, 여기 새우 들어간 파스타로 먹어요. 그리고 채소랑 치즈 좋아하니까, 이쪽 샐러드로 먹고.’
제 입맛대로 골라 주던 도형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아른거린다.
이제 그만해, 괜찮아. 읊조려 보기도 했지만 도형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는… 이런 순간을 모두 견딘 거구나.”
그러니 그토록 긴 터널을 지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 테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통창을 투과하는 햇볕은 따뜻하기 그지없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한기가 끊임없이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