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전하지 못했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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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촬영장에 가? 네 분량도 아니잖아.”
 
투덜거리는 성혁의 목소리에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바깥을 주시하는 시선이 무미건조했다.
 
“첫 촬영이니까. 분위기 좀 보려고.”
“그게 전부야? 진짜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냐?”
 
그 또한 대답을 전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평소 같았다면 굳이 성혁에게 숨기지 않고 본심을 이야기했을 텐데. 오늘은 입이 꾹 닫혀 열리지 않았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미쳤냐?’
 
길길이 날뛰며 차를 돌릴 수도 있었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러셨어요.’
 
비아냥거리며 자신의 과오를 질책할 수도 있고.
 
‘너도 참, 너다.’
 
오히려 더 속상해하며 말을 잇지 않을 수 있겠으나.
지금은 진정한 이유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도형을 보러가는 이유를 저조차 찾지 못했으니까.
보고 싶다. 그 감정에는 해답이 따라 와야만 했다. 어째서 보고 싶은지, 왜 이런 마음으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지.
연기를 잘 소화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 또한 답이 필요한 감정이었다. 확인해서 무얼 할 건지, 이미 대본 리딩에서 본 모습들일 텐데 제가 뭐라고.
그냥, 응원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게 가장 말이 안 되는 이유였다.
굳이 촬영장까지 쫓아가서 응원하지 않아도 연락 한 통이면 충분할 테니까.
 
“형. 오늘 도형이랑 누구라고 했지.”
“최유찬 배우.”
 
그래, 이걸 이유로 두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유찬이니까.
턱을 괜 채 바깥을 내다보던 해성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천문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떤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무슨 대화를 해야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수많은 생각이 켜켜이 쌓여 높은 탑이 된다. 하나씩 해내고 나면, 그 또한 사라질 테지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해성이 차에서 내리자, 그를 알아본 몇 스태프가 인사를 했다.
 
“어?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오늘 촬영 없을 텐데.”
“궁금해서요. 오랜만에 복귀하는 건데, 미리 와서 분위기도 좀 보면 좋을 것 같고.”
“아, 그렇구나. 감독님 저쪽에서 리허설 중이세요!”
 
해성은 짧게 목례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성혁의 부름이 들렸지만, 멈추어 서지 않았다.
나 감독이 있는 모니터에 도착한 해성은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어, 해성 씨. 무슨 일이야? 오늘 촬영 아니지 않나?”
“그냥 궁금해서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 감독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촬영 방식이나 분위기가 궁금한 건 아닐 테지.
리허설을 하고 있는 유찬과 도형이 고스란히 담긴 모니터를 응시하는 그를 보면 알 수 있다.
소리 없이 웃던 나 감독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모니터를 가만히 주시했다.
 
“많이 늘었지?”
 
해성이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 또한 해성을 마주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도형 씨 말이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묵묵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던 해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이전에도 사실 대본의 이해도는 좋았어.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헤맸던 것뿐이지.”
“압니다.”
“그걸 옆에서 누가 잡아 주길 바랐는데 말이야….”
 
응? 나 감독이 되묻는 듯 해성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고, 해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한쪽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잡아 주는 역할이 제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걸 놓친 건 저고, 놔 버린 것도 저였다.
그러니 지금은 도형의 연기력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테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제가 도형에 대해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아무튼, 느낌이 아주 좋아. 유찬 씨랑 합도 좋고.”
“…누구와 더 합이 좋은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아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툭 뱉은 말이었다. 놀란 나 감독의 시선이 돌아왔지만, 해성은 애써 외면했다.
모니터 속 도형은 나 감독의 말대로 많이 성장해 있었다.
발성, 발음, 감정 표현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물론, 오랜 시간 도형이 쌓아 온 것들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괜히 흐뭇해졌다. 미소를 숨기려 손으로 입가를 가리기도 해 봤지만, 이미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컷! 리허설은 아주 좋았어요. 근데 도형 씨, 감정이 너무 무거워. 조금만 가볍게, 친근하게 가자고. 유찬 씨도 조금만 능글맞게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네. 유의할게요.”
 
유찬과 도형의 대답에 나 감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리허설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할 준비가 이어졌다. 도형과 유찬은 나란히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각자 대본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해성은 그런 도형과 유찬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 사이에 다가가면 도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저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해성은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한참 들여다봤다. 이제 올 시간이 됐는데. 중얼거리던 그가 촬영장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들어오고 있는 건,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커피 케이터링 차량이었다.
 
“어이구, 이게 뭐야!”
 
나 감독이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해성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첫 촬영이니 제가 쏘는 겁니다.”
“에이, 쏠 거면 비싼 점심을 쏴야지!”
“네. 그것도 해 놨고요.”
“역시, 해성 씨는 확실히 남다른 센스가 있어!”
 
하하! 크게 터지는 나 감독의 웃음소리에 해성 또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커피 차량이 촬영장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나 감독은 해성을 그 앞으로 데려갔고.
 
“자! 우리 촬영장 첫 커피 차는 정해성 씨가 쏘는 겁니다! 다들 맛있게 먹고, 힘냅시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듯 큰 목소리로 알렸다.
커피 차 앞에서 꼿꼿이 선 해성은 저 뒤쪽에 서 있는 도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태프들이 먼저 하나둘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갔고, 마침내 유찬이 커피 차 앞으로 다가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선배님.”
 
합숙 리딩 때 보았던 유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그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선배님 호칭마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대본 리딩 때 감정을 터뜨린 김도형 탓이겠지.
능글맞게 웃는 그의 모습에 해성은 그 어떤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네. 오늘 촬영, 힘내세요.”
 
허례허식 같은 대답만 내던질 뿐.
유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성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뒤, 고개를 돌려 도형을 잡아당겼다.
 
“뭐 마실래? 커피가 낫겠지?”
 
커피 메뉴를 훑는 유찬 옆에서 도형이 메뉴를 하나하나 느릿하게 살폈다. 그 모습에 해성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율무차.”
 
당황한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성은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율무차가 맛있는 업체거든, 여기가.”
“그래도 잠도 깰 겸 커피 마시자. 도형아.”
“빈속일 텐데. 거기에 커피를 들이붓는 건… 죽으라는 말 아닌가?”
 
유찬은 매서운 눈으로 해성을 쏘아봤다. 하나하나 걸고넘어지는 것에 불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감흥은 없다. 그 눈빛에 바짝 겁먹을 해성도 아니었고.
해성이 또 무어라 받아치려고 할 때, 도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저는 밀크티 주세요.”
 
그리고 두 사람이 추천한 것과 전혀 다른 음료를 주문했다.
 
“저도 같은 걸로.”
 
해성이 도형의 주문을 따라 하자, 유찬도 질세라 밀크티를 외쳤다.
결국, 해성과 유찬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형이 한번 화를 냈던 전적이 있으니 말은 더 하지 않았다만.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도형이 먼저 나온 밀크티를 받아 들고 슬쩍 뒷걸음질 쳤다.
너무 열중한 탓일까. 해성과 유찬은 도형이 멀어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꽤 오랜 시간, 서로를 노려보며 말하지 못한 불만을 눈빛으로 줄줄 쏟아 냈을 뿐.
 
***
 
밀크티를 마시며 대기석으로 돌아온 도형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우태가 양손에 커피와 쿠키를 든 채 도형의 옆에 앉았다.
 
“역시, 정해성은 정해성이네. 지난번에도 이런 거 준비하지 않았냐?”
“그랬나? 기억이 안 나네.”
 
덤덤하게 대답하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평소와 현저히 다른 반응이다.
어쩌면 주변에서 그토록 바라던 모습일지도 모르고.
 
“뭐야, 김도형.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됐어.”
“…무슨 말이야?”
“정해성에 관한 건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잖아. 신나서 대답하거나, 아련하게 대답하는 거 둘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뭐.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네?”
 
도형은 말없이 밀크티를 홀짝거렸다.
 
“뭐야, 뭔데?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유찬이랑….”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야, 형 궁금해서 죽어. 응?”
 
한참 골몰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도형이 살짝 입을 열었다. 밀크티가 담긴 종이컵이 따뜻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제 마음까지 사르르 녹이는 기분이었다.
 
“홀가분해졌어.”
 
그뿐이다. 해성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옛날 일이 떠오르고. 그때의 내가 다시 기어 나올 것 같고. 저 사람은 나를, 예전이랑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무서웠는데….”
 
우태는 아무 말 없이 도형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추임새를 넣지도 않은 채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배우 대 배우로 만난 건데, 나는 왜 정해성과 김도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도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종이컵의 맨 윗부분을 손끝으로 살살 쓸었다.
 
“정해성 씨가 아니라. 업계 선배로, 같이 작업하는 배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 홀가분해졌어.”
 
더 신경 안 쓸 거야.
다짐하는 순간, 촬영 준비가 끝나 간다며 스태프가 소식을 알렸다. 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딱 하나 전하지 못한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누구한테?”
“정해성 씨한테.”
 
그게 뭐냐면, 말을 고르며 입을 꾹 닫았다. 우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도형이 입을 여는 그때였다.
 
“뭡니까, 그게?”
 
뒤에서 들리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나한테 전하지 못한 말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지는데.”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해성을 마주했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해결해 준다고 하더니. 저에게도 별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고맙다는 말이요.”
 
생각보다 쉽게 전할 수 있었다. 이제껏 바닥을 기어 온 게 이상할 정도로, 너무 쉽고 간결한 한마디였다.
 
“선배님 덕분에 혼자인 시간을 견디는 법도 배웠고. 앞으로 제가 어떤 배우로 거듭나야 하는지도 깨달았어요. 주변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요.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해야 하니까.”
 
해성만큼이나 놀란 우태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툭,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런 소음에도 도형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선배님이 제게 솔직하게 말해 주셨으니, 저도 솔직해질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그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로의 앞길을 응원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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