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전하지 못했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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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리딩은 순조로웠다.
정원에서 바짝 날을 세워 기 싸움을 하던 유찬과 해성도 어느새 각자의 배역에 몰입해 대사를 읽었다.
소연 역시 해성을 향한 적개심을 거두고, 완벽하게 혜아의 역할이 되어 그와 애정 어린 대사를 나누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도형 또한 어렵지 않게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본 리딩이 끝나자, 모두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운동장으로 가 탁구를 치거나, 맥주를 한 캔씩 쥐고 정원으로 나갔다.
원로 배우들은 방으로 돌아가 시간을 보냈지만, 해성만큼은 중앙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해성아, 안 들어가냐?”
 
성혁의 물음이 있었지만, 해성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바깥 정원 벤치에 앉아 웃고 떠드는 도형과 유찬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야. 정해성.”
“형.”
 
성혁은 무심히 자신의 말을 끊어 내는 해성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졌다. 대본 리딩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 원래의 정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기분이다.
 
“저기.”
 
해성의 손가락이 유찬을 향했다. 누가 볼세라 성혁이 해성의 손을 붙잡고 내려 주었다.
 
“손가락질은 말고.”
“저기 내가 앉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뜬금없는 말에 성혁이 바깥의 두 사람을 힐긋거린다.
환한 미소를 띤 채 도형과 이야기하는 유찬을 지우고, 그 위로 해성을 덧그린다. 해성과 도형이 마주 앉아 웃고 떠든다니. 절대 상상이 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과묵하게 표정을 굳힌 채 냉담하게 구는 해성을 떠올린다.
도형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일 테지. 숨이 막히는 장면이었으나, 오히려 그런 상황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적어도 정해성과 김도형에게 한해서는.
 
“…저 모습은, 안 나오겠지.”
“못 나오는 거지.”
“왜.”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성혁의 물음에 해성의 진지한 눈빛이 돌아온다.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구나. 한숨을 푹 쉰 성혁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최유찬 씨처럼 웃으면서 도형이한테 맞장구쳐 줄 수 있어?”
“웃는 건 할 수 있지.”
“웃어 봐.”
 
해성은 바깥의 유찬을 힐긋거리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짓는다.
 
“비즈니스용 미소 말고.”
 
다시 입꼬리가 내려간다. 원래의 정해성처럼 과묵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웃는 게 뭐가 중요해.”
“진심이니까 중요하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웃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던 해성이 자신의 입꼬리 부근을 매만진다.
 
“진심으로 도형이 말에 즐거워하는지, 도형이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운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미소여야 저 모습이 나오지 않겠냐.”
 
다시금 정곡을 찔렸다. 슬쩍 고개를 돌린 해성이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생각해 보면 도형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즐거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 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시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촬영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탈을 쓴 채 만들어 낸 감정과 대사를 해야 했다. 그런 제게 늘 절실했던 건 언제나 침묵이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 어떤 감정도 강요하지 않은 채, 제 곁이라는 이름을 꿰차기를 바랐다.
웃고, 울고, 화내는 감정은 저와 동떨어져 있는 문제라 생각했고.
그 모든 것이 오만이자 실수였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가만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해성이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에 놀란 성혁이 해성을 힐긋거렸다. 한숨이 늘었다. 정해성답지 않게.
 
“…못났다.”
 
이어지는 한마디에 성혁이 고개를 휙 돌린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표정에 당혹감이 여실히 그려져 있었다.
 
“정해성이 처음으로 못나 보이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깨진 상황에서 왜 저는 안 되는 건지 고민하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못나 보이고 한심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이 더더욱 어이가 없을 뿐.
단순히 도형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걸까. 그게 맞나. 그가 도망칠 곳이 되어 주겠노라 했으면서,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마지막으로 도형과 유찬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성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더 생각해 봤자,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성혁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해성의 등을 토닥여 준다. 그래, 그러자. 작게 건네는 한마디에 해성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떠올릴 것. 저에게 주어진 한 가지 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그래서 내가, 누나한테 말했는데.”
 
유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나게 웃던 도형의 시선이 건물 안쪽, 중앙 로비로 향했다.
해성은 소파에 앉아 성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도형은 잽싸게 유찬을 마주했다.
일부러 더 크게 웃고, 과장되게 반응했다. 해성이 보고 있었으니까. 왜 그를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그가 알던 도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도형아.”
 
한참 떠들던 유찬이 말을 뚝 끊으며 도형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샌가 해성의 뒷모습을 좇고 있던 도형이 그를 돌아봤다.
 
“…어?”
“이제 좀 차분해져도 되겠다. 그치.”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왜 그렇게 웃고 떠들었는지 유찬은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일부러 제 장단을 맞춰 준 거고?
 
“…너.”
“알고 있었어. 정해성 의식해서 일부러 더 그런다는 거.”
“유찬아, 나는.”
“괜찮아. 오히려 고마운데.”
 
유찬의 한마디에 또 입이 꾹 닫힌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는 순간마저도 형형하게 느껴졌다.
 
“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만하라고 말해야 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유찬이 자신의 행동을 모두 꿰뚫어 봤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하얗게 굳었기 때문에.
 
“나를 이용해.”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해성에게서 도망가는 일에, 나를 이용하면 돼.”
 
좋아한다는 직설적인 고백 이후에는 없을 줄 알았다. 제게 한 걸음 성큼 다가오는 말이나, 자신을 헤집어 놓는 말 같은 건. 두 번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괜찮아.”
 
제 손을 슬쩍 잡는 유찬의 행동에도 도형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벙끗거리며 그를 한 번, 고개를 들어 저 앞을 한 번 바라볼 뿐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한참 고민하던 도형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유찬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유예현으로서 말하는 거, 이해해 줘. 유찬아.”
 
김도형으로는 말할 수 없다. 유찬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데.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 주던 그 순간마저 모두 짓밟을 수는 없었다.
 
“…말은 고맙지만.”
 
유찬의 얼굴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눈동자가 흔들리던 그 찰나, 도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서온영 씨가 제게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거… 불편해요. 아니, 미안해요. 내가 이겨 내야 할 짐들을 당신에게 안겨 주는 거. 나는 싫어요.”
 
차분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하던 도형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처음엔 놀랐던 유찬도 그 말을 듣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꾹 누른다.
 
“내가 이겨 내고 난 뒤에.”
 
이어지는 대사에 유찬이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 뒤에, 다시 이야기해 줘요. 그땐….”
 
그리고 도형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금 손을 붙잡은 유찬의 모습에 대사를 잊어버릴 뻔했지만, 간신히 머리에 힘을 준 채 입을 열었다.
 
“그땐,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유찬이 제게 전하는 마음이 얕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다거나, 치기 어린 마음으로 내뱉는 일회용품 같은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기가 어긋났을 뿐이다.
정해성을 마음속에서 벗겨 내고 오롯한 김도형으로 서야만 할 때.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김도형을 모두에게 보여 주어야만 하는 시기.
더불어 누군가의 마음의 무게에 짓눌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못하는 상황.
 
“적어도 내 마음이 완벽하게 안정을 찾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요.”
 
유찬 또한 도형이 예현의 대사를 뱉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어렴풋이 전해지는 진심에 유찬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도형의 앞에 서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진심 어린 미소를 짓게 된다. 크게 웃음을 터트릴 때도,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카메라 앞에서와는 다르다.
 
“괜찮죠?”
 
이어지는 물음에 유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손을 힘껏 그러쥔 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땐 오래 못 기다린다는 말을 쓰던데. 나는 그런 말 안 해요.”
 
아니, 이건 온영의 대사에는 없는 말이다. 대본에서의 온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예현을 안아 준다. 그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도형이 당황하던 것도 잠시.
 
“기다릴 수 있어요.”
 
이어지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힌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내가 내미는 손만 놓지 마.”
 
그게 맞는 걸까, 유찬아. 전하고 싶은 물음은 가슴 저 안쪽에 가두어 놓기로 한다. 예현으로 다가갔으니, 끝까지 예현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도형이 나와 버린다면, 그 무엇도 아닌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내가, 붙잡아 주는 순간에 도망가지만 마.”
“…노력해 볼게요.”
 
간신히 뱉은 대답에도 유찬은 웃어 주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이어지는 물음에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찬은 도형의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밀어 넣었다. 있는 힘껏 안아 주는 것이 느껴진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바짝 밀착되는 이 감각이 낯설었다. 이상하지. 그에게 처음 안긴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친구가 아닌 남자에게 안기는 느낌이 든다는 게.
 
“난, 괜찮아.”
 
나직이 이어지는 말에 도형은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괜찮아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찬 선배, 도형 선배! 뭐 하시는 거예요!”
“예현이랑 온영이냐, 유찬이랑 도형이냐!”
 
여기저기서 들리는 외침에 유찬은 한숨을 푹 쉬며 도형을 제 품에서 떼어 냈다.
 
“당연히 예현이랑 온영이죠! 대사 맞춰 보고 있었어요!”
 
도형은 스태프들을 향해 걸어가는 유찬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잡았던 손을 힘껏 쥐었다가 편다. 어쩐지 맞닿은 열기가 사라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놓지 마, 도망가지만 마. 그가 전한 마음을 입안에서 곱씹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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