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릉, 쾅!
천둥 치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을 때. 도형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좌절해야만 했다.
“…여긴.”
눈 안에 담긴 건 제집의 풍경이었다.
아니,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의 집이니 해성과 저의 집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다 끝난 상황인데 어째서 예전의 풍경이 보이는 걸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져 본다. 혹 만져지지 않는다거나, 감각이 없다면 이건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만져지네.”
하지만 도형의 바람과는 달리, 손끝에 닿는 감촉이 선명했다.
결국, 졸음 쉼터로 달려가던 그 순간까지가 꿈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 꿈으로 나와 잠시나마 제 바람을 이뤄 준 것이구나.
해성과 헤어진 것도.
<별을 담은 잔>을 촬영하는 것도.
더 나아가, 자신이 김도형으로서 오롯이 서는 일까지.
“다행… 아니, 아닌가.”
이 순간에도 해성과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진다면 이상한 거겠지.
이제까지 자신이 보던 것들이 모두 꿈이라면, 저는 그 꿈속에서 모든 것을 겪어 본 사람이 되는 건데.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괴로웠다.
해성과의 이별이 꿈이라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지, 헤어지지 않았음에 안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음에 더더욱 혼란이 가중됐다.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 아닐까. 자신이 계속 과거의 해성과 현재의 해성을 곱씹고 있었기에 이렇게 꿈으로 드러난 것이라면.
꿈에서 깨기 위해 제 뺨을 내리치려던 그때.
삐리릭.
전자음과 함께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콰르릉, 쾅!
다시 한번 천둥이 쳤고, 번개가 번쩍거리며 현관에 선 해성을 비추었다.
“…안 잤네.”
무미건조한 목소리. 심드렁한 말투와 어쩐지 지쳐 보이는 표정.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언젠가 자신이 겪어 본 해성이었다.
“…왜 그랬어요?”
그 순간 나오는 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
아니, 이 또한 제 기억에 깊이 남은 한마디였다.
“형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콰르릉! 쾅!
다시금 이어지는 커다란 천둥소리에 도형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제작사에 뭐라고 말했는지, 다 들었어요.”
“…….”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도형을 바라보고 있을 뿐.
‘도형 씨, 서운해 말고 들어요.’
깍지 낀 두 손이 초조하게 움직인다. 손등과 손가락 마디마디를 쓰다듬던 중년의 남자는 도형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는… 연기력에 있어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해요. 아무래도 장르가 스릴러다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해들은 이야기는 결코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
‘정해성 그 자식이 그랬댄다!’
저보다 더 울분에 찼던 우태의 얼굴과 목소리가 여전히 뇌리에 또렷했다.
‘그 자식이, 어? 네가 스릴러 영화 주연 맡기에는 부족할 거라고! 아직, 아직 연기로는 모자란데 모험을 감내할 필요가 있겠냐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해성은 제 편일 줄 알았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해성만큼은 제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잡아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무너진 마음은 잘게 조각나 이어 붙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해성을 향한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진다. 벌벌 떨리던 입술이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형이 나에 대해 뭘 알아요?”
이어지는 물음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꿈으로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걸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해성이 한숨을 탁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나보다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도형아.”
다시금 온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 바닥으로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제작사에 말하지 않았어도… 네 가능성이나, 한계는 보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덤덤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단지 해성의 비정한 평가 때문에 서운해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아닐 텐데.
“너를 쓰지 말라고 한 게 아니야. 그저 네가 어떤 배우냐 묻기에 대답한 것뿐이지.”
“그러니까, 거기에서 왜!”
“네가 드러냈어야지. 네가 어떤 배우인지를. 배역에 대해서 얼마나 몰두하고, 생각하고, 골몰하고 있는지. 그 사람들에게 네가 보여 줬어야지.”
해성의 마지막 말에 도형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마자 도형의 몸 또한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과 어디에도 저의 쉼터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마음을 아프게도 후벼 판다.
결국, 쩍쩍 금이 가던 바닥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잡아 주지 않겠지. 이게 꿈이든, 현실이든.
저는 홀로 떨어져 내려 다시 그 어둠 속을 헤매야만 할 테지.
결국, 힘겹게 도형을 지탱하던 바닥마저 균열에 못 이겨 무너져 내린다.
그때였다. 누군가 저를 단단히 붙잡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형아!”
허억,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그 앞에 보이는 건, 도형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해성과 우태였다.
“이게, 무슨….”
어디서부터 꿈이고 현실인지, 어떤 게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말을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해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태와 함께 바깥에 있던 그는 잠시 몸을 돌려 머리를 쓸어올렸다.
“야,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잘 자던 애가 갑자기 숨도 못 쉬어, 울기까지 해. 근데 깨지도 않아. 깜짝 놀라서 일단 차는 세웠는데.”
우태는 반쯤 몸을 일으킨 도형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해성 쪽으로 눈짓하며 작게 속삭였다.
“웬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너 붙잡고 난리를 치더라니까?”
그 말에 도형의 시선이 해성에게 향한다.
우태의 말대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심호흡을 하던 해성이 두 사람 쪽을 힐긋거린다.
“다 들립니다.”
“아니, 뭐. 들으라고 한 말이지. 들으라고.”
하하! 어색하게 웃던 우태는 물이라도 꺼내야겠다며 차 뒤쪽으로 돌아 트렁크 문을 열었다.
해성은 코웃음을 치다가, 도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을 듯 말 듯. 한참 고민하더니 도형의 무릎을 톡톡 두드린다. 한참 고민한 결과가 이거라니.
꿈속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이질감에 웃음이 다 나왔다.
“꿈이… 영 아니었나 봐.”
“…네.”
“괜찮아?”
“…그런 것 같아요.”
“무슨 꿈이었길래.”
뭐라고 말해야 할까, 머리에 떠오르는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형이, 집을 나갔던 그날.”
제 말에 해성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비가 많이 오고 천둥이 치던 그날… 꿈이요.”
트렁크에서 물을 꺼내 들어오던 우태도, 도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성도 말이 없어졌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도형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 지난 일인데 뭐. 괜찮아요.”
“도형아.”
해성이 도형을 불렀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꿈을 떨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형, 얼른 출발하자. 늦겠어.”
결국, 우태를 채근하는 수밖에.
“어? 어어, 어. 가자. 늦겠네. 그래. 늦겠어.”
부랴부랴 운전석으로 향하던 우태가 바깥에 선 해성에게 눈짓을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차에 타라는 신호였다.
그 뜻을 알아차린 건지, 혹은 그저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해성 또한 더 말을 잇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드르륵,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차라리 잠들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도형의 한숨이 바닥으로 깊게 깔린다.
***
약속 장소였던 졸음 쉼터에 도착하자 해성은 미리 도착한 성혁의 차에 올라탔다.
차에서 내리기 전, 도형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태 또한 도형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혹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촬영장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굵어졌고, 결국 그날 장소 미팅과 리허설은 무산이 됐다.
“그래도 미리 숙소 잡아 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차에서 대기할 뻔했다. 야.”
우태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그에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도형에게 있어 그날의 기억이 얼마나 끔찍한지 우태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자, 보자. 우리가… 어, 여기네. 612호.”
카드 키를 대려는 순간.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반대쪽 엘리베이터를 탔던 해성과 성혁이었다.
“옆…방이에요? 도 실장님?”
“그렇게 됐네요.”
하하, 두 사람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도형과 해성도 시선을 마주하다가 천천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따 맥주나 한잔할까요, 지 매니저님?”
“그럴까요. 쌓인 이야기가 많지.”
아니. 사실 조금 전 있던 일이라던가, 해성과 도형이 왜 이러는지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다.
두 사람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굳이 그에 딴지를 걸고 싶지 않았다.
“형, 나 먼저 들어간다.”
“어? 어어!”
도형은 성혁과 해성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태는 그런 도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휴, 한숨을 뱉었다.
어떻게 해야 저 기분이 풀릴까. 이럴 땐 늘 유찬이 도와줬던 터라,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지 매니저님.”
그때, 해성의 목소리가 고민을 깨트린다.
“이따, 도 실장님이랑 한잔하실 때.”
같이하자는 건가? 그 자리에 끼겠다는 이야긴가?
아니, 불편한데. 싫은데.
수많은 생각을 곱씹는 사이,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도형 씨도 같이 데리고 나와 줄 수 있을까요. 물론, 도형 씨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어딜요?”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해성의 말에 성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자는 뜻이었다.
우태도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럽시다, 그래요. 내가 이따 도형이 데리고 나올게.”
“고맙습니다.”
아침부터 이어진 해성의 기행에 면역이 생긴 우태와 달리, 성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방으로 들어가는 우태를 뒤로한 채, 성혁이 해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왜?”
“아니, 네가 마냥 인색한 놈은 아니란 거 알고는 있지만….”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던 성혁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본 것처럼, 표정은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걸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건 또 처음이네.”
그 말을 가만히 곱씹던 해성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성혁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저기요, 도 실장님.”
해성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성혁을 뒤따라갔고, 이내 활짝 열린 문이 닫힌다.
달칵,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복도에는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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