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다시 한번 가 봅시다.”
벌써 다섯 번째. 나 감독은 영 못마땅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고, 해성은 한숨을 푹 쉬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 맞은편에 서 있던 도형은 이상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평소의 해성이 아니었다.
배역에 몰두해서 그의 독특한 세계를 구상하고 쌓아 가던 예전의 모습과 많이 멀어져 있다.
그런 도형의 마음을 느낀 건지, 해성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분명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도형은 도저히 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괜찮다’라고 생각할 테지만.
‘…아니, 이 사람. 평소랑 달라.’
도형에게만큼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해성이 정말 괜찮지 않다고 해도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그가 말 그대로 괜찮아질지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해성은 단 한 번도 도형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괴로울 때도, 힘들 때도,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몰린 스케줄을 감당하는 그 순간에도.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지. 그러곤 제 방으로 들어갔고.
그렇기에 애써 그의 말에 수긍하는 것이다. 그래,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겠거니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건 김도형이라는 인물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배우 김도형으로 들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염려됩니다.”
그래, 지금은 <별을 담은 잔>을 촬영하고 있는 김도형이었으니까.
“…….”
해성이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선배님이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이 드라마는 끝까지 순항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주인공이잖아요, 이 드라마의.”
잠시 아쉬움이 남는가 싶었지만, 해성은 금세 원래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도형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지 이유라도 말해 주세요. 혹시 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감정선이 어긋나는 것 같다면-”
“아닙니다.”
말을 끊어 버린 건, 제가 말한 이유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텐데. 해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좀처럼 그의 마음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김도형 씨 연기에 문제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니 그냥 신경 끄면 됩니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예요. 그래야만 하고.”
일순간, 도형은 오랫동안 묵혀 왔던 감정을 느꼈다.
온 세상의 소리가 사라지고 저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는 듯한 감각. 모든 것들이 저와 멀어진다. 꼭, 저는 올 수 없는 곳이라고 선이라도 긋는 것처럼.
하지만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시끌벅적한 스태프들의 목소리와 분주한 움직임을 눈과 귀에 담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어지는 도형의 말에 해성은 조금 당황한 듯 미간을 좁혔다.
“신경 끌 테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아니,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오랜 시간 제 곁에서 어깨를 펴지 못한 채 지내 왔으니 저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고.
도형은 해성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유진이 예현을 찾아온 장면이었으니,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그런 걸까.
“김도형 씨.”
그를 붙잡았다. 저를 지나가는 그 걸음이 꼭, 연기를 위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기에. 멀어지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곁에 머무르면 안 되겠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네?”
돌아보는 그 표정은 옛날과 무척 달라져 있었다.
슬퍼 보이지도, 저와의 끝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듯 절망적인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걱정, 고마워요.”
그래서일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뱉고 말았다.
지금의 대화에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저 또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 그 한마디를.
이내 도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짧게 던지는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목 끝이 아릿해진다.
왜 이런 걸까.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 점점 더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헤매었다.
***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물론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NG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 해성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너 무슨 일 있어?”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길. 다그치는 성혁의 목소리에도 해성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알아서 잘하겠다고 받아치며 묵살시켰을 텐데.
“…….”
오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요즘 난리야. 정해성 연기 슬럼프 아니냐, 전남편인 김도형에게 밀리고 있는 거 아니냐.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촬영장에서 말이야.”
“…알아.”
“아는데 왜 그러는 거야. 형한테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야?”
타이르는 듯한 성혁의 말에 운전을 하던 또 다른 매니저인 경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실장님. 해성이 형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야, 경수야. 쟤가 어디 그냥 배우야? 연기 천재라는 타이틀을 한시도 안 떼고 다니던 놈이야. 그런데 쟤가-”
“에이, 이만큼 공백을 가진 건 처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적응이 안 됐을 수도 있죠.”
“얘가 아직 모르네. 야, 인마. 해성이 쟤가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인데.”
왈가왈부하는 말들이 싫었다. 지금 제 마음은 요만큼도 모르면서. 연기에 몰입할 때마다 머리를 괴롭히는 장면들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복잡해서 그래.”
그래서 결국, 솔직하게 던져 놨다.
“언젠가 본 장면 하나가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내내 이어지던 성혁의 말이 그제야 멈췄다. 경수 또한 백미러로 그를 흘긋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조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속사정까지 일일이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숨을 푹 쉬며 터진 말은 그의 진정한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복잡해.”
이래서 사람들이 고해 성사 비슷한 푸념을 하는 모양이지.
막상 말로 뱉으니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껏 제 속을 제대로 털어 내 본 적이 없는 해성으로서는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진짜 정해성답지 않네.”
하지만 성혁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배우라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배역에 집중해야 한다. 네가 늘 하던 말이잖아. 도형이한테도… 좀, 자주 했었고.”
맞다, 그랬지.
또 이렇게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만다. 그것도 타인에 의해서 말이다.
언제였더라. 저와 결혼 발표를 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몇 번이나 NG를 냈던 도형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배역에 몰두하고 집중해야만 진정한 배우가 되는 법이라고.
우습다. 자신이 한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다니.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 좀 차립시다. 정해성 씨. 요즘 대표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너, 몰랐지?”
“…알 턱이 있나.”
“이 자식이, 진짜.”
“형, 형! 저 운전 중이에요. 운전!”
경수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조수석에서 어떻게든 뒤로 넘어와 등짝을 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러길 바라는 것 또한 해성의 진심이었다.
누군가 제 등을 세게 내리쳐 주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원래 정해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그게 해성의 숨겨진 간절한 마음이었다.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거쳐 도착한 촬영장. 해성은 차라리 오늘 열이 펄펄 끓어 몸져눕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유찬이었다.
물론,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같은 드라마를 찍는 이상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네. 안녕하세요.”
덤덤하게 받아치며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들이 마련해 준 의자에 앉자마자 그 곁에 유찬이 앉았다.
“선배님이랑 단둘이서 하는 촬영은 처음이네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해성은 짧게 코웃음을 치며 대본을 주시했다.
오늘은 유진과 온영이 처음으로 감정적 대립을 세우는 신이다. 과하게 예현을 보호하는 유진을 이해할 수 없는 온영과,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예현에게 다가가는 온영을 저지하려는 유진의 갈등.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끔 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의도였다.
유진은 어째서 예현을 그토록 과보호하는가.
물론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과거가 잔존할 것이다. 저 때문에 예현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예현을 무척이나 아끼는 연인, 혜아의 마음.
그에서 비롯된 감정들이 예현을 과보호하게끔 만들었겠지.
지금의 저와 꼭 닮은 마음일까. 그게 아니면, 전혀 다른 마음임에도 자신이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걸까.
“선배님.”
그때, 유찬의 부름이 들렸다.
“준비 끝났답니다.”
어느새 일어나 외투를 벗고 있는 그의 모습에 해성 또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곁으로 다가오는 스타일리스트에게 담요를 내어 주자, 유찬이 해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첫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해성은 그런 유찬의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이 손을 맞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로 만난 사이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앞으로 쭉쭉 치고 나아가는 후배라고 생각하면 맞잡아 주는 게 맞다만.
도형을 생각하면 맞잡고 싶지 않은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한참의 고민 끝에, 해성이 유찬의 손을 맞잡았다.
“나도 잘 부탁합니다. 최유찬 씨, 연기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기대 이상일지 보도록 하죠.”
“그럼요. 제 목표가 선배님이었는데요.”
가시가 있는 말이라는 건, 해성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목표가 비단 연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므로.
“지켜보세요. 저는 꼭, 정해성이라는 이름을 뛰어넘는 사람이 될 테니까.”
선전 포고처럼 들리는 건 제 기분 탓일까.
해성이 가까스로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다른 이들에겐, 대선배로서 후배를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모습처럼 보여야만 했다.
그게 정해성이 쌓아 온 이미지이며, 앞으로도 구축해 나가야 할 모습일 테니.
“그럽시다. 나도 최유찬 씨가 내 뒤를 따라오면 좋겠네요. 부디….”
그러나 피어오르는 적개심은 언제나 억누를 수 없는 법.
저조차도 알 수 없을 만큼 그를 경계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이어지는 말은 아마도, 해성이 잘 드러내지 않는 진심임이 분명했을 것이다.
“돌부리에 넘어지지도, 샛길로 빠져 헤매지도 말고. 잘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유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