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의 등장에 해성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가감 없는 감정 표현이었다.
“해성 선배님은 제가 하나도 안 반가우신 모양이에요.”
“…반갑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껄끄러운 기사도 난 판국에.”
“왜 없어요? 그런 기사까지 난 사이인데, 반가워할 수도 있지.”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것도 보기 싫다.
그냥 자신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거니 싶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니, 아니. 해성 씨는 가면 안 돼. 앉아 있어 봐.”
두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려던 게 아니었나.
해성은 나 감독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건지, 두 사람한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서 말이에요.”
존대가 나왔다는 건, 나 감독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유찬과 도형의 스캔들과는 경우가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두 사람은 친구이고, 극본 내에서 러브 라인이 확실시된 인물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해받을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해성과 하경은 달랐다. 물론, 극중에서 마주치는 장면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는 또 아니었다.
“두 사람, 기사에서 나온 그런 사이는 아니더라도 혹시….”
“아닙니다.”
해성은 딱 잘라 선을 그었고.
“에이, 감독님. 아니에요. 해성 선배님은 그냥 선배님일 뿐이죠.”
하경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물론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해성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아니라고 하기에는 드라마가 입을 타격이 없진 않겠네요.”
“타격? 무슨 타격.”
나 감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하경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렇잖아요. 도형 선배랑 유찬 선배 스캔들도 났고, 해성 선배님이랑 저도 그렇고. 만약 여기서 전부 아니라고 하면… 드라마 촬영장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감독님이 배우들 입을 막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지 않겠어요?”
“그럴 일 없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감독님. 드라마 촬영하면서 스캔들 나는 게 흔치 않은 것도 아니고. 아닌 걸 맞다고 포장해 뒀다가 사실이 드러나면 오히려 타격이 더 클 겁니다. 노이즈 마케팅의 역효과, 모르시는 거 아니잖아요.”
“선배.”
“임하경 씨. 우길 걸 우깁시다. 스캔들이 애들 장난입니까? 그저 그렇게 써먹을 수 있는, 잠깐 이름표처럼 붙였다가 뗄 수 있는 가십인 것 같아요?”
해성이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나 감독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언젠가 다 밝혀질 일.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굳이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판을 뒤집을 히든카드는 항상 손에 쥐고 있지 않았던가.
허를 찌르는 반격으로 스캔들을 무마시키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타격이 크지 않은 배우, 그럴 수밖에 없는 배우.
해성 자체가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같으니, 사람들도 그의 태도를 따라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스캔들을 꺼려 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게 확실했다.
사실, 나 감독은 해성에게 있는 ‘그 무언가’가 도형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상태였다.
함께 촬영이 있는 날엔 묘하게 출근 시간이 겹쳤다. 둘이 눈을 마주치면 슬쩍 미소를 짓는 것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만은 알 수 있는 변화였다. 그래. 오래라면 오래, 자주라면 자주. 두 사람을 지켜봐 온 사람이었으니까.
“둘 다 진정해요.”
물론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해성의 편을 들어 주는 건 아니었다.
하경이 저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해성의 말대로 노이즈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건 유찬과 도형의 스캔들만으로 충분했다.
그 이상으로 써먹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
“하경 씨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모르는 건 아니지만… 글쎄, 우리가 그런 모험을 감내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네. 해성 씨 말처럼.”
“감독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잘 생각해 본 결과가 이거예요. 노이즈 마케팅의 역효과. 단순히 배우들 이미지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가십거리로 드라마를 띄웠다는 오명까지 안게 되는 거예요. 제작사도, 우리 연출진들도. 그리고 이 대본을 집필하신 작가님도.”
그러니 안 된다는 뜻을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는 걸 해성은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포기했겠지 싶어 하경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분한 표정이었다. 숨긴다고 숨긴 거겠지만, 꽉 깨문 입술만으로도 그 기분이 여실히 드러났다.
‘오래 못 갈 케이스군. 길어 봤자 2년.’
설령 운이 좋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조연으로만 머물 것이다.
주연 배우를 맡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만 한다.
감정뿐인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저 생각을 숨긴 채 속으로만 계산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배우 생활을 하며 지켜 온 신조가 제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그로서는 영원히 알지 못하겠지.
“그럼,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 없었다고 알면 될까요?”
“네. 그거면 됩니다.”
“그래요. 그럼 이 사진에 대해서는….”
“백화점에서 마주친 겁니다. 아주 우연히. 임하경 씨가 넘어질 뻔한 걸 붙잡아 준 것뿐입니다.”
나 감독은 사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흐음, 길게 한숨을 쉬며 턱을 괬다.
“이날, 유찬 씨랑 도형 씨도 같은 백화점에 있었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경이 놀라 묻자, 나 감독이 푸스스 웃으며 팔짱을 꼈다.
“도형 씨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그날, 자기도 해성 씨랑 백화점에서 마주쳤는데 그때와 착장이 똑같다고. 하경 씨도 마찬가지고.”
그 말에 가슴이 쿵, 잘게 울린다.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을까. 제게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굳이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그 마음을 차마 헤아릴 수 없어서, 그렇기에 더욱 미안해서.
“뭐, 배우들끼리 쇼핑을 나갔다가 찍힌 사진이라고 얼버무리면 되겠네요. 자세가 좀…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반박하지 않으면야. 금세 묻힐 테고.”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그래,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네요.”
나 감독은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길게 뱉는 한숨에 피로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럼 이제 두 사람 모두 가 봐도 좋아요. 내일도 촬영이니, 들어가서 푹 쉬고.”
“네. 감독님.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뭐,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상대가 해성 씨라 다행이지. 안 그래?”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나 감독의 모습에 해성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랄 것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 말에 반박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고개만 꾸벅 숙인 채 사무실을 나섰다.
하경 또한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여전히 분에 찬, 씨근거리는 표정이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속이 끓었다. 기사 속 사진은 의도가 명확했다. 찍은 사람도, 찍힌 사람 중 하나도.
결국 참다못해 뒤를 돌아 하경을 노려봤고, 그 또한 자리에 우뚝 멈춘 채 해성을 마주했다.
“일부러 그랬습니까.”
해성의 물음을 한참 되새기던 하경이 코웃음을 쳤다.
“여기도 쓸데없이 예민하네. 누구처럼.”
“…누구처럼?”
“됐고, 앞으로 후회나 하지 마세요. 선배님.”
“임하경 씨.”
“차라리 거짓 기사를 내보낼 걸 그랬다고 후회할 날이 올 거예요. 분명.”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나중에 가 보면 알겠죠.”
하경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성혁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눈빛이 맛이 갔다는 말. 상대를 폄하하는 말 같아 좋아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쏘아보는 하경의 눈이 딱 그랬다. 맛이 간 눈빛.
원하는 걸 손에 쥐기 위해 언제든 달려들 것만 같은, 그런 눈빛.
“난 분명, 선배님에게 선택지를 줬어요.”
하지만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형만큼은 도망치게 할 것이다. 그의 그림자에 갇히는 건 제가 될 것이라고 몇 번을 다짐했으니까.
이제껏 도형이 혼자 견뎌 냈던 화살은 앞으로 제 몫이었다.
“마음대로 해요.”
마음을 다잡으니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허리를 더 곧게 펴고 선 채, 하경을 내려다봤다.
“당신이 뭘 하든, 무슨 짓을 꾸미든.”
그리고 입꼬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다. 이까짓 거 하나도 간지럽지 않다는 듯이.
“원하는 대로 될지, 한번 봅시다.”
하경은 오히려 그 모습에 더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한참 씨근거리다가 잔뜩 성질을 내며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해성이 한숨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보물]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몇 번을 고민하다가 바꾼 이름.
도형이었다.
“응, 도형아.”
[형, 감독님이랑 이야기 잘 끝냈어요?]
목소리가 다급한 걸 보니, 어지간히 기다린 모양이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응. 잘 끝났어. 전화 기다린 거야? 지금 끝난 건 어떻게 알고.”
[FD 형한테 부탁 했었어요. 이야기 끝나면 연락 한 통만 달라고요.]
“…참, 너도.”
이렇게까지 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하아, 길게 터지는 숨이 절절 끓고 있었다.
“보고 싶다.”
[나 집이에요.]
“어느 집.”
이렇게 묻는 것도 웃기다.
하지만 지금의 저들에게는 딱 맞는 이름이지.
과거의 집, 현재의 집.
[새로운 집.]
“…그게 뭐야.”
작게 웃으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감출 수 없다. 혹시라도 누군가 지나가며 볼까, 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도형아.”
꼭,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저를 반기며 화사하게 웃던 도형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응?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해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저를 부르는 조막만한 입술이라든가. 새하얀 피부라든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지만 웃을 땐 세상 무엇보다 밝게 빛나는 미소라든가.
그리고 저에게만 보이는 열기에 달뜬 모습까지.
어째서 그 무엇도 눈에 담지 않았는가.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 보듬어 주지 않았는가.
무수히 많은 후회는 곧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진작 찾아온 감정이었으나, 되새기듯 그에게 전해 주기로 했다.
“사랑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에게 두려움으로 다가가거나 갑작스러웠던 건 아닐까 싶은 고민은 하지 않는다.
기다려 주기로 했다. 채근하지도, 보채지도 않은 채로.
[나도. 사랑해요. 형.]
이렇듯 돌아오는 대답이 있었으므로.
“…정말. 진짜로.”
앓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천하의 정해성이 아무도 없는 복도에 쪼그려 앉아서, 열을 식히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도형이기에 가능하고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저와 도형의 집으로, 새로이 일군 저들의 공간으로.
하경이 던진 이야기는 더 이상 해성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도형을 향한 제 마음만을 계속해서 곱씹고, 되새기며 깊이 남기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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