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동안 잊고 지냈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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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신을 끝냈다.
의자에 앉은 도형은 목을 축이며 촬영 분량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야, 김도형. 연기 늘었더라?”
 
그때, 경대가 커피 한 잔을 들고 와 그에게 내밀었다.
마셔, 잔을 까닥거리는 그를 올려다보던 도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보여?”
“어. 좀 하던데.”
 
기분이 좋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도형은 커피를 받아 들며 코를 찡긋거렸다.
마냥 칭찬을 받는 건 익숙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할 게 없나 생각한다. 그리고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허리를 곧게 세워 경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지내긴. 녹록지 않은 타국 생활을 간신히 버텼다.”
“거기서 대학까지 다닌 거고?”
“그렇지. 아주 쉽지 않았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에 도형은 다시 웃음을 삼켰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바라본다. 장비를 옮기고, 설치하는 사람들을 한참 지켜보던 경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야, 너….”
“어?”
“그… 아, 이걸 어떻게 말하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긁적거리던 경대가 슬쩍 도형의 눈치를 봤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기다리던 도형이 경대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뭔데. 말을 해 봐.”
“…너, 정해성 씨랑 진짜 완전히 끝난 거. 맞지?”
 
여기서 갑자기 해성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황한 도형이 커피 잔을 살짝 문지르며 그의 눈치를 봤다.
 
“아니, 아니다. 미안. 괜한 이야기를 했네. 내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어색하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그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다시 커피 잔을 내려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즉답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경대의 입에서 해성의 이름이 나올 줄은. 또, 감정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뿐이지.
아니, 나올 법도 하던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지만, 어쨌든 저와 해성에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 미디어를 통해서 접했을 테니까.
 
“응. 완전히 끝났어.”
 
결국, 한참 고민하면서 뱉은 말은 그것뿐이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무슨 말을 더 하든 간에, 해성과 마침표를 찍은 사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2년 전인데. 뭐.”
 
씁쓸하게 대답하는 도형의 목소리에 경대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그런 경대의 모습이 이상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냐, 힘들었겠다, 지금은 괜찮냐. 저를 위하거나 걱정하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잊어. 딱 한마디로 끝낸 최유찬 같은 친구도 있지.
왜 그러냐 물으려고 할 때, 경대가 저 멀찍이 서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해성을 힐긋거렸다.
 
“진짜 끝난 거 맞아?”
“왜 그런 걸 묻는데? 이유라도 알아야 대답하지.”
“정해성 말이야.”
 
내심 진지해지는 목소리에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선배가 왜.”
“…눈빛이, 끝난 눈빛이 아니던데.”
 
맥이 탁 풀리는 것과 동시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는다.
멈칫거리던 것도 잠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던 도형이 고개를 저었다.
 
“연기잖아.”
“예현이랑 유진이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도형이 해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빛이라. 사실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지금은 예현에게 몰입하고 싶었으니까.
해성의 눈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에게 그 시선을 향하고 있는지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해성이 어떤 눈빛으로 연기하고, 저를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 알 턱이 없지.
 
“사랑이었어.”
 
이어지는 경대의 말에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너, 내 직업이 뭐야.”
“…스크립터.”
“작품 찍으면서 미세한 변화까지 잡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야.”
“…너?”
“그럼 이게 말이 돼, 안 돼?”
 
도형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쥔 커피 잔이 점점 식어 가는 게 느껴진다.
 
“뭐… 그래, 너 들쑤시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고. 네 입으로 끝났다고 할 정도면, 진짜 끝난 거겠지.”
 
경대가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러곤 해성과 도형을 번갈아 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연기로 안 잡아먹히게 조심해.”
“무슨. 저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그래, 그런 마음으로 모른 척하는 것도 좋고.”
 
경대는 도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 한다는 말에 인사를 전하고,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랑이었어.’
 
확신에 찬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이었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너 들쑤시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 저는 들쑤신다고 함께 들썩거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던 도형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잡아먹힐 것 같아도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면, 모른 척 넘겨 버린다면.
저 또한 그에게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는 찰나, 찬바람이 폐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촬영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 2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두고, 소파 위로 털썩 누웠다.
 
“아… 피곤하다.”
 
억제제를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이 나른해지거나 머리가 몽롱해지는, 일명 ‘약 기운’ 이라는 건, 어느 약에나 통용되는 이야기인 모양이지.
억제제를 먹으면 꼭 졸린 사람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촬영이 끝나 갈 시점에 먹었으니, 집에 돌아와 물 먹은 스펀지가 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하아, 길게 한숨을 터트리던 도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씻으러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하던 그때, 어둠 속에서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오늘 고생했습니다.
 
해성의 메시지였다.
미리 보기 창을 바라보던 도형이 그대로 핸드폰을 엎어 제 몸 위에 올려 두었다.
 
“귀찮아.”
 
답장을 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해성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피곤함에 눈을 감은 사이, 또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냥 확인하지 말까 싶었지만, 연출 팀에서 오는 연락일 수도 있으니까.
 
최햇살
 
도형아 
햄이 좋아 소시지가 좋아? 
 
 
이번에는 유찬의 연락.
갑자기 뭘 묻는 거야. 엉뚱한 질문에 푸스스 웃던 도형이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다.
 
최햇살
 
  나는 햄
  근데 왜?
알았어 
내일 촬영장에서 만나 
 
 
이 싱거운 대답은 뭘까 싶었지만, 잠시나마 웃었으니 된 거 아닐까.
짧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어플을 끄는 찰나.
 
정해성
 
자고 있습니까? 
 
 
실수로 막 도착한 해성의 메시지를 눌러 버렸다.
자연스럽게 해성과 나누던 메시지 창으로 넘어갔고, 도형은 앓는 소리를 터트렸다.
 
“아… 이 멍청아.”
 
적당히 자는 척 넘기려고 했는데.
이미 읽었다는 표시가 남은 이상,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겠지.
몇 번이나 메시지를 쓰고 지우다가, 답장을 적어 보냈다.
 
정해성
 
  아니요. 씻고 나왔어요. 무슨 일이세요?
 
 
결국, 선택한 대답은 유치하지만 딱 들어맞는 변명이었다.
 
정해성
 
오늘, 연기 좋았다는 말 해 주고 싶어서요 
 
 
돌아오는 답장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연기가 좋았다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성에게 연기로 칭찬을 받는 게 극히 드문 일이라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눈을 몇 번 비비던 도형이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봤다.
입가에 절로 그려지는 미소를 애써 삼키며 액정을 톡톡 두드린다.
 
정해성
 
  감사합니다.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많이 연습한 거 티 났어요. 연기의 결이 달라졌더라고. 김도형 씨. 
 
 
해성이기 때문에 이 말이 기쁘게 들렸을 것이다.
전남편, 오랜 짝사랑 상대. 그런 수식어를 제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정해성이었으니까.
명실상부 실력파 배우. 외국에서도 탐낼 만큼 재능이 있는 배우. 그를 롤 모델로 삼는 신인 배우가 넘쳐날 정도로, 연기로는 정평이 나 있지 않던가.
그런 선배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해성
 
다음 촬영도 기대하겠습니다. 
  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말 사무적인 메시지였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며 대화를 끝내는데, 어쩐지 이질감이 물씬 밀려왔다.
해성과 이런 메시지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어서일까.
이제야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었다는 것이 씁쓸해서일까.
어쩌면 두 가지 모두일까.
그러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빠르게 젓고, 핸드폰을 소파 위에 엎어 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게 다 경대 때문이었다. 그가 이상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알 수 없는 감정들과 생각을 곱씹지 않아도 되는데.
더불어 이건 모두 약 기운 때문이다. 사고 회로가 멈춰, 제대로 된 생각이 이어지지 않으니까.
건강한 생각으로 뻗어 나가야 하는데, 그걸 약 기운이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니까 정신 차려.”
 
도형은 두 손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짝! 커다란 소리가 거실을 맴돈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곱씹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집을 한참 둘러봤다.
그러던 그때, 다시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왜 이렇게 연락이 쏟아지는 건지.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한 순간. 도형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임하경
 
선배 
이번 주 촬영 없을 때 
괜찮으면 저랑 만날래요? 
 
 
하경이었다.
촬영이 비는 날… 딱히 약속은 없는데, 흔쾌히 그러자고 할 엄두가 안 났다.
왜일까. 어째서 하경과 만나는 게 이토록 꺼려지는 걸까.
 
임하경
 
  이번 주… 봐야 할 것 같은데
  가족이랑 약속이 있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쇼핑하러 가는데 
같이 좀 가 주세요 네? 
 
 
쇼핑이라. 그러고 보니 저도 겨울옷을 사야 할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이상하게 확답을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럼 같이 가자고, 하경에게 대답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임하경
 
제가 밥 살게요 
선물 사야 할 게 있는데 고르기가 힘들어서요 
딱히 친한 사람도 없고.... 
 
 
사람이 너무 마음이 약해도 탈이라는 말을 항상 부정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긍정해도 될 것 같았다.
친한 사람이 없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아니, 그보다는 그 말이 자꾸 눈에 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돌아오는 하경의 대답에 도형은 자리에 꽁꽁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쯤 제게서 멀어지고, 이 답답함이 사라지는 건가. 코끝이 시큰해지고 있었다.
 
임하경
 
해성 선배님 곧 생일이잖아요 
장난으로 선물 드린다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 주신다고 하셔서요 
도형 선배가 잘 알 것 같아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네? 한 번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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