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원하지 않았지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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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독. 톡.
팔걸이를 두드리던 해성이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턱을 괸 채 핸드폰을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얼굴을 문지르며 머리를 쓸어 올리고.
그 행동을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곁에 앉아 스케줄을 정리하던 성혁의 시선도 그만큼 길게 이어진 참이었다.
 
“뭐 하냐?”
 
성혁의 물음에 해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입이 달싹거린다.
 
“말하지 마.”
“형.”
“하지 말라고.”
 
불안했다. 또 무슨 엉뚱한 짓을 꾸미고 있을지,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고민을 이어 가고 있을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단호한 한마디에 굴할 해성이 아니었다. 재차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성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될 때. 그런데도 꼭 해야 할 것 같을 땐 어떻게 하지.”
 
성혁의 입이 꾹 닫혔다. 정해성이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나? 싶었으니까.
얼떨떨한 표정으로 해성을 마주하던 성혁이 ‘어, 그게.’ 짧게 말을 덧붙이며 머리를 굴렸다.
 
“…그럴 땐 보통,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지 않냐? 정말 하고 싶으니까 그런 고민까지 하는 거 아냐.”
 
말을 툭 던져 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지금 자신의 말이 그의 돌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발화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정해성은 변했다. 예전 같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이따금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다가도 금세 표정을 찡그린다거나.
한숨을 푹푹 쉬다가도 혼자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거나.
또 가끔은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자꾸 생각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는 엉뚱한 질문도 했었지.
 
‘너 진짜 왜 그래. 뭐, 요즘 인생이 재미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최근 정해성은 역대급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별을 담은 잔> 출연 소식 이후, 각종 CF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더 이상했던 건, 평소의 정해성이었다면 적당히 조절해 거절할 건 거절했을 텐데. 요즘의 그는 뭐 하나 거절하는 일 없이 모든 스케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 이상했다.
마치 몸이 몇 개나 되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 시작해 밤늦게 끝나는 일이 대다수였다.
결국, 참다못한 성혁이 한마디를 얹었다.
 
‘대체 왜 그렇게 일하냐고, 미련하게.’
‘그래야 머리가 좀 가벼워지니까. 속 답답하지도 않고.’
 
돌아오는 대답은 의미심장했다. 차라리 예전이 나았지. 그땐 무슨 고민을 하는 건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정해성이니까 하고 넘어갔던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뻔히 보이는 고민과 상념이다.
해성이 이상해진 건 정확히 말하자면 도형과 마주쳤던 그 이후부터였고.
조금 더 길을 잘못 타는 것 같았던 건 나 감독과 미팅했던 그날.
이후, 해성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도형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성혁이 더 이해하지 못했던 건, 도형이 히트사이클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집까지 찾아간 행동.
그리고 도형의 입장을 지켜 주기 위해서 굳이 위험한 모험을 시도한 일까지.
도저히 자기가 알던 해성이 아닌 것 같았다.
 
“…야, 해성아.”
“고마워. 형. 이제 감이 좀 왔어.”
“아니, 대체 뭐냐고. 왜 그러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해 성혁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해성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핸드폰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하더니, 이내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가 내려다본 화면에 떠 있는 건, 누군가와의 대화 창이었다.
속에 켜켜이 쌓이던 무언가가 단번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해성.”
“도형이한테 연락했어.”
 
이윽고 성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에 들고 있던 스케줄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뭐?”
“연락했다고. 김도형한테.”
 
아침에 먹은 게 잘못됐나? 그러지 않고서야 정해성이 저럴 리가 없는데.
성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해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잠깐만.”
 
그러곤 해성의 이마를 짚더니,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멀쩡해. 도 실장님이 더 이상합니다.”
 
의아하다는 듯 말하는 성혁에게 돌아오는 건, 매섭게 그의 손을 쳐 내는 해성의 행동이었다.
쯧, 혀를 차던 해성이 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왜, 이제는 하다하다 답장까지 기다리냐?”
 
얼이 빠진 성혁의 물음에도 해성은 덤덤했다. 아무 표정 없이 화면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본다.
 
“그렇게 보여?”
“어. 그렇게 보이고도 남아. 제발 그 핸드폰 좀!”
 
성혁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해성은 보란 듯이 그의 손을 피했다.
그리고 옆으로 슬쩍 옮겨 앉아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관계를 정립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으며, 도형과 무언가 해 보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는데.
자꾸만 도형이 신경 쓰였다. 함께 대본 리딩을 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어느새 들뜬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어차피 얼굴을 맞대면 그 어떤 말도 쉽게 하지 못할 거면서.
 
“야, 하나만 묻자.”
 
해성의 곁으로 다가온 성혁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나만.”
“도형이랑 어쩌고 싶은 건데?”
 
그리고 돌아오는 질문에 다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린다.
 
“무슨 질문이지, 그게?”
“그럼 넌 무슨 행동이냐, 그게? 너 지금 도형이 챙기는 거, 되게… 되게 과해. 알지.”
 
할 말이 없어진다. 자신이 도형을 생각하고, 그에게 보여 주는 행동들이 특이하게 보이는 건가. 잠시간 그런 고민을 하긴 했지만, 깨달음을 안겨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도형이 입장이라면, 네 행동이 엄청, 무지막지하게 난감할 것 같거든.”
“난감해? 왜?”
“넌 진짜 자각이 없는 거냐, 세상의 중심이 너인 거냐.”
 
어휴, 크게 한숨을 쉬던 성혁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너희 헤어질 때 기억나지.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도.”
“…….”
 
해성은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때에 느끼지 못했던 후회를 지금에야 비로소 조금씩 곱씹고 있었으니까.
 
“너, 그때 김도형 안중에도 없었어. 러트 때 제외하고.”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은데.”
“적어도 과거의 도형이에게는 그렇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건,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게 부정적인 이야기라면 더더욱.
성혁이기에 제게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일 테지만, 누구든 간에 이런 이야기를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그런 네가, 이제 와서.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도형이를 신경 쓰고 있어. 솔직히 너, 유찬 씨 신경 쓰는 거 전부 티 나. 알아? 제작 발표회야, 그래. 너도 네 이름 오르내리는 거 싫으니까 그럴 수 있어. 근데 뒤풀이 때는? 도형이 히트사이클 하나로 눈 뒤집혀서 집까지 찾아가는 게 말이 되냐?”
“그건 걱정돼서 찾아간 거고.”
“그거나 이거나, 눈 뒤집힌 건 맞잖아. 콱씨.”
 
아랫입술을 꽉 물며 눈에 힘을 주던 성혁이 크게 한숨을 뱉었다.
이건, 타인의 감정에 무지한 거다. 워낙 자신이 중심인 세상에서 살다 보니 곁을 살피지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겠지.
 
“그러니까. 네 모든 행동들이 도형이에겐,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라고. 걔가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는데?”
“…딱히.”
“그럼, 무시하는 건 괜찮고?”
“…….”
 
해성은 잠시 생각했다. 도형이 저를 무시한다.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면서, 유찬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워지는 모습을 본다면….
 
“싫은데.”
 
그뿐이었다. 싫다는 감정 외에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하, 그래. 싫다고 치자.”
“치는 게 아니라 싫다고.”
“그래, 싫댄다. 김도형이 정해성을 무시하는 건 싫어. 그럼, 도형이가 그냥 네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대했으면 좋겠어? 이전에 있었던 일은 전부 잊고?”
 
성혁의 말에 해성이 다시 생각을 이어 간다. 묵묵히 바닥을 보며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겠지. 아마.”
“알면서 왜 그러냐.”
 
해성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성혁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도형이 난감할 것 같다는 이유도, 그에게 이렇게 연락을 하는 것부터가 어리숙한 행동임을 말해 주고 있는 이 상황도.
한숨을 푹 쉬던 해성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넌 어쩌고 싶은 건데.”
“나는.”
 
또 한 번 입술이 꾹 맞물린다. 열리지 않은 채 입안의 더운 열기를 켜켜이 쌓을 뿐이다.
 
“나는….”
 
그리고 그 순간, 건물 뒷마당으로 들어오는 유찬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왔지? 분명 자신이 여기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해성을 발견한 건지, 유찬 또한 걸음을 우뚝 멈춘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제법 살벌했다.
유찬의 얼굴을 본 순간, 해성의 머리에 딱 하나의 해답이 곧게 섰다.
 
“처음부터 시작해 보고 싶어.”
 
만약 제게도 기회가 있다면.
 
“물론, 특별한 감정은 아니고. 그냥, 형 동생으로서.”
 
그렇게라도 유찬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면.
 
“김도형에게 정해성이란, 그 정도면 충분해.”
 
어째서 최유찬을 라이벌처럼 여기며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해성은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부러 크게 말했으니,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적당히 해.”
 
이어지는 성혁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를 마주하는 시선이 조금 못마땅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형이는 네가 그렇게 친한 척하고, 잘해 주려고 온갖 노력을 해도 마음이 열릴 애가 아니야.”
“왜?”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순간 모든 생각들이 멈춘다. 불어오는 바람에 어디론가 휩쓸려 갈 것 같기도 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기도 했다.
 
“정해성 너 때문이잖아. 김도형이 문 닫아 버린 거.”
 
나 때문에. 성혁의 말을 곱씹던 해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말이 좀 날카롭네. 도 실장님.”
 
어느새 유찬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듣든, 무슨 생각을 하든. 해성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성혁이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누군가 성혁의 등 뒤로 다가와 빠르게 지나치더니, 해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럴 만한 사이라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언제까지 김도형 붙잡고 흔들어야 성에 찹니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해성은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많은 곳이다. 그렇다면, 저 또한 최유찬의 연기 아닌 연기에 화답해 줘야 옳은 일이겠지.
해성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의자 팔걸이에 올려 두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들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김도형이 당신 그늘에서 영영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이어지는 말에 가시가 박혀 있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으나, 그의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아, 길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해성이 제법 여유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유찬 씨.”
“이것보다 더한 선택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늘에 들어가는 건 김도형이 아닐 겁니다.”
 
그때, 유찬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다.
냉정하고 단호했지만, 정해성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 확인된 그 찰나를 잊을 수는 없지.
 
“지난번에 말씀 드렸을 텐데. 최유찬 씨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요.”
 
아닌가요? 되물으며 은은한 미소를 거는 정해성에 유찬이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세운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제게 되묻고 있지만, 이건 최유찬을 향한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정해성이 김도형 그늘 안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한마디에 휘둘리고, 일희일비하는 건. 김도형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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